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데겔 설교]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그때가 언제인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달의 데겔 설교]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그때가 언제인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0.11.25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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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9일 대림절 첫째 주일
마가복음 13장 24-37절

신학적 관점

70년경 마가의 원래 독자들에게 이 말씀은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반란과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언급으로 들렸을 것이다. 13장 2절에서 예수가 성전 파괴를 예언한 후, 4절에서 제자들이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느냐고 묻는데, 오늘 본문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70년의 비극은 아무리 그 심각성을 고려한다 해도 종말적 사건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32절("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은 70년이라는 구체적인 연도를 배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또한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라고 강조하면서 그의 말이 그의 친밀한 제자들의 범위를 넘어서 마가의 독자들에게, 더 나아가 우리에게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이렇게 이 말씀 속의 예언들은 그 내용이 모호하고, 여러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인자가 구름을 타고(13:26)"라는 표현이 다니엘서 7:13에서 온 것이고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13:14)"이라는 표현은 다니엘서(9:27, 11:31, 12:11)에서 나온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외경 마카베오상 1:54, 마카베오하 6:1-6 참고). 마가는 우리에게 다니엘서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지시한다("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14절). 마가복음 13장은 다니엘서에 있는 기본적인 묵시적 시나리오를 택해 새로운 상황에 적용한 것이다. 묵시적 전망들의 기본적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악인이 의인을 억압하는 것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저항은 강력하다. 상황이 개선되기 전에 악화되는 일이 먼저 생길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버텨라. 왜냐하면 이제는 더 견디지 못하겠다고 할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세상을 바로 세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167년, 셀레우코스 황제 안티오코스 4세는 모든 외래 종교를 금했다.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할례와 제사 금지를 의미했다. 토라를 소유하는 것도 불법이었다. 안티오코스에 대한 마카베오의 항쟁 상황에서 다니엘서의 저자는 유대인의 전승으로 돌아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이교도 땅에서 신앙을 지켰던 다니엘의 이야기를 복원한다. 다니엘서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 의한 유대인 핍박과 기원전 2세기 셀레우코스에 의한 유대인 억압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이런 방식으로 마가복음도 셀레우코스의 억압과 1세기 로마제국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박해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묵시론적 전망들은 항상 다시 등장하여 새로운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미래 특정한 사건에 관한 예측이 아니다. 오히려 묵시론적 신학자들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가 현재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응 방식에 관한 지침을 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의 적은 어느 한 제국이 아니다. 모든 정치적, 경제적 권력은 사탄의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세속적 목적을 이루려 한다. 오늘 우리는 전쟁의 위협, 불안한 정치, 경제적 혼란의 와중에 있다. 또한, 하나님의 가면을 쓰고 자신들이 신과 같은 권위가 있다고 자처하는 지도자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은 놀라거나 당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리에게 미리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주석적 관점

깨어있음과 기다림

묵시주의나 종말론에서 기원한 사상들이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다. 묵시주의 현상은 어려운 정치적 사회적 위기에서 나온다. 그러기에 묵시적 사고방식이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저작들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묵시문학이나 묵시론적 세계관은 공통적으로 이원론(선과 악의 대결)과 비관주의(극도로 힘든 시기-지진, 전쟁 등), 그리고 임박성(세상의 종말이 가까움)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묵시적 사고는 대개 심판의 임박성과 다가올 더 좋은 시대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오늘 본문은 이른 바 “작은 묵시록”으로 언급된다. 마가 13장은 성전산에서의 예수의 가르침(12장)과 수난이야기(14-16장) 사이에 끼어있는 이야기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종말이 올 것이고 그들이 깨어있어야 하기에 조심하여 기다리라고 권고한다. 대림절 첫 주의 본문은 이 장의 후반부인데,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13:24-27, 28-31, 32-36).

우주적 징후

첫 부분에서, 저자는 잘못된 예언이나 속이는 징조로부터 실제적인 시대의 징조로 관심을 돌린다. 이사야(13:10, 34:4), 요엘(2:10, 3:4, 4:15), 에스겔(32:7, 8), 그리고 다니엘(7:13)에게 가져온 묵시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복음서 저자는 중요한 일을 예고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우주적 질서의 동요를 보여준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

이보다 앞에 나왔던 무화과 나무의 비유(막 11:20-22)가 성전의 파괴에 초점을 두었다면, 마가복음 13장 28-31절은 인자의 오심이 임박함에서 오는 시작과 희망에 초점을 둔다. 무화과 나무가 여름의 조짐인 것처럼, 종말의 징조는 인자의 오심의 전조를 보여준다.

비유를 통한 경고

13장의 마지막 비유는 여행하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여러 가지 목적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13장 31절이 재림의 지연을 언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13장 32절에서도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며 재림의 때에 매이지 말라고 한다. 여기에서 교훈은 독자들이 그날과 그 때를 알려고 하기 보다 준비하고 깨어있음에 관심을 두라는 것이다.

