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목회] 최창진 목사(삼은교회, 대전애경교회) “농촌과 나환자촌에서 재미있게 목회했다”
[은퇴목회] 최창진 목사(삼은교회, 대전애경교회) “농촌과 나환자촌에서 재미있게 목회했다”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1.08.2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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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위대성 깨닫고 복음의 전파자가 되겠다고 결단”
“한국전쟁 중 미군의 멸시를 느껴 농촌 계몽 사역 결심”
“농촌교회화, 의료시설, 교육시설, 자립시설 꿈꾸며 사역”
“나환자촌 700명 심방해 전부 교회 나오게 한 것 보람”

은퇴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에게 이미 은퇴하신 목회자의 이야기를 통해 정보를 제공하고 바람직한 은퇴 모습을 제시하려 1부 최창진 목사의 목회 스토리, 2부 후배 목사들에게 바라는 미래목회 이야기로 구성했다. 대담자 이신성 기자

최창진 목사. 이신성 기자
최창진 목사. 이신성 기자

1부 나의 목회 스토리

Q. 신학은 어떻게 하게 됐나? 신학교 때 고민은?

나는 서울 용산에 있는 교통학교(중학교) 4학년 때, 기독학생회 회장을 했다. 그때 남대문 교회 김치선 목사님을 모셔다가 설교를 듣고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로마서 1장 설교였는데,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하셨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인데 첫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둘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다.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복음 전하시고 본래적 인간 회복을 위해 진리를 가르치시고 불행한 사람들 위해서 봉사하셨다. 셋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넷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여 우리에게 영생의 부여자요 보증자가 되셨다. 다섯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서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다. 여섯째, 재림이다. 우리의 있을 곳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영접하여 들이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 이렇게 복음을 간단히 요약해서 설명하셨다. 그때 나는 복음의 위대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도 복음의 전파자가 되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 당시 김치선 목사님은 야간 신학교인 대한신학교 교장을 겸임하고 계셨다. 야간에 청강하고 싶다고 했더니 목사님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다음해 장로회신학대학교(남산) 예과에 입학했다. 신학교 성경시간이 은혜로웠고, 성경원어 공부가 더욱 재미 있었다. 하지만 장신대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

나는 형님이 개척한 천안장로교회 인광식 목사님께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싶은데, 장신대에는 성경 강의가 너무 적다”고 말했다. 인 목사님은 “서울신학교가 성경을 많이 가르친다, 거기로 가라”고 알려주셨다. 그래서 서울신학대학교(당시 경성신학교)에 전학하여 성경 강의를 많이 들었다. 그러던 중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군에 지원해서 나는 미8군 27연대 8야포대에 배속됐다. 미군 3명 한국인 1명 한 조로 야포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그 때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서 인민군들이 후퇴를 계속했다. 우리 부대는 전진을 계속했다. 38선을 넘어갈 때는 기쁨의 환성과 만세를 불렀다. 우리가 평양을 지나서 연변에 주둔하고 있을 때 중공군이 처들어왔다. 후퇴를 계속하여 38선을 넘어올 때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때 신사였던 미군들이 후퇴하면서 개망나니가 됐다. 강간하고 난리였다. 그래서 나는 미군들과 싸우기도 하고 여성들이 모인 집 보초를 서기도 했다. 그 후 그들에게 정이 떨어졌다. 1.4후퇴 후 다시 진군해서 서울을 탈환했다. 그 당시는 토굴에서 사는 농민들이 많았다. 미군들이 그런 사람들을 ‘애니멀’, 짐승이라고 멸시했다. 그때 나는 이 전쟁에서 내가 살아서 돌아가면 농촌 계몽운동부터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 농민의 처참함과 미개함에서 오는 외인들의 멸시를 느꼈기 때문이다.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 하다 졸업을 앞뒀다. 교수들이 “졸업 후 자네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농촌에 가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교수들은 나의 인품이나 설교가 농촌에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도시에 어울린다고 도시 교회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던 차에 꿈을 꿨다. 내가 산꼭대기에 서 있는데 산밑 멀리 밭과 논에서 농민들이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 서서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때 내가 발을 헛디뎌 산 밑으로 떨어졌다. 그 꿈을 꾼 후 농촌에서 나를 부르는구나 깨닫고 농촌 목회를 결단했다.

