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년 8월 24일에 로만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파리에 있는 위그노가 학살당하는 성바르톨로뮤축일 대학살이 발생했다. 이날 당일에만 2,000-4,000명이 죽임을 당했고, 이어지는 한 주간 약 8,000명에 달하는 위그노가 목숨을 잃었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 역사에 나타난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장신대 교회사 박경수 교수가 쓴 ‘개혁교회, 그 현장을 가다’에는 성바르톨로뮤축일 대학살이 어떤 배경에서 일어났는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책에 따르면, 프랑스 내에서 위그노의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문제가 계속 발생하자, 당시 황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자신의 딸 마르가리타와 위그노인 나바라 왕국의 앙리를 결혼시켜서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 그리하여 1572년 8월 18일 월요일에 앙리와 마르가리타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창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로만 가톨릭의 설교자들은 만일 이 결혼식이 치러진다면 끔찍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위협해왔다. 그들은 이런 왕가의 정략결혼이 저주스러운 이단(위그노)과 협력하려는 왕의 의도를 보여준다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런 로만 가톨릭 신자들의 불만은 1572년 8월 24일 새벽을 기점으로 폭발했다. 이날 주일 새벽에 생제르맹록스루아 교회당에서 종소리가 울리며 학살이 시작되었고, 프랑스의 귀족이자 해군 제독이면서 위그노의 지도자였던 콜리니는 자신의 침심에서 살해당했다. 이후 가톨릭 신자들과 왕궁 근위대는 위그노 지도자들을 샅샅이 수색해 잠에서 깨지도 못한 이들을 살육했다.
위그노를 향한 파리에서의 폭력은 거의 한 주간 계속되었다. 루브르 광장, 노트르담 광장, 파리 시청광장 등 도심 곳곳에서 위그노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군중들이 집어던진 시신들이 파리를 가로지르는 센 강을 피로 물들이고 떠내려가 지금의 에펠탑 근처에 쌓여 언덕을 이룰 지경이 되었다. 이처럼 성바르톨르뮤 축일 대학살은 프랑스에서 위그노가 사회의 비주류로 전락한 대표적인 사건이었으며, 이후 위그노는 끔찍한 박해의 역사를 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