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데겔 설교]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이달의 데겔 설교]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1.03.24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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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8일 종려주일
마가복음 11장 1-11절

 

신학적 관점

예수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라 계속 가는 중에 생긴 이 사건은 극적이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 소개되어서 예수에 관한 전승 중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 마가 고유의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특징을 파악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예수는 왜 환호를 받으며 적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로 결정했나? 예수가 잔인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알고도 입성한 것은 그의 대적자들에 대한 도전이었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 이외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결단에 의한 것이었나?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어떤 일이 생기든 상관없이, 예루살렘 입성은 장차 생길 일에 대한 징표였나?

한 주일 안에, 환호는 멸시와 조롱으로 바뀐다. 종려주일은 돌이킬 수 없이 성금요일로 변한다. 추앙받던 예수는 멸시의 대상이 된다.

예수의 고난을 오늘의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고난과 연결하지 않고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가 당한 멸시와, 멸시 속에서도 빛나는 진정한 존엄의 의미도, 오늘날 조롱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지 않고 깨달을 수 없다.

예수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했는데, 이는 왕이 평화적인 의도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예수는 평화 속에서 입성했다는 것이다.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다. 예수는 그를 파괴하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도리어 그들이 예수를 파괴하는 데 세력을 모으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금요일의 어두움이 종려주일의 광명을 변형시킨다. 즉 이 두 가지가 연결될 때만 우리는 존엄성은 온전함(integrity, 통합성, 통일성)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잘못된 심판과 의혹과, 공포와 폭력, 심지어 죽음의 위력은 객관적인 모습 그대로 먼저 파악된 후에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주석적 관점

“승리의 입성”(개선행진)이란 용어는 마가복음에 중요한 장면 전환을 가져오고 설화의 중심점이 되는 이 본문의 중요성을 잡아내지 못할 것이다.

나귀의 중요성을 무엇인가? 마을에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은(11:2) 놀랍다. 말 대신 나귀를 이용한 것은 마가의 독자들에게 영광과 전쟁보다(슥 9:9) 평범함과 겸손함을 보여주지만, 하지만 나귀가 일반적으로 타는 짐승인 것처럼 이는 우스꽝스럽거나 비천한 것은 아니다. 한 번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라는 것은 의전용으로 딱 맞는 것이다( 민19:2; 신21:3 삼상 6:7에서 아직 멍에를 매어 본 일이 없는 짐승 참조). 예수는 그 짐승이 어디 있는지, 그의 제자들이 가져오려 할 때 무슨 질문을 받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등, 그가 예상하고 있는 일어날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모든 사건은 그의 목적이 예수와 완전히 일치를 이루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있다. 예수가 나귀를 타셨을 때, 많은 사람이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는데, 이는 주요한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행진하는 순례자에게 하는 일반적 환영방식이었다(요한복음에서만 종려나무 가지로 특정하고 있다). 군중들은 소리 지르며 순례자들에게 구원의 주님으로 부르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시 118:26 이하 참조). 마가는 새로운 전체 시의 축하를 묘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수는 걸어온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탔고, 군중들은 생나무만 깔아놓은 것이 아니라 겉옷 또한 길에다 폈다(왕에 대한 환영방식, 왕하 9:13 참고). 마가의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거나 과감하게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정체성을 애매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외쳤다. 그들이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는 외침은 예수를 다윗 왕조의 계승자로 환영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군중들이 시가지를 행진하며 환호하고 경의를 표하며 공개적으로 메시야 왕이 되어 달라고 청원한 것은 분명히 깃발을 들고 위기를 촉발하는 것이지만, 예수는 다윗의 왕국을 재건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 이상한 “승리의 입성”의 반글라이맥스적인 대단원은 독자들에게 다음 날 무슨 일이 일어나지 기다리며 보라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랑에 대한 추상적이거나 감상적인 관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지탱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와 연관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종려 가지 사이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이상하게도 우리가 피상적인 사랑이라는 망상 쪽으로 향하지 않기 위해 싸우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예수에게는 피상적인 사랑이란 없다. 우리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공포를 견디는 사랑을 받는다. 이런 사랑은 종종 우리가 실제라고 착각하는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려주일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오해하는지 보여준다. 우리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확장되어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실제 행동들로 측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나귀에 타고 종려나무 사이로 행진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다. 이런 행위는 위대한 사랑이 필요한 것이었다. 위대한 기독교 신비가 시몬느 베이유는 이렇게 썼다. “불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 줄 사람 말고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관심을 줄 수 있는 능력은 매우 드물고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다. 그것은 기적이다.”

