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23) 1. 평양 선교부
북한교회사(23) 1. 평양 선교부
  • 황기식 목사
  • 승인 2019.05.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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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교사들이 본 평양의 역사

평양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동시에 세계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평양은 기자시대(B.C 1133)부터 시작된다. 평양 선교부가 있던 곳 주변 뒤로는 기자성벽, 기자우물 도시 북쪽 숲속의 기자무덤이 있다.

평양은 기자조선 이전에 한국의 건국 시조인 단군(B.C 2332년)의 전통적인 수도였다. 그의 무덤이 이 도시의 동쪽 강동에 있다라고 선교사들은 기록하고 있다.

1492년에 그를 기념해서 세운 사당이 아직도 평양에 있다. 기자가 도착했을 때 단군 왕조의 마지막 왕이 황해도 구월산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죽었다.(Korea Review, 1906. PP.321-324, 재인용.)

위만이 B.C 194년 평양에 왔을 때 기자 왕조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마한 왕국을 건설했다. 그 후 중국이 또 다시 침략했던 B.C 108년 위만의 자손이 죽임을 당했고, 대동 강 건너편 평양 남쪽에 낙양의 새 수도를 세웠다.

그 후 234년과 467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 왕국(B.C 27-668)의 수도를 평양에 새 수도를 세웠다. 최초 불교 승려 순도는 372년 평양에 왔고 5년 후(377년) 아도가 왔다.

평양 선교부 정 서쪽에 있는 철도역 근처의 보통문은 고려왕조의 성종 치세 기간에 세워졌는데 이것은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평양에 개신교는 로버트J. 토마스(Robert. J. Thomas) 목사가 준비했다. 그는 1866년 오늘날의 철교 바로 아래 대동강의 한 섬에서 순교했고, 그를 기리는 토마스 기념교회를 강 뚝 반대편 남쪽에 세웠다. 평양 최초의 개신교인들 중에서 일부가 그 순교 장면을 목격했으며, 토마스가 죽을 때 나누어 주었던 한문 성경들을 가지고 있었다.

평양은 1884년에 한국 선교회가 창립 되었을 때와 마찬 가지로 지금도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1932년 평양 인구가 144,215명이었고, 그 중에서 19,268명이 일본인이었다.

평양 근처에 석탄이 매장돼 있어 장차 한국 산업의 중심의 도시가 될 것이다. 이곳이 1930년에 콘프로덕스 컴퍼스(Corn products company)의 새 공장부지로 지정돼 있었다고 말한다.

(헤리로즈저 최재건역. 미국 북장로교한국선교회사, 2009.PP.145-146)

2) 평양을 최초로 방문한 선교사

장로교와 감리교는 평양을 선교기지로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재빨리 평양을 방문했던 것이다. 먼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7년 4월24일 평양을 방문했다.

장로교는 언더우드선교사가 1887년 가을에 평양과 의주를 방문했다. 1888년 봄에 장.감연합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 두 분이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가 4월28일 미국 공사가 두 분을 소환했다. 그 때 언더우드는 평양에 권서인 한명을 평양에 남겨 뒀다.

언더우드 부부는 1889년 3월 신혼여행 중에 평양을 방문했다. 그 때 언더우드 부부는 평양 도시 외곽 한적한 곳에 선교기지(후에 평양 선교부 기지)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언더우드 부인은 심하게 앓다가 회복된 어느 조선 기독교인의 어머니 집을 방문했는데, 이 도시를 떠나온 후 75세 된 “한 늙은 남자가 따라와 사람이 죄에서 떠날 수 있게 하는 종교에 관해서 물었다”고 전한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1889년에 스크랜톤 선교사와 동행하여 3번째로 평양을 방문했다. 이리하여 3년동안 5차례 선교사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장로교 마펫 선교사가 평양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아펜젤러와 헐버트(H. B. Hulbert)가 동행하였다. 그들은 황주에서 우기에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는 위험천만한 모험을 한 후 1890년 8월28일 평양에 도착했다.

아펜젤러는 의주로 갔고 헐버트는 그의 방문 목적이었던 외국인 공동체를 위한 석탄을 구입하지 못한 채 곧 서울로 돌아갔다. 마펫은 2주 동안 머물다가 소래로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평양의 김선달이 운영하는 한 여관에서 마펫이 2주간을 보냈을 때 있었던 일을 번하이즈(Bernheise) 선교사가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그는(마펫) 많은 한국인들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들은 생소하고 키가 크고, 밝은색의 머리털과 큰 코를 가진 훌쭉한 외국인을 보고 소리(음성)도 들어 보려는 호기심에서 마펫에게 왔다.”

