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데겔 설교]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칭찬을 받기 위해 행동하면 안된다!
[이달의 데겔 설교]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칭찬을 받기 위해 행동하면 안된다!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0.10.30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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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일 성령강림절 후 스물두 번째 주일
마태복음 23장 1-12절

신학적 관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여러 번 공격을 받은 이후, 예수는 마침내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태복음 23장은 저들의 종교적 지도력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다. 설교자는 오늘의 본문을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근거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태복음은 이 구절을 포함하여 히브리 성경의 권위와 유대 전통의 풍성함에 대해 매우 깊은 존중심을 표현한다. 마태는 또한 예수가 싫어했던 허영심, 위선, 오만함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는 보편적 특성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 구절의 요점은 특정한 민족이나 종교를 정죄하는 것에 있지 않고, 진정한 제자도의 본질에 있다.

본문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2절)에 앉아 있음에 근거하여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율법의 원래 수여자(授與者)였고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는 모세와 유사한 권위를 가진 율법의 교사요 해석자이고 존경과 존중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에 대한 지지를 밝힌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3절).

문제는 그들이 권위를 오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지하고 가르치는 진리와 상반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할 때, 사실은 자기과시에 관심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책임에 대해 말하지만, 사람들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손가락을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4절). 이런 식의 행동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만 적용되는 특이하고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위선과 자만심을 유발한 것은 유대교가 아니라 인간 본성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 및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인간의 죄의 핵심은 교만이다. “교만은 하나님 모방의 빗나간 형태이다. 왜냐하면, 교만은 하나님 아래에서의 평등한 교제를 싫어하고, 동료 인간에게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니고 자신의 지배를 받으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우리의 이익,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힘,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지위를 혼동하기가 매우 쉽다. 우리의 작은 영역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성향이 있다. 이것은 불쾌하게도 특히 종교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목적, 욕망, 자화상을 거룩한 것처럼 포장하려는 위선에 쉽게 빠진다.

믿음의 진정한 척도는 말이나 교리가 아니고, 본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나의 온 마음과 생명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보다 작은 것을 향하고 있는가?마 6:19-34)

주석적 관점

1세기 팔레스타인에는 유대교의 4개의 주요 종파가 있었다. 바리새파는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강조했다.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성전과 연관되는 있어서 대제사장들이 많았고 로마권력자들과 가까웠다. 에세네파는 쿰란광야에서 금욕적 공동체를 형성했는데, 다른 종파들을 진정한 유대 믿음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했다. 젤롯파는 군사적 수단으로 로마의 압제를 벗어나려고 했다. 이 네 그룹 중에서 오로지 바리새파만이 주후70년 성전의 파괴로 끝난 유대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예수는 3절 하반부를 특히 강조해서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은 하고 행하지 않는다.” 행위가 말과 일치되어야 하는데 이는 지도자들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려는 열정이 어떤 부류에게는 특히 땅의 사람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4절)이 되었다.

이들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그들이 칭찬받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5-7절). 많은 정통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경문곽(신6:4-9과 같은 구약 성서의 성구를 적은 양피지를 담은 가죽 상자)이나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그 길이는 현대 랍비의 양대 파인 힐렐파와 샴마이파 사이의 논쟁의 주제 중 하나였다). 예수는 이들이 자신들의 거룩함을 과시하기 위해 주목을 받으려는 그 동기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직함을 좋아하는 것도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7-8절의 “랍비”라는 용어는 “나의 주인”이라는 의미에 해당하는 존경을 나타내는 일반적 용어였는데, 하지만 1세기 말에는 명목상의 의미만 지닌 채 유대인 선생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9절의 ‘아버지’는 장로, 교사, 후원자 또는 과거에 존경받았던 인물을 지칭할 수 있다. 여기에서 예수는 아버지는 하나님께만 붙여지는 이름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했다는 것(마28:19-20)을 고려하면, 예수는 그 호칭과 위계질서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에 수반될 수 있는 특권을 우려하고 있는 것 같다. 비록 그러한 위계질서가 자연히 사회적 기관의 존립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종종 형제자매의 공동체(8절)인 교회가 지향하는 바를 약화시킨다.

목회적 관점

셀류코스의 탄압에 대항하여 일어난 마카비 전쟁에 기원을 둔 바리새파 운동에 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전사들은 나중에 분리주의자들이 되는데, “바리새”라는 용어 역시 분리를 의미한다. 바리새파는 타협과 냉소의 시대에 특히 대제사장을 지배하는 사두개파 사람들로 대표되는 종교귀족정치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개혁하려는 열성적인 평신도 운동이었다. 바리새파는 율법의 의미에 깊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먼저 율법교사인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존중한다. 그러나 같은 대목에서 예수는 이들 이스라엘의 평신도 교사들이 갖추지 못한 실천에 있어서 온전함과 일관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세 율법의 해석자가 되려고 하는 바리새파에 속한 이들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실천하고 또 관찰하라고 권고한다.