예수가 초라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 완전한 관심을 가지신다는 기적이다. 예수 안에서 세상은 자기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되고, 예수 안에서 이런 깨달음으로 우리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하나님과 씨름하던 존재에서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피조물로 변모한다.

설교적 관점

이번 주일은 설교자들에게 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에게 초점을 맞추려는 설교자들에게는 도전이 되는 주일이다.

교회에 있어서 고난주일 예전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입성을 약화시키거나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 중대한 일이고 설교적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 설교자는 때로 종려주일 예전을 위한 본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비록 그 본문이 분명히 보다 큰 고난이야기라는 상황에서 선포되어야 하면서도 말이다.

예루살렘 입성에 초점을 두는 것은 중요한데 그것은 이 이야기가 예수사역에 있어 가장 거칠고 또 격앙된 정치적 행동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찬양이 지닌 정치적 특성뿐만 아니라 예수 사역에 담긴 정치적 갈등을 기억나게 한다. 이 사건은 단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귀여운 어린이들을 보며 어른들이 웃는 그저 예배를 시작하는 행진정도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마가복음 11장 1-11절에서 예수는 세심하게 계획된 풍자적인 “군대행진”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감으로써 정치권력을 비웃는다. 예수는 제자들로 하여금 "기존의 권력"을 섬기지 말고 자신을 따르라고 초대한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행사의 정신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중요한 정치적 의미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오늘 본문에서 단지 몇 구절만이 (8절-11a절)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본문 중 대부분은 (1절-7절) 이 사건을 위해 예수가 했던 계획에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 구절들은 예수가 이 모든 일을 미리 계획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새끼 나귀를 준비했고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보고 있는 군중들과 더불어 사용할 신호도 가르쳐주었다. 예수는 정확하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다. 그는 한편의 “길거리 공연”을 세심하게 연출하고 있는 중이다. 이 길거리 공연에서 예수는 왕을 패러디하는 풍자극을 연출한다. 그는 감람산에서 시작하는데 (1절), 그 산은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해방을 위한 마지막 전투가 벌어질 장소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예수는 자신의 “마지막 행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것을 내보낼 때 좀 이상한 상황이 된다. 그가 선택한 것은 전쟁무기가 아니라 새끼 나귀 (마가복음에서는 완전히 자라지도 않은 당나귀)였다. 예수는 무장하지 않은 채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때, 그는 승리한 민족영웅을 위한 열병식 같은 이 행진을 받아들인다.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군중들은 승리한 군사지도자가 기대할만한 모든 행동을 한다. 제국의 입장에서 반역으로 여겨지는 행동을 하며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와 옷을 존경의 표시로 예수 앞에 펼친다. 그들은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만수무강 하소서”라고 찬양하며 외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환호하는 군중 속으로 새끼 나귀를 타고 간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줄곧 제국의 권력과 통치가 어떤 것인지를 군중들에게 보여준다. 예수의 길거리 공연은 우스꽝스런 정치적인 풍자이다. 그의 “승리의 입성”에서 예수는 “기존질서”와 그 가식적인 화려함과 지배를 풍자하고 대안적인 지배방식을 제시한다. 새끼 나귀를 탄 예수의 발은 땅을 질질 끌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게 그런 지배를 거부하는 분으로 나아온다. 그는 힘센 전사의 모습이 아니라 연약하고 폭력에 의존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로 다가온다. 예수는 여기서 광대의 역할을 취하여 우스꽝스럽고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즉 다른 형태의 “다스림”으로 다가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 것을 요청한다.

예루살렘입성은 우스꽝스럽고 극적이며 또 정치적이다. 이 이야기를 신중하게 편성하여 현실풍자를 하는 길거리 공연으로 재현하는 일은, 예수의 행동이 체제전복적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의 길거리 공연은 풍자가 “기존질서”를 폭로하고 저항하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설교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풍자와 축제형식을 통하여 복음과 기독교 예배가 정치적으로 체제전복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설교자가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거행하는 종려주일 예배는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헌신과 제자도를 요청한다.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 2021'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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