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데겔 설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달의 데겔 설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1.06.23 13: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1년 6월 27일 성령강림절후 다섯 번째 주일
마가복음 5장 21-43절

신학적 관점

이야기 속의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는 오늘 본문은 깊은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치유에 관한 것이고, 둘 다 예수가 생명과 율법의 영역에서 통치권을 행사함을 명확히 드러낸다. 시작과 끝 부분은 야이로와 그의 딸의 이야기를 다룬다. 야이로는 회당장이었고, 유대 사회에서 권위있는 인물로 여겨졌었다. 우리는 그의 권위가 공동체 안에서의 지도력, 엄격한 율법의 준수, 그리고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분간할 정도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 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예수께 나오자마자 자신이 소유한 모든 권위가 예수의 권위에 종속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그의 고백은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23절)라는 요청 속에 암묵적으로 담겨 있다.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이야기는 갑자기 등장한 혈루병을 앓던 여인 때문에 예기치 않게 중단된다. 이 여인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특별한 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여인이 계속 피를 흘리고 있었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부정하다는 것을, 이 여인이 의사를 찾아다니느라 재산을 다 탕진했다는 것은 그녀가 권력에서 소외되었고 사회적으로 절대 약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여인은 야이로(특권층, 권력층, 사회적 주류, 남성)와 모든 면에서 대조된다.

그러나 이 여인이 야이로와 공유하는 중요한 공통점은 예수의 권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천한 신분이 드러난다면 생명과 치유의 권한을 갖고 있는 예수에게 다가가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은밀하게 예수께 다가가 그의 옷에 손을 대었다. 이 대목에서 문학적 구조가 중요한 신학적 진리를 드러낸다. 첫째, 예수의 능력은 이미 행사되어서 그 여인이 병고침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예수는 그 여인과 관계를 수립하기 원하신다. 예수의 권위의 완전한 실현은 간절하게 예수를 만지기 원했던 믿음과 예수가 관계를 맺을 때 이루어진다. 둘째, 예수의 왕국에서는 소외된 자와 약자의 요구가 존경과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의 요구보다 먼저 받아들여진다.

이 두 이야기의 중심축은 야이로와 이 여인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유일한 것, 즉 예수의 왕적인 권위에 대한 깊은 믿음이다. 이 여인에게 하는 말을 통해, 예수는 그녀의 믿음이 그녀가 고침을 받은 힘의 근원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제 야이로가 다시 이야기에 등장한다. 집에 가까이 갈 때 그의 딸이 이미 죽었다는 전갈이 온다. 여기서도 왕적 권위의 근원이 되는 예수의 절대적인 순종과 주변 사람들의 불신앙(그들은 비웃었다, 40절)이 대조된다. 오늘 본문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기독론적 주제가 여러 가지 있다. 예수는 생명과 죽음, 건강과 질병, 정결과 부정 등에 대해 신적인 권위를 행사하시는 분이다. 믿음을 갖고 오는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인격적 관계를 통해 행사된다.

주석적 관점

치유 안의 치유

막 5:21-43은 마가가 한 이야기 속에 비슷한 다른 이야기를 삽입하여 서로 주제가 보충되도록 하는 본문 중의 하나이다(3:19-35;6:14-29;11:15-33 참조). 오늘 본문에서는 부자 남자가 그의 딸을 예수가 고쳐 주길 원할 때, 절망적인 여인의 치유를 위해 기다려야만 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회당장의 요청(21-24)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께 다가왔다. 그러한 지도자들은 크게 존경받고 대체로 부자들이다. 야이로는 예수를 치유자로 여겼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존경을 표했다.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그의 딸이 죽어감으로 인해 방랑하는 설교자에게 흔치 않은 경의를 표했다. 그는 예수에게 간곡히 청하기를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는 예수가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고 살려줄 수 있다고 믿었다.

중단된 여정 - 혈루증 앓는 여인(25-29)

갑자기 비공개적인 형식으로 여인이 나타난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즉 생리현상에 문제가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예수의 치유의 능력에 대해 마술적으로 이해하여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터인데!”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나중에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다고 말한다.

