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데겔 설교]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달의 데겔 설교]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0.12.23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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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7일 성탄절 후 첫째 주일
누가복음 2장 22-40절

신학적 관점

오늘과 같이 편안한 시대에 부모와 아기는 대개 선물을 받는 자이지 바치는 자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아이의 출생을 기념하고 그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 엄청나게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희생 제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화(purification)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아이를 정화할 필요는 없었다. 마리아를 정화할 필요도 없었다. 칼 바르트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의 죄를 씻은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씻은 것이라는 탁월한 해석을 내렸다.

시므온은 이 아기를 평생 기다렸다. 이제 그는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이 기다림과 평화로운 죽음은 불안 속에서 죽음을 외면하고 두려워하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신학적 교훈을 준다. 우리는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바삐 움직이고, 시간을 일정으로 꽉 채우고, 모든 것을 통제하고, 다음 목표를 향해 빨리 움직인다. 우리는 잠잠함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놓친다.

시므온은 수 일 또는 수개월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기다렸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 특별한 열망과 성취의 의미를 이해했다. “끊임없이 추구하고, 더 높이 도달하려는 노력을 절대로 멈추지 말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더 큰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이제 안나에 주목해보자. 그는 비교적 단순한 삶을 살았던 80대 노파이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 방향, 즉 하나님의 구원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요란하고 거창한 팡파르와 함께 오지 않았다. 하나님의 축복은 단지 한 가지일 뿐이며, 그것이 오는 데 50년이 결렸다. 이 아이는 시므온과 안나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위기를 가져오고 결단을 촉구한다. 이 한 사람에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 결과는 절대 가볍지 않다. 어떤 통계가 말하듯 우리가 예수와 함께 걷는다면 우리의 삶이 17% 더 좋아지고, 행복도는 14% 더 높아지며, 부부생활도 16% 더 건강해진다는 식은 아니다. 모두 얻거나 모두 잃거나, 쓰러지거나 일어서거나 사이의 양자택일 상황이다.

순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서는 일어서는 것이 먼저이고 떨어지는 것이 나중이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하면 넘어진 자가 일어선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 안나는 ‘낮밤’이 아니라 ‘밤낮’으로 금식했다. 우리는 떨어지고 그 가장 낮은 지점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넘어질지 모르지만, 우리가 일어나면, ‘넘어졌다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은 이 순결하고 선하고 사랑으로 가득 찬 아들을 해쳤다. 마리아는 시므온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마리아는 자신이 물려준 피가 아들 예수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떨어짐. 그리고 일어남.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일어난 것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 중 예수의 어머니보다 더 기뻐했던 사람이 있었겠는가?

주석적 관점

이 사건들을 전하는 누가의 목적이 분명히 드러난다. 마리아와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토라에 따라 그들은 8일 만에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행하고 가브리엘의 지시에 따라 아기에게 이름을 짓는다(1:31). 부모로서 이들은 천사의 명령과 율법에 따른다. 토라가 첫 부분에는 ‘모세의 법’(2:22)으로 언급되었다가 ‘하나님의 법’(2:23, 24)으로 불려지는 것에 주목하라. 그들은 천사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토라에도 순종한다. 이것은 모두 이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동(레 12:1-8; 출13:2, 12, 15)이다.

얼핏 보기에 성전은 예언자들을 만나기에는 이상한 장소처럼 보인다. 전통적으로 예언자들과 성전은 서로 반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 속에는 나단, 엘리야, 엘리사 그리고 예레미야 같이, 권력의 중심부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들이 있었다. 비슷한 유형의 예언자로서, 시므온과 안나는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새로운 질서의 시작으로 아이의 탄생을 바라본다.

시므온은 ‘이제는’이라는 영감이 깃든 분명한 말로 아이를 통한 구원의 현재성과 근접성을 강조한다. 그의 선포는 간단한 세 구절(2:29, 30-31, 32)로 되어 있다. 놀라운 점은 이 예언들이 이스라엘의 영광과 관련된 이방 나라들을 향한 계시와 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취는 나라들의 속량(구원)과 연결되어 있다.