마펫은 자신을 방문한 군인들에게 한문성경을 보여 주면서 한국인 어학선생 이 씨의 도움을 받아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려고 했다. 몇 년 후 마펫이 그 마을에 교회를 세웠고 그 사람의 형은 나중에 장로가 됐다.

마펫은 평양에 머무는 동안 장로교 중앙교회를 세웠다.(널다리골 교회- 중앙교회 – 제1교회 – 장대현교회로 이름이 변경됐다.) 중앙교회가 세워져있는 언덕길을 걸어서 올라갈 때 몇몇 어린아이들이 돌을 던졌다.

마펫은 보트를 빌려 타고 어학선생, 요리사, 짐꾼 등을 싣고 강을 따라서 소래 근처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그 배의 항해 능력이 형편없는 것으로 밝혀져서 황해도 안악에서 그 배를 버리고 육로로 소래에 가서 그곳에서 기독교인들과 한 주일을 머문 뒤 서울로 갔다. 그래서 마펫은 6주를 보냈던 것이다.

서울 영은문에서 미국 영사관위에 휘날리던 옛 영광을 보았을 때 엄습했던 애국주의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듬해(1891년)2월에 마펫과 게일은 평양, 의주, 목단으로 가고 그곳에서 동쪽으로 창성(강계 북쪽)과 함흥으로 가고 남으로 원산과 서울로 가는 오랜 선교여행을 했다. 평양에서 잠깐 머물 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의주에서 한석진이란 한 젊은 기독교인을 만났다.

한석진을 나중에 마펫이 평양에 갔을 때 첫 번째 조사가 됐으며 장로교 초대 목사 일곱 중 한명이 됐다. 1891년 가을에 마펫은 다시 브라운(Hugh brown)의사와 함께 평양과 의주를 방문했다. 평양에서 4명의 학습교인을 받아들였고, 마을 밖에서 7명을 받아들였다.

1892년 마펫은 평양과 의주로 3번 갔다. 한번은 의사 빈톤(C.C. Vinton)과 동행했다. 의주에서 그는 한석진 씨를 만났고 세례를 주어 후에 자신의 조사가 되게 했고, 평양에 선교기지의 장소를 결정했다. 그래함리(Graham) 목사는 1892년 9월에 도착해 마펫과 함께 새로운 선교기지를 개설하는 일을 맡게 됐다.

1893년 2월에는 평양으로 가서 한석진씨를 통해 현재 여자성경학원이 있는 한 부지를 샀다. 그러나 한국인들 사이에서 즉시 문제가 발생해 이 도시의 관원들이 한 씨에게 그 자산을 반환하도록 강요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대신 평양성 동문 안쪽에서 커다란 한옥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방문 중에 마펫과 이길함은 서문거리를 걸어 내려가면서 감영 앞을 지날 때 경찰들이 던진 돌에 맞았다.

돌을 던진 자들 중의 한명인 이기풍은 후에 기독교인이 됐고 헌트(Hunt)의 요리사가 됐으며 마침내 한국 장로교회의 초대 7인의 목사가 되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한국 장로교가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로서 제주도로 갔다. 그 때 관찰사들도 사람들에게 외국인들을 쫒아내도록 명령했다. 200명의 폭도들이 모여 들었다.

마펫은 대변인 3명을 들어오게 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변인들은 선교사들이 떠나지 않는 것을 그들이 찬성하면 그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고 말하면서 의주로 가도록 말했다. 그러나 첫날을 보낸 후에 이길함이 이질에 걸려 아프게 되자 의주로 가는 대신 서둘러서 육로로 원산에 있는 게일에게로 갔다.

이길함이 원산에서 회복되고 있을 때 마펫은 조랑말을 급히 타고 서울로 출발하면서 돈(동전)을 싣기 위해 한두 마리의 조랑말을 더 대동했다. 후에 선교사들은 댱샤오이(Tang shoaYee, 중국인)로부터 말굽(은괴)을 살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중국의 대 정치가가 됐으나 그 때는 중국 공사 원세개의 비서로서 한국에 와있었다. 말굽은 현금으로 교환할 수가 없었다.(헤리로즈, 미국 북장로교한국선교회사, 최재건역, PP.145-149. 인용)

 

 

황기식 목사(역사신학전공)

총회역사전문위원

아산동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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