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보이지 않는 두번째 저자
편집자, 보이지 않는 두번째 저자
  • 황재혁 객원기자
  • 승인 2018.05.11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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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순례 14. 후카이 토모아키의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를 걷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일컬어지는 칼 바르트(Karl Barth)는 원래 스위스 자펜빌에서 목회하였던 목사였다. 자펜빌의 목사였던 칼 바르트가 유명해지게 된 시점은 1919년 그가 쓴 '로마서 강해(Der Romerbrief)'가 서구신학계에 큰 울림을 주고 나서부터다. 그러나 처음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가 1천 부 인쇄되었을 때, 이 책은 고작 3백부 정도가 판매되었다. 그리고 그 3백부에서 70부는 칼 바르트 자신이 매입한 것이었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던 신학책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출판사가 7백권의 재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신학책이었다. 이렇게 칼 바르트의 첫 데뷔작은 서구 신학계에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베른의 허름한 창고에서 썩어갈 운명이었다.

그런데 당시 무명의 칼 바르트를 누구보다 먼저 발견하여 그의 학문적 성취를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독일의 출판 편집자 오이겐 디더리히스였다. 그는 바르트의 진보적 사상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여 디더리히스 출판사가 주최하는 작은 회합에 바르트를 초대했고, 바르트를 독일의 사상계로 이끌었다. 디더리히스는 바르트의 짧은 독일 여행을 경제적으로 지원했고, 베른에 있었던 '로마서 강해' 초판의 재고가 독일의 크리스티안 카이저 출판사를 통해 독일에 판매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베른의 출판사 창고에서 썩어가던 '로마서 강해' 초판 7백부는 독일에 오자 마자 금새 매진되었다. 칼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라는 씨를 뿌렸고, 디더리히스가 그것을 자라게 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디더리히스의 고품격 안목이 없었다면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는 그의 데뷔작이자 은퇴작이 되었을 것이다.

 

칼 바르트 기념우표, 위키미디아 갈무리
칼 바르트 기념우표, 위키미디아 갈무리

 

일본의 소장파 신학자 후카이 토모아키는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라는 책을 통해 출판계에서 편집자의 역할이 영국에서 비틀즈를 데뷔시킨 엡스타인(Brian Samuel Epstein)의 역할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후카이 토모아키는 이 책에서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학문적 성취 뒤에는 그의 책이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고 잘 팔릴 수 있도록 노력한 출판 편집자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출판 편집자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저자의 책을 교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편집자는 능동적으로 어떤 저자의 책을 출간할지를 결정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상의 시대를 열어갈지 고민하는 사람이다.

 

19세기 독일에서 편집자와 출판사는 출판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나 지배적 문화에 도전한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사상가에게 (수동적으로) 협력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을 언어화해줄 수 있는 사상가(집필자)를 찾아내어 그들을 통해 발언하고자 했다. 그들은 ‘편집자라는 이름의 사상가’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사상사 연구에서 반드시 찍어야 할 방점은 기존의 ‘저자-독자’라는 단순관계만이 아니며, ‘저자-편집자-독자-라고 하는 심층적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46~47p)

역자 후기에는 '사상으로서의 편집자'가 원래 '기독교사상'에 총 20회에 걸쳐 홍이표 박사의 번역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하였다고 나와 있다. 홍이표 박사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일본어 판에는 없는 사진과 그림을 찾아서 한국어 판에 많이 삽입했다. 결과적으로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사진과 그림으로 독자들에게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이 책의 출간과정에서, 번역자는 단순히 저자의 책을 수동적으로 번역하는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두번째 저자로서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감당했다.

익히 알다시피 한국의 신학은 서구의 신학과 비교하여 신학의 역사가 매우 짧다. 서구의 신학 역사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바람직한 정면교사(正面敎師)가 되기도 하고, 본받으면 안 될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기도 한다. 앞으로 한국의 신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리고 독일 신학의 발전에 출판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싶은 신학도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일상의 독서는 그 자체가 기도이며, 구원의 여정이며, 진리를 향한 순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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