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데겔 설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달의 데겔 설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1.01.22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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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24일 주현절 후 셋째 주일
마가복음 1장 14-20절

 

신학적 관점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시작을 소개하는 본문에서 예수의 선포와 제자를 부르심의 상관관계가 중요하다. 이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예수의 선포는 복된 소식인데 그 내용은 하나님의 승리의 선포이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기적적 치유, 귀신축출, 가르침을 통해 해방과 회복과 화해가 벌써 일어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예수의 선포와 사역을 통해 시작된 이 운동은 인자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모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약속과 연결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말하자마자 그 실현을 개시한다. 나중에 예수가 바람과 파도와 귀신에 대해 행사할 궁극적인 종교적 권위는 이미 제자의 부름 사건 속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제자들은 예수의 절대적인 부름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고 복종할 뿐이다. 예수가 어떤 기적을 행하거나 자세한 가르침을 주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에게 끌려 택함을 받았다. 칼 바르트가 말했듯이 그들은 예수가 택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제자로 선택된 것이다. 예수가 그들에게 지금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순간, 그들은 운명적으로 예수에 의해 확고하게 낚였다. 예수는 최고의 어부였고, 그들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였다. 첫 제자가 된 두 형제의 순종적인 반응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을 본다. 수세기에 걸쳐 신학자들은 메시지와 부름의 관련성에 대해 깊은 성찰을 했다. 예수의 행동은 그 자체가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요 약속의 성취를 뜻했다. 하나님의 통치를 어떤 형태로 상상했던 상관없이 확실한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을 하나님께서 충족시키시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은 한결같은 공통 요소이다. 칼뱅은 본문을 그리스도인으로의 부름의 모범적 사례로 널리 인식시켰다. 우리가 어떤 문화나 시대에 살던지 본문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본다. 시시때때로 예수를 곡해하고 실망하게 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반복되는 배신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이다. 그들처럼, 죄인인 우리는,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예수의 제자로 변화되고 있다. 그들처럼 우리는 개인의 구원을 만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적인 사명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그들처럼 우리도 부모를 떠나고, 개인의 이익과 안전과 사회적 유대를 희생하면서 부름에 응했다. 그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많이 미숙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변화되어 예수의 선포를 위한 귀한 일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주석적 관점

예수는 광야에서 40일간을 보낸 뒤(1:12-13) 갈릴리로 돌아와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의 사명을 시작했다. 예수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자신이 지배하는 시간이 마침내 왔다고 선포한다. 카이로스가 다가왔기에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예수는 그의 사역의 시작을 선포하는데 신약에서 66번이나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라는 비유를 사용했다. 마태는 이를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라고 했는데 32번이나 사용했다. 구약에서는 “야훼의 왕국”(kingdom of YHWH)이란 표현이 단 두 번 사용되지만(대상28:5, 대하13:8), ‘하나님의 나라’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비록 신구약중간기 문서 여러 곳에서도 하나님을 왕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오직 한 번 나타나고 있다(솔로몬의 시편 17:3). 예수가 이 은유를 사용한 것은 그의 사명과 헤롯왕조의 목적을 대조하고자 함이었다. 大헤롯은 파르티아 제국의 로마식민지인 팔레스틴 침입 때에 그가 로마를 지지했기에 로마원로원이 왕위에 앉혀 주었다. 대헤롯은 로마의 후견자들과 유다 백성들에게 공히 그가 왕으로서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했는데 왜냐하면 성전 건축이 왕의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유다백성들에게 유대전통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헤브론에 믿음의 조상들과 그의 아내들의 무덤위에 멋있는 건물을 짓기도 했다. 헤롯은 후견인이었던 아우구스투스황제에게 인상을 심어주고 기념하기 위해 가이사랴와 세바스테 같은 도시를 건설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기념비적 건축물이나 큰 도시들에 의해 강화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인데, 회개는 그들의 삶의 전적인 방향전환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바로 처음부터 예수와 함께 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독자들에게 회개와 믿음이 응답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예수의 초대에 대한 그들의 응답은 즉각적이고 완전했다.

