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데겔 설교]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고별 기도”
[이달의 데겔 설교]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고별 기도”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1.05.12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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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16일 부활절 일곱째 주일
요한복음 17장 6-19절

신학적 관점

인간은 서로 간에, 그리고 우리가 닮은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와 사귐을 가져야 함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점에서 반복적으로 실패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려면 신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예수가 오늘 본문에서 이런 도움을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가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기 위해 드린 대제사장의 기도에 속한다. 예수는 기도의 대상이며 모든 것의 근원(the Source)인 하나님과 당신 간의 긴밀한 관계성과(relationship)과 유사성(resemblance)을 강조한다. (10절- 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11절-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이 성서 구절에 근거해서 초대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나중에는) 성령의 정체성(능력, 중요성, 본성 등)에 대해 확실한 주장을 했다. 예수는 한 위(person)이면서 두 본성(nature)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신성과 인성),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다리로 연결할 수 있다. 그는 인간과도, 하나님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을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내적 삶 (the inner Trinitarian life of God)은 우리가 서로 간에 그리고 신과 맺을 수 있는 모든 관계의 원형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이 유비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 계시, 섭리, 성화에 대해 중요한 신학적 교훈을 준다.

첫째로, 예수는 모든 지식을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그것을 제자들에게 전달해준다. 그의 신성을 통해, 그는 삼위일체의 내적인 삶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의도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갖는다. 8절의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그 사실을 잘 표현한다. 이것은 기독교 계시론의 초석이다. 이를 통해 예수의 신적인 권위가 입증되고, 그에 따라 예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 공인된다. 따라서 이 예수의 기도는 죽음을 직면한 시점에서 드려졌지만, 부활 이후를 이미 예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활 자체에서처럼, 이 기도를 통해 예수는 하나님의 대리인, 대변자, 사랑하는 아들임을 공적으로 인정받는다.

둘째로, 예수는 하나님께 제자들을 위한 섭리적 돌봄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종종 섭리(providence)를 하나님의 선지식 혹은 예지와만 관련시킨다.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어원적으로 볼 때 라틴어 pro(for, fore, before)와 videre(to see)가 결합된 이 단어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자비, 사랑의 돌봄이 다 포함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하게 채우시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기도에서 예수는 당신이 받았던 것과 동일한 사랑과 돌봄을 제자들에게도 달라고 요청한다.

셋째 주제는 성화, 혹은 거룩이다. 이 단어는 보통 우리의 의무를 넘어서, 특별한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잘못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단어의 중요한 의미는 특히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된다는 뜻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거룩하여 져서 (세상과 구별되어서) 이 세상에 복된 소식을 가져오는 자가 되기를 기도했다.

주석적 관점

요17장에서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께 선교의 사명을 맡겨야 할 사람들에 관한 청원을 하고 있다.

예수-아버지와 하나됨

요한복음은 예언자들보다 예수가 보내신 분과 훨씬 더 가깝게 하나 되신다고 말한다. 말씀이 단순히 전해질 뿐만 아니라 육신이 되어(1:14), 예수는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온전히 나타내신다. 17:6에서 예수는 “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라고 선언하는데, 이는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을 잘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예수가 세상을 떠나려고 준비하면서 제자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데(11), 그가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보호해왔다고(12) 말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호하였습니다”라는 예수의 선언은 하나님과의 하나됨에 대한 다른 표시이다. 제자들을 지키는데 있어서 아버지와 하나됨과 같이 행동했다. 17:6-19의 중보기도와 같은 장르는 예수의 지키는 역할에 적절한 것이다. 그의 지키는 사역은 18:8-9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체포시까지도 계속된다. 히브리서는 아버지께로 승천하신 후에도 그리스도의 중보 역할은 계속된다고 선언한다(히 7:25; 9:24).

제자들의 예수와 아버지와 하나됨

예수와 제자들과의 친밀감은 본문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그들이 예수와 나누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나누는지 지적함으로써 구체화 된다. 예수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6,14)을 가진다. 예수와 제자들은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았다(18). 예수와 같이 그들 또한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14, 16). 예수가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았듯이(15:18, 24을 보라) 제자들도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14). 그리고 예수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이듯이(11; 23 참조)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세상에서의 그의 시간은 끝이 나지만, 제자들은 세상 속에 있어야 한다. 예수는 “거룩한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17).

거룩한 아버지의 주권

복음서의 다른 데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궁극적인 권한은 예수가 “거룩한 아버지”로 말한 분에게 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주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준다. 예수는 기도에서 제자들을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6,9)것으로 말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도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8). 제자들은 예수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참으로 알았고(8),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7). 예수는 두 번이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름으로”(11,12)라고 말한다. 그리고 18절에서 예수는 우리가 이미 본 대로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한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께 돌아간다. 예수의 사역과 요한복음의 신중심적 성격은 틀림없다.

