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 임재훈 목사
  • 승인 2018.08.31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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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코흐, 카타리나 폰 보라 기념상, 1999년, 청동, 170x60x80cm, 비텐베르크, 루터하우스
니나 코흐, 카타리나 폰 보라 기념상, 1999년, 청동, 170x60x80cm, 비텐베르크, 루터하우스

독일 현대여성조각가 니나 코흐(Nina Koch, 1961-)가 제작한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1552)의 청동상(Bronzeplastik, 1999)은 안정되고 정적인 분위기의 여느 기념상과 달리 분주하게 두 팔을 흔들며 종종걸음으로 루터하우스 정원을 가로 지르는 동적인 모습이다. 검소하고 단아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그녀의 얼굴 표정은 작은 체구와 달리 강한 의지와 부지런함을 담고 있다. 마르틴 루터의 아내로 여섯 자녀의 부양은 물론 10여 명의 하숙생과 남편의 비텐베르크 동료들 그리고 각지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로 인해 많을 때는 40여 명 식객의 가계(家計)를 운영하던 그녀의 생전 모습을 직시한 여성작가의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카타리나는 일꾼들과 함께 중세인의 주업이던 농사와 목축은 물론 어류양식, 맥주양주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경제활동을 운용해 예전에 검은 수도원(SchwarzesKloster)으로 불렸던 저택의 살림살이를 경영하였다. 저택 안주인의 역할만이 아니라 자녀들의 양육과 교육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 알려진 것처럼 남편 루터의 신앙의 동지, 개혁운동의 동반자였음은 물론이다. 그런 아내를 루터는 ‘나의 주인 캐테’(mein Herr Käthe)라고 부르며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였고, 역사가들은 카타리나의 아내와 주부의 역할을 넘어선 종교개혁 동역자의 역할을 기려 그녀에게 ‘여성루터’(Lutherin)라는 존칭을 부여해왔다.

 

니나 코흐, 루터하우스 정원을 가로지르는 카타리나 폰 보라
니나 코흐, 루터하우스 정원을 가로지르는 카타리나 폰 보라

카타리나가 중세의 여느 여성들과 달리 신앙적인 분별력과 경제활동을 위한 제반 능력과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수도원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당시 극소수의 귀족 여성을 제외한 대다수의 평민 여성들이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와 미신적 신앙을 벗어나 종교적인 정체성을 지닐 수 있는 영적 수련을 접할 수 있는 경우는 수도원이 아니고는 곤란하였다. 루터하우스를 운영한 농업과 목축업, 양식업, 양조에 대한 지식과 능력 역시 수도원의 수녀시절에 습득한 것이다. 중세 말 수도원제도가 지닌 여러 폐단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들이 교육을 통해 자의식을 개발하고 영적인 분별력을 형성할 수 있도록 기여한 수도원의 역할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르멜타우트 아펠-브레글러, 야누스 얼굴을 지닌 카타리나, 토르가우, 카타리나     루터 기념관
이르멜타우트 아펠-브레글러, 야누스 얼굴을 지닌 카타리나, 토르가우, 카타리나 루터 기념관

카타리나 폰 보라는 작센 선제후 령의 작은 도시 리펜도르프(Lippendorf)의 몰락한 귀족가문에서 1499년 1월 29일 출생하였다.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귀족집안의 자녀들이 수도원에 의탁되는 관행에 의해 카타리나는 여섯 살 때 가족을 떠나 브레나의 베네딕토수녀원학교(Klosterschule der Benediktinennen in Brehna)에 보내져 그곳에서 기초적인 읽기, 쓰기와 산수를 배웠다. 열 살이 되던 1509년 님프쉔의 시토회 성모대관 수녀원(Zisterzienserinnenkloster Marienthron in Nimbschen bei Grimma)에서 수련수녀 생활을 시작하면서 라틴어와 음악을 공부하였고 수도원의 자급자족 경제를 위한 농업과 목축업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였다. 1515년 종신서약 후 본격적인 수도자(Nonne)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그로부터 이 년 후 루터의 종교개혁 소식을 접한다. 1523년 부활절 전날 토르가우 시의원 레온하르트 쾨페의 도움으로 8명의 동료 수녀들과 수녀원을 탈출해 토르가우를 경유해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였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었던 수녀들은 비텐베르크 유지들의 가정에 분산해서 생활하였는데 카타리나는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d. Ä)의 집에 기거하였다. 이 년 후인 1525년 6월 13일 그녀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혼인하였으며 이후 선제후 요한 불변공(Kurfürst Johann der Beständige)의 배려로 검은 수도원(아우구스티너수도원)에서 거주하게 된다.

‘비텐베르크가 종교개혁을 낳은 어머니라면, 토르가우는 종교개혁을 양육한 유모이다’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종교개혁 당시 토르가우(Torgau)는 개신교를 지지한 작센 선제후령(Kurfürstentum Sachsen)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무엇보다도 토르가우는 카타리나의 생애와 각별한 연관을 갖는 도시이다. 토르가우는 24세의 카타리나가 1523년 수녀원을 탈출해 비텐베르크로 향할 때 속세에 나와 처음 머물렀던 곳이었으며, 루터 사후 경제적으로 힘겹게 생활하던 53세의 그녀가 페스트를 피해 자녀들과 이주해왔다가 마차사고로 1552년 12월 20일 생을 마감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신은 토르가우 성 마리엔교회(St. Marienkirche)에 매장되었으며 숨을 거둔 장소는 현재까지 보존되어 ‘카타리나 루터 기념관’(Katharina-Luther-Stube in Torgau)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기념관 중앙 홀의 카타리나 흉상은 남성과 여성 / 의연한 분위기와 속상해하는 표정의 두 가지 이미지를 지닌 야누스 양면상(Janusgesichtige Bronzeporträt)의 모습이다. 칼스루에 출신의 여성작가 이르멜트라우트 아펠-브레글러(Irmeltraut Appel-Bregler)는 야누스 흉상(Katharina als janusgesichtige Frau Käthe und Herr Käthe)을 통해 카타리나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그녀의 작품은 이제껏 종교개혁자 루터의 공적인 이미지의 그늘에서 ‘동반자로 활약한 여성루터’(tatkräftige Lutherin)의 커리어에 주목하였던 우리의 눈길을 카타리나 본연의 존재에 대한 이해의 차원으로 향하게 한다. 때로 의도치 않게 부딪치는 삶의 고난과 시련 앞에서 힘들어하고 속상해하는 표정을 짓는 내면을 지닌 ‘개인으로서의 카타리나’(Katharina als Individuum)를 만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임재훈목사독일 칼스루에벧엘교회 담임, 유럽기독교문화예술연구원장
임재훈 목사
독일 칼스루에벧엘교회 담임, 유럽기독교문화예술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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