한나의 헬라식 이름은 안나이다.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해 삼상 1-2장의 한나와 엘가나 그리고 사무엘의 탄생의 이야기를 넌지시 사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두 가지 사건(시므온과 안나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두 가지 모두 전환적 사건이다. 시므온이 마리아와 요셉 대신 하나님에게 말한다면, 한나는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말한다. 말씀이 시므온보다 안나가 보다 더 광범위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또한 그녀만의 독특한 역할이 있음을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놀라운 말로 끝난다. 가족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만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된다는 새로운 기대와 확신 가운데 삶을 살아간다.

목회적 관점

목회적 돌봄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례 연구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성탄절 후 첫째 주일의 성서정과 본문은 비교적 짧지만, 목회와 설교를 위해 숙고할 몇 가지 ‘사례들’을 제공한다. 첫 번째 사례는 22~24절에 있다. 마리아와 요셉은 모세 율법이 요구하는 정결 예식을 위해 예수님을 성전에 데려 온다. 목회적 관점으로 보자면, 이 간략한 묘사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또한 이 사례는 특별한 예식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부모로서의 새로운 책임을 일깨워주고 격려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두 번째 사례는 시므온의 경우다. 그는 이 날을 기다렸으며, 하나님의 섭리로 성전에서 그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이 연로한 성자는 이 특별한 순간을 기뻐하면서, 더 넓은 현실을 소개한다. 예수의 부모는 시므온이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그들은 좋은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시므온은 고통스러운 소식도 전할만큼 정직하고 사려 깊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한 고통스러운 전망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부모에게는 부모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자녀 앞에 놓여 있을 지도 모르는 어려움을 대비하게 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마리아와 요셉이 부모가 된 초기에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세 번째 사례는 역시 성전에서 만난 안나의 경우다. 그녀는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예언자였다. 시므온처럼 안나는 우리가 희망과 두려움으로 의지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찾든 아니든 우리에게 다가올 구름떼 같은 증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두 사람은 요셉과 마리아의 신실함과 결합하여 본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사례인 예수 자신의 사례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부모의 헌신으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꿈과 희망에 둘러싸여 그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또한 모든 어린이들의 사례가 되어야 한다. 모든 어린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감싸고 있으며, 신실한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후원자들과 하나님의 더 넓은 선한 창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린이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그들을 격려해야 한다.

 

설교적 관점

성서에 나타난 시대적 상황

예수 탄생 전에 마리아와 요셉이 감당해야 했던 영적, 정신적 부담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아직 준비가 되기 전에 인간의 몸으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이제 막 부모가 된 이 두 사람은 갓난아이를 얻은 후 첫 40일간을 함께한다. 그들은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베들레헴으로 또 다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했는데 이 기간에 그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쳐있었다.

가난과 축복이 함께 있는 이중성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한 젊은 부부였으므로 인구조사를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여인숙에는 방이 없었고 아기 아빠는 여관에 머물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그는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가난한 사람으로서 아이 어머니가 짐승들 곁에서 출산하는 것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는 예물 곧 한 쌍의 비둘기를 드렸다. 계속해서 사람들은 그들의 품 안에 있는 아기가 지닌 복에 관해 그들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매일매일 근근이 살아가기에 바빴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풍족하게 살지 못하면서 축복을 받았다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들은 축복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품 안에 새로운 삶과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안고 있다. 우리시대에 가난하지만 신앙을 지키며 사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현실은 여전히 고통스럽다.

말로만 축복하지 않는 공동체 만들기

본문은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로’ 정해진 시간에 성전에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는 먼 길을 온 젊은 부부가 주님의 율법을 따라서 아이를 위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을 보았다. 이 젊은 부부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 비용이 너무 비싸서 신앙을 지키는 이 예식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 종교예식이 그들이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했던 비용을 지출하게 하였지만 그래도 이 종교예식에 참여하였다. 시므온은 놀라운 일을 기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가 이 젊은 가정이 단지 비둘기를 가지고 온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들이 양을 드릴 돈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가난한 십대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보고 있는 그리스도를 보았던 이 원숙한 신앙인이 우리라고 상상해보라. 우리가 보고 있는 그들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놀라운 약속과 가능성을 안고 있는 한 아이를 안고 있음을 상상해보라. 만일 당신이 그 자리에 있다면, 이 가족을 위해 축복을 해주는 것 보다 무언가를 더 하려하지 않겠는가?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 나라의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현실적인 방식으로 가난한 가족들을 돌볼 의무가 있다. 아마 이 본문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가난한 부모들을 통해 이 세상에 나오게 된 아이들을 위한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라는 권면인 것 같다.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 2021’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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