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목회] 중부명성교회 송석홍 원로목사 “교회 재정의 65% 이상을 선교와 구제, 교육에 사용한다”
[은퇴목회] 중부명성교회 송석홍 원로목사 “교회 재정의 65% 이상을 선교와 구제, 교육에 사용한다”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1.09.17 14: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버지의 반대로 집나와 신앙생활을 이어가”
“전도사 때 청주상당교회 청빙받아 7년 목회”
“미국에서 목회하다 귀국해 중부명성교회 개척”

은퇴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에게 이미 은퇴하신 목회자의 이야기를 통해 정보를 제공하고 바람직한 은퇴 모습을 제시하려 1부 송석홍 목사의 목회 스토리, 2부 후배 목사들에게 바라는 미래목회 이야기로 구성했다. 대담자 박진석 상임이사, 정리 이신성 기자

송석홍 목사. 이신성 기자
송석홍 목사. 이신성 기자

1부 나의 목회 스토리

Q. 은퇴하기 전까지의 목회 스토리를 자세히 알고 싶다. 신학은 어떻게 하게 됐나?

시골 가덕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 누나들이 성탄절에 교회에 가자고 해서 갔다. 그 교회를 나가게 된 동기는 주일학교 선생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고 환대를 해줬기 때문이다. 따뜻하게 맞이해 줘서 감동이 됐다. 그렇게 교회를 2년 동안 다녔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유교 학자라서 교회 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몰래 다녔다. 청주로 중학교 유학왔을 때 작은 아버지 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때 서남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 때까지 신앙생활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아버지가 작은 아버지에게 교회 다닌다는 연락을 받고 화가 잔뜩 나서 나를 내쫓았다. 그때 성경, 찬송을 불태우고 도리깨질을 했다. 아버지는 시골로 돌아갔고, 작은 아버지가 나가라고 하며 혼냈다. 하지만 청주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신앙생활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때부터는 어떤 힘으로도 나를 못눌렀다. 지금 생각해도 믿음이 참 좋았다. 제사 1,2차 때는 배 아프다는 꾀병으로 넘어갔는데, 3차 때는 교회 때문에 안드린다고 들통났다. 일 년에 12번 제사를 드린 집에서 이제는 제사 안드린다고 선포했다.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지게 작대기로 치면서 나가라, 우리 집안에서는 받아줄 수 없다고 해서 집에서 나왔다. 청주로 나왔지만 작은 아버지 하숙집에 더 이상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가방들고 간 곳이 서남교회 반지하였다. 거기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새벽에는 일어나서 새벽기도회를 하게 됐다. 서남교회 박종렬 목사님의 아들 박형순 목사가 청주고 내 동기다. 그때 사모님이 아침마다 불러 밥을 먹였다. 그 외에도 교인들이 성령이 역사하는대로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라고 했다. 그렇게 얻어먹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때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나중에 목회자의 길을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고민하다가 청주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글을 쓰고 문학적인 소양을 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예배당에서 안자도 됐던 것이 CCC회관에서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전CCC 이은수 간사님이 보살펴 주시고, 아르바이트 해서(수학 과외) 수입나오는 것으로 살았다. 밀가루 한 포대를 사서 아침에 수제비를 먹고 학교 가고 점심은 굶고 저녁에 또 수제비를 먹었다. 그때 몸이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학교 다니면서 선생도 하고 봉사하고 CCC회장도 하고 기도회를 인도하고 전도했다. 그러다 군대를 가게 됐다. ROTC를 대학교 3학교 때 신청했다. 훈련을 시작할 때 신체검사를 하는데 몸무게가 미달이었다. 그래서 하사관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종원 장로님에게 신체검사 몸무게 미달로 장교가 안될 것 같다고 알렸더니, 소금물을 잔뜩 먹고 가라고 했다. 그걸 먹고 가면 몇kg이 복구된다는 거다. 소금물을 엄청 먹고 가서 몸무게 기준선에 도달했다. 입대 허락이 나서 장교로 생활했다. 소대장으로 지내면서 소대원들에게 비전을 가지고 전도했다. 그렇게 2년 3개월 동안 소대원들을 모아놓고 예배 시작했다. CCC 순모임을 해봐서 익숙했다. 그때 대대마다 소원수리 사단 측정이 있었다. 우리 대대에서 우리 소대가 샘플로 찍혔다. 우리 소대가 예배드리며 구타도 없고, 보급품도 안빼돌리고 다 주니까 소대원들이 너무 좋다고 소원수리를 했다. 결국 우리 대대장이 승진하게 됐다. 그랬더니 대대장이 대대 전체가 예배를 드리라고 해서, 750명 대대원들에게 설교하고 찬송을 가르쳤다. 김준곤 목사님을 모시고 성탄절에 예배도 드렸다. ‘15사단 1대대는 예배드린다’는 소식이 전방 1군 사령관, 한신 사령관에게 전달됐다. 한신 사령관은 “정신훈련에 예배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해서 결국 신자화 운동이 전군으로 확산됐다. 그리고 군세례운동에 불이 붙었다. 제대 후 신학교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청주시에서 CCC 간사로 3년간 일했다. 당시 여의도에서 집회할 때 충북사람들을 동원했다. 그때 만났던 조 목사님이 간사님은 신학을 꼭 해야 한다고 예언처럼 말했다. 결국 75년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 입학 후 답십리교회(경신교회 전신)에서 교육전도사로 봉사했다. 나는 이성희 목사와 동기인데 영락교회에서 유년부 전도사로 2년간 사역했다. 후에 영락교회 영등포 교구심방 전임전도사로 1년 사역하고 있을 때, 청주상당교회 성도들이 서울로 찾아와서 나를 청빙했다. 청주상당교회는 서남교회의 한 구역이 떨어져 나와 개척한 교회였다. 내가 서남교회 출신이라서 청빙한 것이다.

