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와 순례
걷기와 순례
  • 옥성삼 교수
  • 승인 2018.10.0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페인 동북쪽 갈리시아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다녀간 야고보는 AD 44년 예루살렘에서 순교한다. 9C 별이 빛나는 산티아고 들판에서 목동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야고보의 무덤에 성당이 지어졌다. 12C 교황은 십자군 전쟁을 이용한 교황권 강화 그리고 신앙의 결속을 통한 이슬람 대항 등의 목적으로 야고보의 축일에 산티아고를 방문하는 순례자에게 그동안의 죄를 사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la)가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중세 가톨릭의 3대 성지가 되는 순간이다.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13C 전후하여 산티아고 순례자는 한 해 50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1492년 이슬람으로부터 가톨릭의 영토가 회복(Reconquista)된 후 500년 동안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산티아고 순례길은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도시를 방문하여 ‘성지순례’를 언급하면서 다시 역사의 무대로 나오게 된다. 이 순례길은 1987년 유럽연합의 문화유산 지정과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세계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톨릭 신자를 넘어 전 세계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온 것은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로가 1986년 이 길을 순례한 후 1987년과 1988년에 연이어 출간한 순례자<Diario de um Mago>와 연금술사<The Alchemist>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산티아고 길에 순례자가 늘어날 즈음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동유럽의 독립이 본격화되고, 자본주의의 승리로 이데올로기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다. 한편에서는 디지털 정보통신기술을 바탕으로 한 신경제와 WTO 체제의 신자유 자본주의 세계화가 전 지구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시기였다. 컴퓨터와 인터넷에 기반한 생산과 소비의 글로벌화는 국가 단위의 보호막을 약화시키고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무한 경쟁으로 내몰리며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경쟁과 변화의 일상화가 가져온 불안정성은 시대 문화가 되었다.

전통사회의 경험과 기술이 산업사회의 전문가 지식체계로 대체 된지 한 세기 만에 성찰적 지식으로 통칭되는 창의성이 생존의 필요 요건이 되었다. 질주하는 세계화 시대 사람들은 죄 사함이나 관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성찰하기 위해 걷기 시작한다. 산티아고 순례는 어느 날 맞닥뜨린 세계화(Globalization)에 당황하는 현대인에게 숨을 고르는 완충지대 혹은 작은 비상구로 가는 상징이기도 하다. 중세 산티아고 순례길이 이슬람과의 대치 속에서 개인적 영혼 구원을 목적으로 한 영적 대피로였다면, 20C 말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세계화로 지친 영육을 치유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길로 재조명되었다.

1993년 전남 강진에서 시작된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는 ‘세계화’ 초입에서 서성이던 한국인에게 인문학적 성찰을 동반하는 도보여행 신드롬을 불러왔다. 세계화를 뚫고 나가는 힘이 지구 지방화(glocalization) 즉 ‘우리 것에 대한 나의 성찰’로 시작된다는 것에 대중이 공감하게 되었다. 사회적 정체성 위기에 대중의 ‘문화유산답사’는 사적 성찰보다는 공동체적 행동이기도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가 가져온 우리 것에 대한 공동체적 공감대가 사적 성찰의 걷기로 대중화되기에는 다시 15년이 걸린다.

언론인 서명숙은 일상을 접고 산티아고 길을 다녀온 후 2007년 9월 8일 제주 올레길 1코스 15.6km를 한국 사회에 내놓는다. 1987년 민주화운동 20년, 1997년 IMF 세계화 10년의 현기증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올레길을 찾았다. 제주 올레로 시작된 국내 도보여행 열풍은 둘레길, 골목길, 해파랑길, 옛길 등 전국에 수많은 산책로와 도보 여행길을 만들었다. 제주 올레길은 2012년에 일본 규슈 올레길로 수출되고, 지난해는 산티아고 순례길과 도보여행 문화 확산을 위한 상호 협력 체결을, 올해는 북한 올레길을 추진 중에 있다. 2018년 한국관광공사의 두루누비(durunubi.kr) 사이트에는 총 584길(걷기 543길, 자전거길 41)이 소개되어 있고, 내년에는 카약과 카누길이 추가될 예정이다.

걷기는 삶을 이루는 기본 활동이고 살아 있음의 증명이다. 걷기에 성찰이 동반될 때 걷기는 순례가 된다. 지금 걷는 여기의 골목길이 기억의 터로서 재발견되고 새롭게 느껴질 때 나는 순례자가 된다. 순례자는 두 발과 마음과 영이 함께 걷는다. 오감으로 걷는 성찰적 걷기가 순례로 이어지면 비로소 왜곡되고 퇴화된 영적 존재로서 우리의 정체성이 삶의 질문을 품고서 다가선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주한 일상을 멈출 수 있는 시간의 편집력과 내일의 염려와 맞서는 오늘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체질화되기 위해서는 주일예배 시간을 정하여 지키듯 매주 매월 우선적인 걷기 시간의 확보가 필요하다. 더불어 상업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기제가 발을 디디지 못하게 자주자주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일상의 골목길을 걸으며 소비를 즐기고 관광도 할 수 있지만, 순례자가 되어 창조와 구속을 회상하고 부활과 영원을 전망하며 신망애(信望愛)의 복음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걷기는 21세기 목회가 주목하는 키워드 ‘생명과 영성’의 실천사례이며, 순례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음미하는 ‘안식의 신앙’의 구체적 형태이기도 하다.

 

 

옥성삼 교수연대연합신학대학원 책임교수크로스미디어랩 원장  가스펠투데이 기획편집위원
옥성삼 교수연대연합신학대학원 책임교수
크로스미디어랩 원장
가스펠투데이 기획편집위원
예술목회연구원 연구위원

 

 

가스펠투데이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Array ( [0] => Array ( [0] => band [1] => 네이버밴드 [2] => checked [3] => checked ) [1] => Array ( [0] => talk [1] => 카카오톡 [2] => checked [3] => checked ) [2] => Array ( [0] => facebook [1] => 페이스북 [2] => checked [3] => checked ) [3] => Array ( [0] => story [1] => 카카오스토리 [2] => checked [3] => checked ) [4] => Array ( [0] => twitter [1] => 트위터 [2] => checked [3] => ) [5] => Array ( [0] => google [1] => 구글+ [2] => checked [3] => ) [6] => Array ( [0] => blog [1] => 네이버블로그 [2] => checked [3] => ) [7] => Array ( [0] => pholar [1] => 네이버폴라 [2] => checked [3] => ) [8] => Array ( [0] => pinterest [1] => 핀터레스트 [2] => checked [3] => ) [9] => Array ( [0] => http [1] => URL복사 [2] => checked [3] => )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298-4 삼우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42-7447
  • 팩스 : 02-743-744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상현
  • 대표 이메일 : gospeltoday@daum.net
  • 명칭 : 가스펠투데이
  • 제호 : 가스펠투데이
  • 등록번호 : 서울 아 04929
  • 등록일 : 2018-1-11
  • 발행일 : 2018-2-5
  • 발행인 : 채영남
  • 편집인 : 박진석
  • 편집국장 : 류명
  • 가스펠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가스펠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peltoday@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