설교자들은 교회의 복음 선포에 대한 응답을 살피도록 요청할 수 있다. 그들의 응답이 네 제자들처럼 즉각적이고 완전한가? 오늘날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대에 니느웨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응답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목회적 관점

예수는 “때가 찼다”라는 선포로 공생애를 시작하였다. “찼다”는 말은 뭔가가 이루어지고 끝났고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고 때가 찼다고 선포하는 주현절과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기도하는 대림절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유지해야 할까? 두 주제 모두 진실이다. 그렇다. “지금이 그 때이다.” 그러나 또한 “그 날이 다가온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는 지금이면서 동시에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곤경에 빠진 사람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그들을 위로한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올바르게 하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만물은 이미 올바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간을 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은 이미 무너졌다. 공간과 시간에 얽매인 우리가 영원하고 매이지 않으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언어가 모호함과 역설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하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장면은 즉각적인 결정의 사례이다.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즉시 제자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1절)의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비틀거리고 오해하고 되돌아가야 한다.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데는 한 순간과 일생이 걸린다. 어떤 교회들은 예수를 향해 결단하는 순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지속적으로 헌신하도록 양육하는 데 실패한다. 결단이란 충성하고 봉사하며 때로는 희생하면서 사는 것이다. 어떤 교회들은 양육을 너무 잘해서 “요람 속의 기독교인들”조차도 때로는 충성하고 봉사하며 때로는 희생하기로 결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기독교는 언제나 지금과 오랫동안, 순간과 평생 양쪽 다이다.

예수가 물고기를 잡고 사람을 낚는 비유를 소개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 낚시란 그물을 던지고 끌어 올리는 행동 이상의 것을 내포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사냥꾼과 사냥감 사이의 거칠고 험한 상황에서, 그리고 그 드라마가 펼쳐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손상되고 닳은 그물을 손질하고 도구들을 수리하는 준비를 해야 한다. 낚시를 좋아한다고 해도, 항상 낚시만 할 수는 없다. 오늘 본문은 불길한 언급으로 시작된다. 요한이 체포되었다. 마가의 청중들에게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새로운 전망에 가담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데에는 믿음만이 아니라 용기 또한 필요하다.

설교적 관점

오늘의 본문은 7절뿐이지만 여러 가지 설교를 가능하게 해준다. 마가의 서술방식은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집중적이다. 그래서 설교는 짧은 구절 또는 한 단어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설교자 자신이나 교인들은 “요한이 잡힌 뒤에” “때가 찼다” “회개하고 믿으라” “그들이 아버지를 남겨두고” 또는 심지어 “즉시” 같은 단편적 구절을 가지고 한 이전의 설교를 떠올릴 수 있다. 설교자는 2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는 본문을 가지고, 예수의 복음선포나 (14-15절),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심(16-20절) 가운데 하나를 주제로 선택하여 설교할 수 있다. 아니면 이 2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만들어 은혜가 풍성한 설교를 구성할 수도 있다. 이 단어들에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마가복음이 언급하는 “그 때”에 주목하게 된다. 마가는 시작하면서 마치 알람을 맞추어 둔 것처럼 지속적으로 “그 때”를 선포하고 거기에 맞는 어떤 응답을 요청한다. 때를 나타나는 구절들이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데 그것은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되는 때(2-3절), 새로운 엘리야의 때(4-8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고 하늘로부터 한 소리가 날 때(9-11), 또 성령과 사탄이 함께 세상에서 일하고 있는 때(12-13절) 등이다.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 14절에서 요한이 잡혔을 때로 이어지며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일들의 중심에 있던 그 분이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15절)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그 때를 선포하지 않는다. 그는 말씀과 육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신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응답을 요청한다. 그 때가 찼기 때문에 예수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을” (15절) 요청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를 따를 것을” 그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을 요청한다 (17절). 이러한 요청은 늘 있는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시간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응답들이다. 회개하고, 믿고, 따르고, 사람을 낚는 일은 구원이라는 음악의 박자에 맞추어 그 때를 이루기 위한 행동이다.

설교자는 교인들과 더불어 이 일을 이루는 시간적 순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순서는 많은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개인적 경건에서 행하는 것과 반대방향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구원의 시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회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때가 이미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상하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어부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 하면 그 나라가 이미 와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가 예수를 만나게 될 희망으로 그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이미 우리에게 왔고 우리를 불렀기 때문이다. 마가가 그 때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제자도의 산물이 아니라 전제조건이다. ‘그 때’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개인적 경건은 다른 형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인들과 설교자는 제자도를 하나는 과제로, 다른 하나는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봐도 좋다. 만일 제자도가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좁은 의미의 교회성장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제자들에게 “따라오면 어부가 되게 해 줄 것이다”라고 했던 예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제자들의 이야기는 어부들의 삶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 2021’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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