목회자든 평신도이든,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독교인을 만날 때는 그들의 신앙생활의 일부인 관심사나 주제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주장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할 때는, 사려 깊고 정중하게 해야 한다. 예수는 이런 기본적인 존경심을 보여준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지지한다. 오늘 본문을 해석할 때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 가지 목회적 도전을 주고 있다.

1. 이 교사들은 율법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발표하는 주제를 자기들의 일상생활에서 실천하지 않는다. 이 도전은 그들이 선포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진실성과 타당성에 대해 계속 의문을 갖게 만든다. 사람들이 우리 목회자들의 공적인 생활과 행동을 볼 수 있다면 이 부담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2. 이들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교사로서, 자신들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사람들의 어깨에 잘못된 짐을 올려놓는다. 그 짐은 율법 본문이 아닌 율법에 대한 그들의 특수한 해석으로부터 제기된 특별한 요구였다. 게다가 이들 율법교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지라고 요구하는 짐을 자신들은 피해가도록 하였다. 목회를 위해 우리 주님은, 모든 목회자들이 성서의 텍스트의 의미에 충실하라고 하신다.

3. 세 번째 도전은 교사와 종교 지도자의 자기만족에 대한 주님의 도전이다. 예수는 설명하지 않고 간단히 말한다. “그들은 영광을 받는 자리를 갖고 싶어 한다”(6절).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주님이신 메시아만을 바라보라고 권고한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듯이,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만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초대하고 있다.

이 놀라운 만남 안에서의 복음은 부모가 자녀를 아는 것처럼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도록 초대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셨다. 이 말씀이 새롭게 우리의 중심이 되면 우리의 눈을 주님의 기도에서의 주님과,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초대된 하나님을 향해 돌리게 되어서 자유로워진다.

설교적 관점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 말들은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마태복음 23장에서 비판한 것인데 거기서 그는 이 위선자들을 “눈 먼 인도자”, “회칠한 무덤”, “뱀들”, 그리고 “독사의 새끼들” (16, 27, 33절)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한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는 위선자들이 행하는 일-신실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4절) 천국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13절)-로 인한 피해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마태복음 23장의 위선자를 설교함에 있어, 위선자의 입장에서 위선자에게 설교하는 것은 어떨까?

마태복음에 나타난 위선

우리는 마태복음 3장에서 처음으로 위선자들을 보게 되는데 거기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한의 말씀을 듣기 위해 요단강에 모습을 드러낸다. 요한은 그들의 자만심을 비난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3:8)고 설교한다.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는 경건한 사람들의 실천동기에 초점을 맞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기 위해 경건을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위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위해” 보는 앞에서 자선을 행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큰 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하고 금식한다(6:1-7, 16-18). 그렇게 주목받기를 추구하는 경건은 단지 공허한 보상 곧 사람들의 칭찬만 얻을 뿐이다.

제자들과 군중들 앞에서 행한 설교에서 예수는 서기관들/바리새인들/사두개인들이라는 명칭보다 “위선자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위선자들이 어느 그룹에 속한다라기 보다는 어떤 행태를 보여주고 있는가에 주목하게 한다. 이것은 산상수훈 후반부에 익명의 재판관을 부를 때 분명해진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7:5).

마태복음에 나오는 “위선”은 두 부류의 형태를 보인다. 첫 번째 부류는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르다(3:7-8). 두 번째 부류는 행동은 올바르게 하나 그릇된 동기로(“사람에게 보이려고” 6:1, 5, 16,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6:2) 한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는 이 두 부류를 비난하는데 여기서 예수는 가르치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3절) 그리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하는 사람들”(5절)을 꾸짖는다.

위선자들의 마음

예수는 위선자들을 한편으로는 말만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칭찬을 받기 위하여 행동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위선자들은 자유자재로 변신한다.

이번 주일에는 설교자가 1인칭 화법으로 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일찍 위선자라 고백하고 정직하게 예수의 비판을 받을 만한 자리에’ 우리를 두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의 전환은 우리를 예수를 단순히 따라가던 군중으로부터 벗어나 위선자의 마음으로 향하게 한다. 위선자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힘이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이 욕구에 영향을 미치는 지를 알아보아야만 한다. 예수는 마태복음 6장에 하나의 힌트를 남겨둔다. 거기에서 위선자는 보다 분명한 사람들의 칭찬을 얻기 위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정을 버린다 (6:1, 4, 6, 8). 하나님의 “예스”(yes)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는 우리 위선자들은, 인간의 “예스”를 얻기 위해 우리의 경건함을 널리 알리려는 것이다.

이러한 위선을 치료하는 해독제는 은혜이다. 마태의 하나님은 끊임없이 용서해주신다 (18:21-35). 마태의 예수는 베드로의 부인(Peter’s denials)과 제자들의 소심함을 용서해주실 것이다. 실패와 결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신다. 이렇게 가면을 쓰고 지쳐버린 위선자들의 마음 속으로,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진실로 사랑하는 한 분이 들어오신다. 그는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11:28)고 말씀하신다.

참된평화를만드는사람들 성서정과 설교 연구 모임 제공

(cafe.daum.net/sermo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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