박진석 상임이사와 송석홍 목사의 인터뷰 모습. 이신성 기자
박진석 상임이사와 송석홍 목사의 인터뷰 모습. 이신성 기자

Q. 신학교 재학 시절 어떤 고민을 했고, 어느 교회에서 사역을 했나?

신학교 1학년 때 경신교회 전도사로 들어갔는데, 집사들 중에 산기도 그룹이 있었다. 그들이 초청해서 산기도 모임 일원이 됐다. 서울 도봉산 바위많은 지역으로 매달 산기도 가서 밤새도록 기도했다. 하나님이 앞으로의 인생길 책임져 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낮시간에도 학교 종탑에 올라가서 기도했다. 기도를 통해서 신앙심이 더욱 커진 것 같다. 그러면서 꿈을 갖게 됐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성공이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신학교 때 고민이 없었던 것은 서남교회가 1호 목사로 보내면서 장학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때 장학금을 대줬다. 그 뿐만 아니라 영락교회 전도사가 되니까 영락교회 여전도회가 학교 경비를 대줬다. 두 교회를 지원받는데, 학비와 생활비가 다 해결됐다.

영락교회에서 청주상당교회로 내려오게 됐다. 내려 오는 과정 중에 특이한 것은 우리 집사람이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를 검정고시 합격 후 입학했다. 그런데 1년을 하고, 이 사람은 3년을 더 했으면 좋겠는데, 청주로 내려와야 해서 장학금과 학교를 포기했다. 그때 눈물을 많이 흘렸다. 나중에 장석연 교수(청주대 국문과)가 영문과에서 2학년 학생을 뽑는다고 알려주어 사모가 원서를 내고 합격해 2학년부터 다니고 결국 대학을 졸업하게 됐다.

상당교회 와서 개척할 때 나는 덜 익은 목사였고 목회 정신이 뚜렷하지 않았다. 흉내내는 목회였다. 상당교회에서의 7년 동안의 목회를 돌아보면 그렇다. 교인 숫자는 부흥했는데, 내가 반성한 것은 미국에 이민가 뒤를 돌아보니 제일 못한 것이 선교였다. 선교에 돈을 쓰지 못했다. 선교에 대한 아이디어와 열정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것에만 성공했던 것이다. 목회의 혼이 되는,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세계로 확장하는 일을 못했기 때문에 이민 가서 회개를 많이 했다.

결국 선교하는 쪽으로 내 인생, 목회를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미국 뉴욕에서 사역했던 교회는 그 당시 7-80명 모이는 교회였다. 사실 CCC 간사였던 이은수 목사님이 LA에 가서 미국CCC 간사로 일하다가, 나와서 Reformed 교단 목회자가 됐다. 그분이 청주 상당교회 성장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듣고 나를 미국에 불러들인 거다. 이민이 쉽게 된 것은 Reformed 교단 총무가 한국에 왔을 때, ‘이 사람은 우리 교회 꼭 필요한 사람이니 대사관에 영주권 나오게 해서 취업이민 나오게 해달라’고 요청해서 빨리 나왔다. 그래서 미국에 가게 됐는데, 상당교회가 그때 5-600명 나오던 교회였다. 그래서 미국에 가지 말라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 집사람이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 개척해서 이만큼 성장했는데, 하나님께 다 드리고 미국에 가서 작은 자리, 낮은 자리에서 또 개척하자. 당신이 노회 임원되고 부흥회 다니다보니 기도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어 형식적인 목회자로 바라보게 됐다. 개척을 다시 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자”고 해서 미국으로 이민간 것이었다.