예수의 반응(30-34)

예수도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셨다. 예수는 청중들에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었다. 대체로 통찰력이 부족한 제자들은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인은 많은 무리들에게 자신의 결사적이고 개인적인 치유의 추구를 밝혔다. 그녀도 회당장처럼 예수께 엎드려 경의를 표하고, 그녀가 만짐으로써 예수를 의식적으로 불결하게 한(레 15:19-33 참조) 것에 대해 사죄를 구했다. 예수는 불결하게 된 것보다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에 대해 더 관심을 두었다(막 1:41). 그러기에 예수는 이 익명의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며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한다.

다시 야이로의 딸에게로(35-36)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들은 회당장이 집으로 돌아가 슬퍼해야 할 뿐 더이상 선생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여인에게 했던 것처럼 회당장에게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해라”고 말했다.

치유하러 가는 길(37-39)

이 여정을 시작했을 때 무리들이 따랐다(24). 예수는 가장 믿는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만 데리고 갔다. 그들이 야이로의 집에 이르렀을 때 고용된 애도자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셨다. 그들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희망이 없는 죽음과 비교하여 이 아이는 부활의 희망을 가졌기에 그녀는 단지 “자고 있는” 것이다.

은밀한 치유(40-43)

예수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아람어로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거라)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다녔다”고 재차 강조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치유능력의 동시적 본질을 보여준다.

목회적 관점

오늘 본문에서 하나로 묶여 있는 한 쌍의 치유 이야기는 구분되지만 공통적인 목회적 관심을 보여준다. 모든 치유 기적처럼 이 이야기들은 공통적으로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내가 낫게 될까?” 치유에 대한 질문은 인류 모두가 가진 것이다. 우리들 거의 대부분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 육체적, 영적, 심리적인 혹은 관계에 있어서 회복되어야 하는 통증을 가진 질병을 가지고 있다. 목사와 교인은 어떤 사람은 낫고 어떤 사람은 낫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회당장의 딸은 살아났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죽는다. 여러 해 동안 질병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면서 절망에 빠졌던 여인은 회복되었지만, 똑같이 절망에 빠진 남자들과 여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목사는 여기에 대하여 정직해야만 한다.

이 치유 이야기들 각각은 개별적으로 독특한 목회적 전망을 제공한다. 회당장의 딸의 치유 이야기는 회중들 가운데 많은 부모와 조부모가 그들의 자녀나 손자손녀들에게 가진 깊은 사랑과 그에 따른 두려움을 떠오르게 한다. 죽은 아이가 생명을 회복한 이야기는 모든 부모가 자녀들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사실 자녀나 손자손녀를 잃은 적이 있는 부모나 조부모라면 이 치유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또 하나의 치유 이야기는 소녀의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는데,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깊은 목회적 관심을 일으킨다. 이 이야기는 질병이라는 현실 뿐 아니라, 고립과 사회적 소외라는 현실이 숨겨져 있다. 예수가 살던 시대에는 이 여인과 같은 상태에 있는 여인들은 사회에서 버림받았을 것이다. 그녀의 상태는 그녀를 제의적으로 부정하게 만들었고, 외톨이가 되어 그녀의 가족과 마을에서 고립된 채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에서 그녀는 군중을 뚫고 길을 열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남성이며 잘 알려진 종교인인 예수를 만진다. 예수는 그녀가 불법적으로 침입한 것에 대해 훈계하는 대신, 그녀의 믿음을 칭찬한다. 정당한 분노 대신 예수는 그녀를 평화롭게 가게 한다. 이 성경 이야기에 대한 목회적 결론은, 육체적 치유보다 수용, 친밀함, 그리고 접촉이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고 평화를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으로 형성되고 만들어 진다. 관계 혹은 “접촉”은 우리를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한다.