최창진 목사의 인터뷰 모습. 이신성 기자
최창진 목사의 인터뷰 모습. 이신성 기자

Q. 어느 교회에서 사역을 했나?

졸업 후 경기도 용인군 고삼면 삼은리 삼은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고재실 전도사라는 분이 나를 찾아왔다. “농촌 선교 꿈이 있다는데, 우리 교회 와달라. 숙식은 책임지겠다. 거기 100여 세대 영혼을 구원해주소.” 이렇게 말했다. 처음으로 청빙받은 곳이라서 쉽게 허락하고 갔다. 그때만 해도 농촌 사람들이 무식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얼마나 교만한지, 전도사가 젊다고 어린애 취급했다. 그런 그들이 초등학교 선생은 존경했다. 그때 내가 느꼈다. 농촌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선생들부터 전도해야겠다. 교장과 선생들 만나서 “삼은교회 부임한 전도사”라고 밝히며 인사를 했다. 그때 교장이 특별히 나를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다음 주일 선생 6명을 다 데리고 교회에 나왔다. 그들은 나의 설교에 아멘하며 좋은 반응도 보였다. 그 이후에 동네 사람들이 나를 전도사님이라고 부르고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때 면장과 면 직원까지 전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면장은 안나왔다. 하지만 면 서기 2명은 나왔다. 그들은 여러 동네 이장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나중에 150여명이 모이는 교회가 됐다. 교회를 건축하기로 하고 서울에 와서 건축비를 모금하여, 교회를 짓고 은혜 중에 목회했다.

Q. 목회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은?

첫째, 교회 건축 후 교회 중심의 농촌교회화 운동이었다. 둘째, 향토교육을 해서 애향심 갖게 하고 고향 발전시킬 수 있는 교육기관 설립이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만 나와도 다 도시로 빠졌기 때문이다. 셋째, 당시 아스피린 하나만 먹어도 나을 병인데, 일주일 이상 앓다가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하는 등 참으로 미개하였다. 그래서 의료시설 설립을 꿈꿨다. 다행히 사모가 이대 약대 출신 약사여서 의사는 아니더라도 약을 조제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리고개 때 보리 한 말 꾸어 먹고, 보리타작을 하면 한말 반을 갚는 고리대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고리대금 안쓰고 착취당하지 않게, 정당하게 제값 받도록 농촌 사업을 했다. 개인적으로 전국에서 모범적인 농촌교회라고 생각했는데, 3년이 지난 후 고삼 댐이 건설 되면서 그곳이 수몰 지구가 되어 결국 그곳을 떠났다. 따라서 그곳에 모범적인 농촌을 건설하려든 나의 목표는 물거품이 됐다.

모교에 올라와서 교수들에게 그 얘기를 했다. 학장 이명직 목사님이 “자네 적성에 맞는 곳으로 가는 게 좋겠다”면서 대전여자성서신학원 전임강사로 가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대전성서신학원 전임강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한 몇 년 후 나환자 3명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구걸하러 온 줄로 생각하고 100원을 줬다. 하지만 그들은 돈을 원한 게 아니라고 하면서 교회 후임을 못구해서 그러니 목사님이 와서 설교만 해주시라고 요청했다. 흔쾌히 승낙했다.

