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4년 7월 18일에 스위스 종교개혁가 하인리히 불링거가 스위스의 브렌가르템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인리히 불링거는 츠빙글리와 함께 스위스 개혁교회의 신학과 신조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불링거와 츠빙글리가 16세기에 종교개혁을 이끌며 주로 활동했던 도시가 바로 스위스 상공업과 금융의 중심지인 취리히다. 장신대 박경수 교수가 쓴 ‘종교개혁, 그 현장을 가다’에는 취리히에 관한 개괄적 정보가 잘 담겨 있는데 취리히는 1519년에 츠빙글리가 이곳의 목회자로 오면서 스위스 내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이후 베른, 제네바 등의 여러 도시가 종교개혁에 동참하게 되었고, 현재 취리히에는 프라우뮌스터 교회, 그로스뮌스터교회, 취리히신학대학 등 종교개혁과 관련된 많은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불링거의 인생은 1525년에 취리히에서 츠빙글리를 만남으로 스위스 종교개혁에 더욱더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불링거는 성서를 읽으면서 에라스무스, 멜란히톤, 루터의 성서연구를 정독하며 성서를 인문학적으로 보는 눈을 기를 수 있었다. 1529년에 불링거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브렘가르텐 교회의 목회자로 청빙을 받았다. 때마침 그는 아버지의 목회 자리를 물려받았고, 이곳에서 1531년까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설교자로 일했다.
이후 불링거는 취리히 시의회에서 1531년 12월 9일에 츠빙글리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531년에 츠빙글리가 카펠 전투에서 전사하여 취리히의 종교개혁을 이끌 목회자가 필요했는데, 불링거가 바로 그 후계자가 된 것이다. 불링거는 1531년부터 1575년까지 무려 44년 동안 취리히의 목회자로 섬기면서 개혁교회의 근간을 세우는 일을 했다. 불링거는 개혁주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스위스 신앙고백’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불링거가 죽은 이후에 취리히에 츠빙글리와 불링거를 이을 후계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취리히는 개혁주의 교회에서 주도권을 서서히 상실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