올해 3월 1일은 기미년(1919) 3.1만세운동의 99주년이고, 내년의 3.1절은 이 운동의 100주년이 된다. 이에, 올해 2018년은 우리에게 일백 년 전 ‘고난당하는 민족과 함께 한 교회’를 기억하며 되새기게 하는 기회이다. 당시 3.1만세운동에 전국의 대다수 교회가 적극 참여했다고 전해오는데, 수년 전부터 개신교 몇몇 교단이 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교회와 인물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해 오고 있다. 감리교의 전수조사는 이미 완료되어서 지난 해 10월 <삼일운동과 기독교 관련 자료집>(전4권)을 출간하였다. 장로교(예장통합)의 전수조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1919년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가운데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은 경상북도 안동이다. 이곳의 주민들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집결되는 장날인 3월 13일, 안동교회(장로교)가 종을 치면 그 종소리에 맞추어 만세시위를 시작하자고 약속했다. 교회의 종소리가 만세시위의 거사를 일으키는 신호였던 것이다.
이 약속을 가슴에 품은 안동교회의 담임 김영옥 목사와 장로 이중희・김병우는 교인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기(소위 ‘가리방’)로 대량 찍어냈다. 독립선언서는 김병우의 아들 김재명(당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재학)이 서울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나 거사를 하루 앞둔 3월 12일 은밀하게 진행되던 만세시위의 준비가 일제 당국에게 발각되었다. 담임목사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히었다. 민족의 독립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한 순간에 꺾이었다.
그러나 약속된 3월 13일에 안동출신 영덕 포산교회 장로 이상동이 안동 시내에서 일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현장에서 그는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만세시위는 사그라져가던 안동 만세시위의 불씨를 다시 살렸다. 그 이후, 안동 지역의 만세시위는 14곳에서 일어났고, 이 가운데서 6곳의 시위를 교회가 주도했다고 한다.(김희곤, <안동의 독립운동사>, 246) 예컨대 예안면의 만촌교회(현재 예안교회), 임하면의 오대교회, 풍산면의 풍산교회 등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정확히 99년이 지난 오늘, 교회의 종소리는 우리에게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가물거린다. 농어촌 교회들을 찾아가 보면 교회 종탑이 아직도 꽤 남아 있긴 하지만, 종탑의 종소리가 멈춘 지 벌써 오래 전이다. 관광객을 위한 종탑이라는 인상이 짙다. 교회에서 종소리가 사라짐과 더불어 교회에 대한 지역의 관심도 약화되었다. 더구나 1960년대 산업화의 시작과 함께 대도시의 경제성장 및 인구급증 속에서, 도시의 교회들은 물량적 성장을 거듭했으되, 교회가 종을 치지 않았거나 치지 못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현상이다. 즉, 교회와 마을 주민들이 상호 무관심 속에서 따로 분리된 채로 지낸 것이었다. 지역 주민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내 교회’로 데려오는 전도대상일 뿐이었다. 1919년 일제 강점기에 고난당하는 민족의 고통에 동참했던 교회로부터 상당히 이탈된 모습으로 오늘의 교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오늘의 현실에서 지나간 1919년에 경북 안동교회의 종소리가 3.1만세시위의 시작 신호가 된 점을 생각해 보면, 그때는 교회에 대한 지역의 신뢰가 대단히 깊었음을 일깨운다. 그 종소리는 지역 주민들에게 민족의 독립에 대한 희망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때는 안동교회가 설립된 지 불과 10년 남짓인데, 그 짧은 세월 속에서 교회가 사회의 신뢰와 신망을 얻고 있었다. 반면에, 오늘날 130여년 한국 교회는 지역과 분리되어 마치 ‘외딴 섬’처럼 존재하고 있다. 이에, 1919년 3.1만세운동의 신호가 된 교회의 종소리가 오늘 2018년 교회에게 무언(無言)의 교훈을 주고 있다.
임희국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