당시 대전시 용전동에는 나환자들 700명이 모여 사는 마을(애경원)이 있었다. 그 마을에 나환자 중에 신자 30명 정도가 흙벽돌로 교회를 짓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가보니 살 썩는 냄새 심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신학교 강사직을 사임하고 나환자 교회에서 목회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나환자들이 거절했다. 몇 달 있다가 가면 오히려 신자들이 시험에 든다는 이유였다. 나는 “목숨을 바쳐서 여기서 목회하려고 한다. 3개월만 시험해봐라”고 했다. 대전 신학교 전임강사로 근무하면서 3개월 동안 그들 나환자 교회에서 설교 하였다. 그 후 그들이 나를 신뢰하고 나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나는 “하나님이 이 교회에 나를 보내신 것은 특별한 뜻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농촌 교회의 경험을 살려서, 몇 가지를 정했다. 첫째, 교회를 중심으로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해야겠다. 둘째, 이들이 제일 고통당하는 질병치유를 위해 의료시설을 만들어야겠다. 세째, 목욕탕 지어서 그들이 몸이 정결하게 해야겠다. 넷째, 공부를 할 기회가 없어서 지독하게 무식했는데 초등학교를 세워서 교육해야겠다. 다섯째, 깡통차고 얻어먹지 않고 자립하여 살도록 도와야겠다.

그 때 나는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야겠다고 생각해서 나환자들의 가정을 심방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자신들을 찾아주는 사람 없는데 넥타이 맨 신사 목사가 심방하니 모두 놀라고 감동했다. 그래서 하루에 열 가정을 심방하면 열 가정 모두 교회에 나왔다. 결국 나환자촌의 700명을 다 방문해서 700명이 모두 모이는 교회가 됐다. 나중에 선교부에서 보조를 받아 600평 대지에 103평의 교회 예배당을 건축했다. 모두가 기쁘게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이상하게 몇 명씩 교회에 안나왔다. 찾아가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일정했다. “목사님 구걸을 하다보면 거의가 다 어려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 성큼 아니 줍니다. 떼를 쓰고 발광을 해야 돈을 주니 그렇게 못된 짓을 해서 살다보니 교회에 나가면 마음이 괴로워서 못나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애초에 목적한 대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자립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임야 8만평을 사서 그들에게 1천평씩 나눠줬다. 그들이 다 그 임야를 개간했다. 그들에게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땅 만으로 먹고 살기 어려우니 양계사업을 하라고 세대당 병아리 100마리와 3개월분 사료를 나누어 주었다. 3개월쯤 지나면 수놈은 팔아서 다음 치 사료를 사라고도 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열심히 일했다. 결국 그들은 자립해서 살아가게 됐다.

다음으로 그들을 위해서 의료 사업을 시작 했다. 도청을 찾아가서 의무실 만들어달라고 했다. “이들이 나와서 돌아다니면 외관도 안좋으니 보는 사람들도 그렇고 이들도 모두 불편하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도청에서 나환자촌 사람들을 위해 30평의 의무실을 지어주고 약을 대줬다. 의료시설이 생겨서 어지간한 병은 거기서 치료했다.

당시 부모는 환자지만, 환자 아닌 자녀(미감아)들이 학교를 못 갔다. 일반 학부모들이 미감아들의 등교를 거부하는 데모를 해서다. 나는 충청남도 교육국장(지금의 교육감)을 찾아가서 나병 때문에 배우지 못해 무식해서 문제가 생기니, 그들을 교육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결국 공동묘지 빈터에 교실 2개의 교사를 지어줬다. 그런데 면허 있는 교사를 요구했다. 그 때 마침 후배 사모가 교사 면허가 있었다. 정식으로 임명받아 월급을 받게 됐다. 결국 분교가 됐다. 그 때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환자 사업이 마무리된 것이다. 대전애경교회(나환자 교회)였는데 나중에 너무 특수 교회 같은 인상을 주니 그 이름을 바꾸자고 해서 대전동산교회로 했다.

10년이란 세월 흘렀다. 그 때 나는 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만 뒤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은 미국 유학을 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교수들이 됐는데, 나만 형편없다고 느꼈다. 이렇게 일만 하다가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서울신학교 강사로 다니면서 이제라도 공부하고 유학가서 교수가 되자고 결심했다. 그때 서울신학대학 생활관장으로 취임해서 서울로 올라 왔다. 교수들과 성경 연구 그룹 만들어 열심히 공부했다. 결국 세상적으로 낙오되었지만 보람있게 살았다. 지금은 93세, 은퇴하고 20년이 넘었다.(다음 호에 계속)

인터뷰하는 최창진 목사. 이신성 기자
인터뷰하는 최창진 목사. 이신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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