오늘을 위한 말씀

오늘 본문은 대림절 첫째 주의 다른 성서정과 본문(사 64:2-9, 시80:1-7, 17-19, 고전 1:3-9)과 잘 맞는다. 성서정과는 기다림의 주제를 전하고 있다. 대림절 기간에 우리는 주의하며 기다려야 한다! 대림절을 보내며 우리는 아기 예수의 오심이 더 가까워지고, 깨어있으라는 교훈은 다시 한 번 시간과 장소를 넘어 요청되고 있다.

목회적 관점

대부분의 교인들은 대림절 기간 중에 "깨어 있으라"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교인들은 이미 수면 부족 상태에 있다. 교회는 청소년 그룹에서부터 성인 성서공부반 및 축제 행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프로그램이 세상의 리듬에 맞춰져 있다. 세속적으로나 거룩하게나 모두가 성탄절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에게 “깨어있으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세상이 바쁜 것이 성탄절 때문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아기 예수 때문인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림절에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일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여러 해 동안 기찻길 옆에서 살아 온 사람들처럼 더 이상 기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교회에 여러 해 다니면 대림절이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소리에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예수의 오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어렸을 때, 대림절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기대에 차서 크리스마스 행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제는 피곤한 부모가 되어 그 행사를, 바쁜 주중에 아이들을 데려다 주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교회생활에서 멀리 있던 새 신자들은 보라색 배너와 대림절 화환의 등장과 함께 기쁨과 놀라움으로 대림절을 맞이한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에 이러한 계절의 징표는 단순한 장식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사하는 날에는 기찻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중에는 기차가 달려가는 기적 소리와 엔진 소리에도 잠에서 깨지 않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대림절에 한 때는 가장 명백하고 중요한 것이었을 그리스도의 오심을 놓칠 수 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잠들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정반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적인 방식으로는 우리가 깨어있지만 영적인 계절에 대해서는 잠에 빠져 있어서, 마가복음의 알람이 필요하다.

더 이상 무화과나무가 문화생활에서 중심적인 은유가 아닌 사람들에게 이것은 낯선 알람이다. 우리는 보통 무화과나무 가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가지들이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혹은 열매를 맺지 않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쇼핑을 준비하고 있는 계절에 우리는 화려한 상점과 할인 판매의 세계가 아니라 자연의 세계에 머물고 참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숙고한다. 세상에서의 삶은 소중하지만 예측할 수 없다. 인생은 짧다. 우리 인생을 쇼핑하는 데 써버리는 것으로 허비하지 말자. 우리가 깨어있을 때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할 시간이 아직 있다. 깨어있으면 가지가 부드러워진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어서, 여름이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깨어있으면, 한 밤중이나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적어도 우리가 기다리고 있을 때 도착하는 주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탄절 파티와 늦은 밤 쇼핑을 하는 와중에, 복음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깨어 있으라고 촉구한다. 이것이 실제로 평안을 주는 것이고,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

설교적 관점

대림절 첫째 주일에, 곧 교회가 성탄절 이야기를 시작하는 때에 이 성서정과 본문은 우리에게 마지막 때에 관해 관심을 갖게 한다. 흔히 “소(小) 묵시록”이라고도 불리는 이 본문은 예언자적 심판과 위로를 동시에 주는 예수의 현존 앞에 우리를 서게 만든다. 예수 탄생에 대한 기다림을 그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에서 시작하는 것이 처음에는 이상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두 이야기 모두 우리를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렸던 사람들과 동일한 자리에 있게 한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초림을 기다렸던 사람들도, 그의 재림을 지금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도 언제 그가 나타나실지 모르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림절이 시작되는 때에 인자의 재림을 기대하며, 예수탄생 이전에 메시아가 나타날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한 채 기다렸던 그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기다리고 있다. 우리 또한 그 사람들처럼 주의하고 깨어있으라는 같은 권면을 듣고 있다.

어떤 기다림은 수동적이다. 그러나 또한 능동적인 기다림도 있다. 도착할 버스를 기다리며 길거리 모퉁이에 서있는 소녀가 경험하는 것은 수동적 기다림이다. 같은 길거리에 서 있는 같은 소녀가 눈에는 보이지 않는 퍼레이드 소리를 듣고 나타날 행렬을 기다릴 때 그것은 기대에 가득 찬 능동적 기다림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그 때가 언제인지를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막 13:33)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능동적 기다림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언제 그가 다시 올 지를 우리가 미리 알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우리들이 그의 재림이 임박한 것처럼 살기를 촉구한다. 그러므로 대기실에서 꾸벅꾸벅 졸 시간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계속 남을 대접하느라 계속 바빠서 그래서 의자에 앉아서 팁을 셀 겨를이 없는 웨이터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들 곁에 있는 그 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는 이미 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에 관해 설교하면서 교인들이 자칫 그가 먼저 온 것을 잠시라도 잊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본문은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복음의 역설로 나아가게 하는데 그것은 현실 속에서 “이미와 아직”(already/not yet)이라는 구도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드라마이다. 이미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을 만들었으나, 아직 우리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현존하지만 그 나라는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늘 마가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 과도기 곧 “이미”와 “아직”사이에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주의하여 깨어있어서 이미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을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도래하는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할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다가올 그 나라를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된평화를만드는사람들 성서정과 설교 연구 모임 제공

(cafe.daum.net/sermo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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