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목회] 거룩한빛광성교회 정성진 은퇴목사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균형”
[은퇴목회] 거룩한빛광성교회 정성진 은퇴목사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균형”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1.04.07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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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무지, 질병, 범죄가 모두 함께 있다
김창인 목사를 정면교사와 반면교사로 삼아
교회 25곳 분립 개척 도와

은퇴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에게 이미 은퇴하신 목회자의 이야기를 통해 정보를 제공하고 바람직한 은퇴 모습을 제시하려 1부 정성진 목사의 목회 스토리, 2부 후배 목사들에게 바라는 미래목회와 은퇴 준비, 그리고 목회유산 상속으로 구성했다. 대담자 박진석 상임이사, 정리 이신성 기자, 사진 최상현 기자

정성진 목사가 인터뷰하는 모습. 최상현 기자
정성진 목사가 인터뷰하는 모습. 최상현 기자

1부 목회 스토리

Q. 신학은 어떻게 하게 됐나? 동기나 계기가 있다면?

나는 모태신앙인이다. 우리 어머님은 안산도일교회, 장석교회 개척 멤버였다. 특별히 장위중앙교회 개척할 때에 집을 팔고 교회 사찰을 하셨다. 그때가 중3이었다. 교회가 나의 삶이었다. 집에서도 신학하라고 했고, 군에 입대해서 군종을 했다. 성자와 같은 군목 김홍태 목사를 섬겼다. 이필섭, 이준, 김진영 모두 그 분의 제자다. 그분의 영향력은 군선교에 컸다. 군목 중령으로 제대하셨는데, 그분도 신학을 권했다. 제대 후 등록금 가지고 찾아오셨다. 그래도 신학을 할 마음은 없었다. 신민당에 입당하러 가는 날, YH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 인하여 신민당 입당은 무산되고, 상심해서 심장병에 걸렸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신호가 됐다. 그래서 1981년에 서울장신대에 입학하게 됐다.

Q. 어디서 어떻게 사역했는지?

고영근 목사를 기독교방송국에서 하던 목요집회 때 만났다. 꽂혔다. 고영근 목사를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은 몇 명 없는데, 나는 스스로 고영근 목사 제자라고 말한다. 목민선교회 청년들이 다 떨어지고 청년 두 명만 남았을 때까지 나는 목민선교회 회원이었. 지금도 고영근 목사 제자라고 당당히 얘기한다. 그분의 정신은 마르크스, 레닌을 공부한 운동권이 아니었다. 아모스의 영성으로 유신정권 반대 설교를 하다가 체포됐다. 철저한 반공주의자, 깨끗한 목회자였으며 감옥에 가장 많이 갔다.

1983년 12월 서울장신대 졸업식 때 민중신학을 했으니 민중과 함께 살겠다고 결심했다. 덕적도 섬 목회지에 지원했다가 총각이라고 딱지 맞았다. 두 번째 음성군 금왕읍 금왕교회(폐광촌 교회)에 자리가 났다. 결혼할 여자 있냐고 물어서 있다고 한 후 신학교 여자 동기에게 담임전도사로 가는데 결혼해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결혼해서 광산촌 교회에 갔다. 부임할 때 5명 있었던 교회에 140명을 전도했다. 무당도 전도했다.

그때 광산이 재개발됐다. 당시 영풍문고로 알려진 영풍광업은 은광으로 유명했다. 금왕광산은 깊이가 960미터까지 지하로 들어갔다. 재개발하려면 지하 갱도에 차 있는 물을 고성능 모터로 물을 6개월 퍼내야 했다. 그렇게 되면 노천에 있는 모든 물들이 지하 갱도로 빨려들어가서 논농사, 밭농사도 못하고 우물 물도 마른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 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광산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180호 마을에 상수도가 들어오게 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광산이 재개발됐다. 교회 사택을 잘 지어놓고 살아보지도 못했다. 아내가 간염과 유산으로 교회를 눈물로 작별하고 떠나게 됐다. 후임 모시고 올라왔다.

광산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교훈을 하나 얻었다. 가난이 절대 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가난, 무지, 질병, 범죄가 모두 함께 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고민했다. 목사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일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목회에 발을 담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식 코스를 밟자고 결심했다. 신학교 친구들은 이미 목사가 됐다. 방송통신대 학사과정을 졸업하고, 시험을 쳤으나 영어가 부족해서 신대원에 떨어졌다. 재수해서 1987년에 83기로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갔다. 그때 내 나이가 34살이었다. 학교에서 학내 사태에 앞장서서 징계를 받고 계속 투쟁하여 학우회장이 되고 학교 정상화를 이뤘다.

그 당시 경실련이 시작되어 인기를 얻을 때다. 경실련 청년분과로 가기로 했다. 교회 소속이 있어야 해서, 교회 전임으로 사역하려 하니 빨갱이로 낙인이 찍혀 받아주는 교회가 없었다. 2월 말에 봉천제일교회의 여전도사가 병이 나서 빈자리에 들어갔다. 그후 광성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했다. 김창인 목사를 만나 많은 것을 배웠다. 그분의 설교, 열정, 의리는 정면 교사로, 그 외에는 반면 교사로 삼았다. 내가 혈기도 9단인데 김창인 목사는 혈기도 10단이었다. 사실 목회의 모든 것을 김창인 목사에게 배웠다. 광성교회에 있던 5년 동안 한 주도 은혜받지 않은 주일이 없었다. 신대원 졸업논문으로 강해설교연구방법론을 썼는데 실제 모델을 만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광성교회 부임해 보니 내 논문의 모델이 김창인 목사였다. 김창인 목사가 개척자금을 10억원을 줬는데,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5년 동안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는 점이다. 김창인 목사가 개척장소에까지 직접 와서 함께 계약했다. 나를 특별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도 은혜를 잊지 않고 영적 아버지로 섬기고 있다.