9년 동안 미국에서 목회할 때 이민 온 지 3-4년 지나서부터 한국 교회 여러 곳에서 청빙하겠다고 연락을 했다. 하나님이 멀고 먼 미국에 보낸 이유는 이민온 사람들 보살피는 것이지, 한국에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다 거절했다. 9년이 되던 해에 나에게 영적인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너, 이렇게 미국에서 애 공부시키고 가정과 교회가 평안하고 환경이 좋다고 안주하는데 한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성령의 음성으로 알고 사모에게 이야기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들어가려는 9년째는 오라는 교회가 하나도 없었다. 다 막혔다. 하나님의 음성만 뚜렷했다. 사표 낼 때 교회 당회가 오라는 데가 어디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하니 죽어도 못보낸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 뜻을 어길 수 없다고 하고 후임자를 세우고 왔다.

한국에 들어와서 가덕에 3식구가 들어갔다. 형님은 그때 예수님을 안믿었지만 형수는 교회를 다녔다. 형님이 나를 좋게 안봤다. “너 한국에 들어온 거 보니 실패한 것 아니냐!”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 개척에 마음이 쏠려 있었다. 그래서 개척할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서울, 청주, 대전, 이리, 영주 등 일곱 교회에서 와 달라고 동시에 연락이 왔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개척하라고 음성이 들려 개척한다”는 고집으로 중부명성교회를 개척했다. 기도하는 중에 돕는 교회가 없었다. 상당교회, 서남교회, 서원경교회가 서로 합쳐서 나를 돕자고 했는데, 의견이 잘 모아지지 않았다. 그때 동기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가 3억 정도 지원했다. 그 돈으로 땅을 사놓고 서남교회 기도원에서 예배드리다 예배당을 지었다. 1997년에 5억 정도의 빚이 있었다. 은행 이자를 갚아나가는 중에 IMF가 터졌다. 이자가 20-30%였다. 이자 감당이 도저히 안되니, 교인들이 교회 재정의 65% 사용한다는 교회 7대 실천지침 네 번째 부분을 문제 삼았다. 이자가 너무 많이 나가니, 1년간 선교비로 나가는 걸 줄이자고 했다. 교회 존폐가 걸려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작정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채워주실 거다”라고 설득했다. 그러면서 선교를 계속 이어서 했다. 그랬더니 선교에 열이 더 붙었다. 선교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어, 풀타임 선교사 3가정, 몇십만원 지원 총 70명, 우리 노회 안의 25개 교회를 지원하고 있다. 그 외 장애인들, 군인들, 선교기관이 수십개 된다. 120-30개 교회와 단체를 매달 지원한다. 개척하는 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시작했다. 그 중의 하나가 장애인을 돕기 위해서 복지재단을 만들고 한몫을 지원한 것이다. 복지재단을 맡아서 5-6년 동안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지금은 자립했다. 복지재단, 교회선교, 국내 개척교회 지원 3파트로 해서 들어온 수입의 65%를 계속 내보내고 있다. 후임 목회자도 4년째 계속 하고 있다. 35%로 살림살이 하는데, 빌딩 있고 교육비, 인건비가 늘어나니까 35%로 어렵다. 절약을 안하면 못한다. 선교를 하는 동안 우리 교회가 충족하게 먹고 불을 피우고, 냉방장치 돌리면 못한다. 그래서 조금 춥게, 조금 덥게 운동을 벌였다. 자가용을 사야 할 때였는데, 늦추라고 하고 교회 봉고차로 다녔다. 나중에는 조그마한 경차를 타고 다녔다.

중부명성교회 앞에서. 이신성 기자
중부명성교회 앞에서. 이신성 기자

 

가스펠투데이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Array ( [0] => Array ( [0] => band [1] => 네이버밴드 [2] => checked [3] => checked ) [1] => Array ( [0] => talk [1] => 카카오톡 [2] => checked [3] => checked ) [2] => Array ( [0] => facebook [1] => 페이스북 [2] => checked [3] => checked ) [3] => Array ( [0] => story [1] => 카카오스토리 [2] => checked [3] => checked ) [4] => Array ( [0] => twitter [1] => 트위터 [2] => checked [3] => ) [5] => Array ( [0] => google [1] => 구글+ [2] => checked [3] => ) [6] => Array ( [0] => blog [1] => 네이버블로그 [2] => checked [3] => ) [7] => Array ( [0] => pholar [1] => 네이버폴라 [2] => checked [3] => ) [8] => Array ( [0] => pinterest [1] => 핀터레스트 [2] => checked [3] => ) [9] => Array ( [0] => http [1] => URL복사 [2] => checked [3] => )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298-4 삼우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42-7447
  • 팩스 : 02-743-744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상현
  • 대표 이메일 : gospeltoday@daum.net
  • 명칭 : 가스펠투데이
  • 제호 : 가스펠투데이
  • 등록번호 : 서울 아 04929
  • 등록일 : 2018-1-11
  • 발행일 : 2018-2-5
  • 발행인 : 채영남
  • 편집인 : 박진석
  • 편집국장 : 류명
  • 가스펠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가스펠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peltoday@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