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최초 신자인 김종섭의 어머니였던 이신행은 아들을 통해 평양에서 첫 여성 신자가 되었고, 25년간 장대재교회 여선교회장을 지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아들이 장대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처음 여러 달 동안 여성신자들은 교회에 와서 8×16피트 어두운 방에 앉아 예배를 드렸으며 최초의 남자학교(숭실학교(1897. 10. 10)가 조직 되었고 최초 교회 헌금은 13냥(1¼센트)를 받쳤다. 1894년 5월 평양에 박해 사건이 일어났다. 감리교 홀 선교사의 조사 김창식과 마펫 선교사의 조사 한석진씨가 구입했던 집 주인과 한석진, 김창식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매를 맞았고 평양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이 소식이 서울로 전해 졌을 때 선교사들이 기도 모임을 갖고 있었다. 마펫과 윌리암 J. 맥켄지(J.Wm, J. Mkenize)선교사(호주)가 평양을 떠났고 미국, 영국 공사들은 조선정부의 관원들을 압박하였다. 얼마 안가서 풀려났고 배상금이 지급되어 박해가 잠시 종료되었다. 멕켄지는 소래로 가서 그다음에 죽었다.
1894년 9월15일-17일 청일전쟁이 평양에서 치루어지고 있던 때도 박해는 계속 진행되었고 300명의 조선인들과 양반들이 찾아와서 마펫과 외국 선교사들이 평양을 떠나라고 했다. - 평양 주민들도 피난을 떠났다. 마펫은 평양을 떠날 것을 약속하고 다음에 오겠다고 관원들과 약속하고 평양을 떠나 안악으로 가서 8일을 머물러 있다가 다시 평양으로 왔다.
10월에는 마펫, 리, 홀 선교사 헐버트 선교사와 동행하여 평양에 왔다. 청일전쟁을 치룬 평양은 시체 썩는 냄새로 온 땅을 뒤덮혔다. 홀 박사가 전염되어 진남포에서 – 서울로 이송되었다. 마펫과 데이트(남장로교 선교사)가 문안했다. 홀은 1894년 11월24일 전염병으로 서울에서 죽었다.
1895년 1월 평양으로 돌아온 그들은 다시 한석진씨가 구입하였다가 관원의 압박으로 포기했던 그곳에 여러해 동안 추가로 땅을 구입하여 약8에이커 정도의 땅을 확보하였다. 1895년 평양의 두 선교사 마펫과 이길함 그리고 한석진씨가 순회전도를 하였고, 기독교 문헌을 배포하였고, 사경회를 운영하였고, 매일같이 복음을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파하였다.
1895년 12월에 한 달 간 성경 훈련반을 개설하여 시골지역 지도자들을 집단적으로 가르쳐서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이사벨라 버드비숍(Isabella Bord Bishop)여사가 평양을 방문했던 기간에 이러한 사역들이 일어난 것을 보고 “평양 사역은 내일생 중 가장 인상적이다”라고 비숍이 말하였다.
1896년 5월 이길함 선교사는 그의 부인과 그의 어머니 웹이 평양에 왔을 때 평양선교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1895년 1월 헌터 웰즈(J. Hunter Wells)의사가 평양에 도착 의료 사역이 시작되었고 병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것이 평양 기홀 병원이다.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합동으로 세워서 함께 사역하였다.
황기식 목사
총회역사전문위원
아산동산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