Q. 거룩한빛광성교회 개척과 목회철학을 이야기한다면?

거룩한빛광성교회를 97년 1월 9일에 창립했다. 민중신학을 했기 때문에 창조적 소수, 남은 자 사상, 그루터기 사상이 머리에 박혀 있었고, 많이 모이는 것, 큰 교회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전도행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등록했다.

내가 일산에 개척했을 때 일산 신도시 입주 4년째였고 280번째 교회였다. 시간이 지나서 어려운 교회를 샀다. 7억원의 빚을 지고 17억자리 건물을 샀다. 그해에 IMF가 왔다. 그러나 이자 한 번 연체하지 않고 순항했다. 왜냐하면 첫 해에 아이들까지 1천명이 등록했고, 600명이 출석했기 때문이다. 지하에 350석이 있었는데, 2450명까지 출석했다. 8년 반만에 4천 평짜리 교회를 새로 짓고, 한 해에 4천명이나 등록했다. 많은 빚을 졌지만 한번도 연체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몰려온 이유는 깨끗한 교회, 바른 교회, 상식이 통하는 교회라는 소문을 듣고 온 것이다. 개척할 때 세운 3대목표, 즉 섬기는 교회, 인재를 양성하는 교회, 상식이 통하는 교회라는 말에 사람들이 공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8년 반 동안 목사들이 화장실을 청소하고 내가 새벽에 교회를 열고, 저녁 11시에 세콤하고 퇴근했다. 새건물을 짓고도 관리인을 두지 않고 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안됐다. 지금은 청소원이 많다. 교인들이 청소해야 하는데 용역회사에 맡긴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척 때부터 교회 예산의 절반은 반드시 외부에 지원한다고 결정했다. 45억원을 외부로 지원했다. 교회 분립개척 25곳을 했다. 교회에서 담임목사 월 사례비는 보너스 없이 450만원이었다. 은퇴할 때 전별금 때문에 의견이 분분했다. 당회에서 수십 억원을 주기로 의논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 문제로 고민하며 기도했다. 돈을 많이 받으면 노후는 편안할 수 있지만 이제까지의 개혁목회가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퇴직금을 1억원으로 결정했다. 그 1억원을 운정교회에 건축헌금으로 드렸다. 교회에서 현재 크로스로드 사무실을 임대해서 10년간 사용할 수 있게 해줬다. 지금 민통선 안의 해마루수도원을 세우고 통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기도원을 위해 개인적으로 장로들과 권사 한 명이 헌금했다. 나는 서울장신에서 졸업논문을 베네딕트 수도원에 대해 썼고 신대원 회장을 할 당시 은성수도원의 엄두섭 목사를 모시고 사경회를 했다. 이것이 연결되어 장신대 영성코스가 생기게 된 것이다. 평소 수도원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이 민통선 안의 해마루수도원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

해마루 수도원의 대치산방 현판을 가리키고 있는 정성진 목사. 이신성 기자
해마루 수도원의 대치산방 현판을 가리키고 있는 정성진 목사. 이신성 기자

Q. 교인들이 목사님에 대해서 어떤 목회자로 기억되기를 원하나?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 목회자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내가 중점을 두고 목회를 했던 것은 셀의 두 날개가 아닌, 개혁주의의 두 날개였다. 셀은 대그룹의 예배와 소그룹의 두 날개지만 나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두 날개를 생각했다. 그래서 문화강좌도 하고 사회적협동조합이나 학교, 복지관 관련 사업도 펴친 것이다.

Q. 목회 하면서 후회되는 일은?

아예 처음부터 300명 되면 분립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65세에 은퇴하기로 했는데, 3년쯤 남았을 때 초대형 교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300명씩 60개 교회를 분립하려 생각했는데, 목회자 수급이 안됐다. 사관학교 식으로 목회자 교육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서남북 네 개로 분립하려 했는데, 장소를 구할 수 없었다. 적당한 장소가 나오면 주변 교회가 반대해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4500명을 분립한 것이 거룩한빛운정교회다.

Q. 목회를 한 문장으로 하면 뭐라고 할까?

내 목회는 하나님의 은혜다. 내가 계획하고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큰 목회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지나온 인생을 생각해보니 내가 사람을 모으는 체질이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목적 중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철저히 어느 단체든 그 단체의 목적을 위해서 산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 내가 목회에 조금이라도 성공했다면 교회가 목적이었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 희생을 조금 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려운 교회를 합병시키고 어려운 목사님을 은퇴시키고 후임을 구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을 미국에서는 인터림 목회(Interim ministry)라 하는데, ‘다음 담임 목사를 구할 때까지 사이를 이어주는 목회자 역할’을 뜻한다. 내가 지금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나를 찾는 것은 내가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헌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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