목회적 관점

요한복음 17장은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부른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기도를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왔을 때,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기도의 모델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고별 기도”이기도 하다. 이 기도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모델로 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예수는 이러한 신성한 관계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앞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의 증인으로 파송될 미래의 사도들인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인도하시기를 요청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이다(17:11).

요한은 예수가 아버지에 의해 세상의 갈등과 혼란의 한 복판으로 보내진 것 같이, 제자들이 부름 받아, 구별되었고, 세상으로 파송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진리에 의해 거룩하게 되었다(17:17~19). 세상에서 믿고 증언한다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 속에서,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창조적 긴장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하는 공동체는 민중의 삶 속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증인으로서의 활동을 통해, 불의한 구조와 깨진 관계의 근본적인 원인을 공격하면서, 불의와 소외로 희생된 사람들과 연대하며 중보하는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복음의 진리에 대해 설교할 때 숙고해야 할 몇 가지 도전적인 윤리적 질문이 있다. 첫째, 복음이 “진리로 사는 삶”을 강조할 때(3:21 NIV), 그것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진리를 행하도록 인도하는 윤리적인 요구를 수용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믿음의 사람들이 진리를 증명하는 행동과 증언(15:26)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디트리히 본회퍼)이 필요하다. 셋째, 연대하는 제자도와 진정한 화해의 촉진이 요청된다. 오늘날, 어느 때보다, 복음에 있어서 진리의 중심성을 회복하고 진리 안에서 복음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리를 추구하면 부패를 고발하고, 죄를 공개하며, 개인과 공동체와 시스템의 실체에서 우상숭배의 가면을 벗기는 것 같은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오늘의 복잡하고 풍부한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거나 묵상할 때, 몇 가지 질문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떻게 교회가 예수의 근본적인 요구에 좀 더 신실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방 정부와 주 정부와 연방 정부의 기관들의 부패에 맞설 수 있을까? 어떻게 교회와 교회 기관들의 부패에 관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도록 훈련할 수 있을까? 어떻게 교회가 교회 자신의 구조와 공적인 영역에서 좀 더 책임적으로 될 수 있을까?

설교적 관점

세상이 주는 끊임없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휴식을 취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성경만큼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종교적 신앙도 이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망을 촉진시킬 수 있다. 선하고 거룩한 무엇인가를 어렴풋하게라도 경험한 인간의 영혼은 우리를 기다리는 화려한 휴양지를 원하기 보다는 세상 속에서의 소란함과 갈등을 벗어난 공동체나 삶의 방식을 갈망할 지 모른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런 인간의 모습을 반영한 이야기로 점철되어있는데 수도원, 수녀회, 개혁운동, 공동생활, 유토피아, 수양관, 기도와 경건을 위한 소그룹등이 그 사례이다. 이 모든 것들이 각자 독특한 형태와 정서를 발전시켜 왔지만, 이 모든 것들은 공통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 보다 온전하게 신앙적이고 거룩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들이었다.

이번 주일 성서정과는 이런 내향적 신앙공동체의 바램에 문제를 제기하는 설교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의 박해가 없는 곳에서 사는 것은 대안적 삶이 될 수 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다” 즉 세상의 요구는 제자들의 본질적인 정체성, 신앙 그리고 가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세상의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아직 세상에 있으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13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또 “그들 안에서” 같은 표현으로 "그들 가운데서" 기쁨을 발견할 바로 그 세상에서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그들은 공동체가 될 수 있고 그렇다 그들은 그 공동체 안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세상을 버려서는 안된다.

요한공동체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걱정을 하면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통해 핵심적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15-16절).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의 가치와 박해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나가는 대안적 공동체 모델을 그리스도는 제시한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세상 속에 머물러야만 한다. 그들은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야 한다.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서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거룩함은 이탈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 속에 깊이 들어감으로 얻어져야 한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17절).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되려는 그들의 바램을 인정하면서도 그 방향을 “지금 여기”에 그리고 세상 속에 드러난 진실된 하나님 말씀을 향하도록 바꾸신다.

세상에 남아있으라는 이 요청은 그리스도의 기도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18절)에서 보다 강하게 나타난다. “세상으로 보냈습니다”라고 강조하는 대목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과 정확히 반대이다. 너무나 분명한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교회란 세상 곧 왜곡된 권력과 억압이 있는 곳으로부터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교회공동체에게 각인시킨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있으나 그 세상에 지배당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세상으로 우리를 보내시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어 세상의 필요와 상처를 온전히 끌어안은 채로 활기차고 신앙적으로 우리를 살아가도록 한다.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 2021’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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