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년 11월 24일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낙스(John Knox)가 사망했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선구자이면서 동시에 장로교 정치제도를 최초로 형성한 장로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가 존 낙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원래 존 낙스는 로만 가톨릭의 사제였으나, 세인트 앤드류스의 종교개혁가 조지 위샤트의 설교를 듣고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여 그는 조지 위샤트의 호위무사를 자처했다. 그러나 조지 위샤트가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화형당하고, 세인트 앤드류스가 프랑스 군에 점령되어 존 낙스는 프랑스로 잡혀가 갤리선의 노예로 지내게 되었다.
1549년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갤리선에서 석방된 존 낙스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장 칼뱅(Jean Calvin)의 설교와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 존 낙스는 제네바에서 그 당시 종교적 이유로 피난 온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대상으로 따로 목회를 하였다. 낙스는 칼뱅의 가르침을 잘 계승해 이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다시 성경을 기반으로 하여 종교개혁을 시작한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존 낙스는 거침없는 설교로 스코틀랜드의 국교를 로만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바꾸려 노력했다. 존 낙스는 심지어 스코틀랜드의 여왕 앞에서도 담대하게 설교했다. 김중락 교수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에서 존 낙스를 이렇게 묘사한다. “여왕과 낙스의 대담은 낙스의 일방적인 설교였다. 낙스의 어투는 단호했고 공격적이었다. 낙스는 여왕에 대한 예의보다는 종교개혁자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주장하는 편을 택했다. 당시 유럽에서 일개 목회자가 국왕에게 '무지하다'는 표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이는 스코틀랜드 왕권의 미약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낙스의 대담함을 보여주는 예였다.” (131쪽)
결국 스코틀랜드 국교로 장로교를 세운 종교개혁가 존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에 사망해서 에딘버러의 ‘세인트 자일스 성당’에 묻혔다. 시간이 흘러 그의 무덤이 있던 자리는 주차장이 되었고 현재 ‘세인트 자일스 성당’ 의 주차장 23번에 존 낙스의 무덤을 알아볼 수 있도록 사람들이 표시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