설교적 관점

야이로의 딸이 거의 죽은 채로 누워있는 곳을 향하여 예수께서 가고 있을 때, 그를 따라 가던 “큰 무리”가운데에서 또 다른 절망적 상황에 놓여있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25절)가 달려 나온다. 설교자는 때로는 두 이야기 중 하나에 집중하는 것보다 여기서 병행적으로 나타나는 두 이야기의 공통요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본문의 내용을 심화시킬 수 있다. 두 환자 모두 여성이고 정결하지 않은데 한 명은 죽음으로 인해, 또 다른 한 명은 혈루증으로 인해서이다. 둘 다 유대전통에서 12이라는 숫자의 중요성을 보여준다(12년의 혈루증과 12살의 소녀). 그리고 둘 다 “딸”(야이로의 딸인 소녀와 예수가 딸이라고 부른 혈루증 여성)로 여겨지고 있다.

이 두 이야기는 설교자에게 재미있고도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하나의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과 일에 대한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의 경우에는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지나치기 쉬운 사람들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비록 아버지는 중요한 사람이었을지라도 소녀와 그리고 병든 여인은 그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자신의 사역을 이루기 위해 사회적, 종교적 장벽을 넘어서서 늘 그랬던 것처럼 행동한다. 두 여성 모두 힘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예수께서는 긍휼함으로 그들의 형편을 살피고 어느 누구보다도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본문이 제기하는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은 치유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혈루증 여인은 그녀가 손을 내밀어 예수의 옷을 만졌을 때, 그리고 죽은 소녀는 예수께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치유된다. 두 이야기 모두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모든 설교자가 알고 있듯이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설교할 때마다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가장 절실하게 요청하는 기도라도 늘 우리가 원하는 답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이야기에서 설교자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이런 기적이 일어났는가 혹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고 “기적들이 일어나지 않을 때” 어떻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혈루증 여인과 죽어가는 어린 소녀를 둔 절망적인 부모들처럼 고통가운데 믿음을 지닌 모든 사람들은 기적적인 치유의 가능성을 위해 기도하고 또 대체로 믿는다. 하지만 극적인 몸의 치유라는 형태로 응답받는 일이 매우 드물다. 여기에서 우리는 덜 분명하고 덜 극적인 차원에서 치유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기대에 어긋나는 상황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평화를 누리는 것 그리고 절망적인 시간에서도 하나님의 지속적인 현존을 깨닫는 것으로 치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연관된 질문은 치유에 있어서 믿음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혈루증 여인은 자신의 치유를 위해 수많은 사회적 관습을 넘어 허락도 받지 않고 예수의 옷을 만지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여기에 야이로가 있는데 그의 믿음은 그를 예수의 발 앞에 엎드러지게 만든다. 이 사례들은 우리 자신의 믿음에 대해 성찰하도록 도전을 주고 있다. 즉 우리가 치유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신뢰하는지에 대해 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신뢰를 가지도록 하고 어느 정도로 하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 2021’에서 발췌

 

가스펠투데이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Array ( [0] => Array ( [0] => band [1] => 네이버밴드 [2] => checked [3] => checked ) [1] => Array ( [0] => talk [1] => 카카오톡 [2] => checked [3] => checked ) [2] => Array ( [0] => facebook [1] => 페이스북 [2] => checked [3] => checked ) [3] => Array ( [0] => story [1] => 카카오스토리 [2] => checked [3] => checked ) [4] => Array ( [0] => twitter [1] => 트위터 [2] => checked [3] => ) [5] => Array ( [0] => google [1] => 구글+ [2] => checked [3] => ) [6] => Array ( [0] => blog [1] => 네이버블로그 [2] => checked [3] => ) [7] => Array ( [0] => pholar [1] => 네이버폴라 [2] => checked [3] => ) [8] => Array ( [0] => pinterest [1] => 핀터레스트 [2] => checked [3] => ) [9] => Array ( [0] => http [1] => URL복사 [2] => checked [3] => )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298-4 삼우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42-7447
  • 팩스 : 02-743-744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상현
  • 대표 이메일 : gospeltoday@daum.net
  • 명칭 : 가스펠투데이
  • 제호 : 가스펠투데이
  • 등록번호 : 서울 아 04929
  • 등록일 : 2018-1-11
  • 발행일 : 2018-2-5
  • 발행인 : 채영남
  • 편집인 : 박진석
  • 편집국장 : 류명
  • 가스펠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가스펠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peltoday@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