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데겔 설교] “맹인(盲人) 바디매오를 보게 하신 예수님”
[이달의 데겔 설교] “맹인(盲人) 바디매오를 보게 하신 예수님”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1.10.21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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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4일 성령강림절 후 스물 두 번째 주일
마가복음 10장 46-52절
마가복음 10장 바디매오 치유 장면 스테인드 글라스. Pixabay
마가복음 10장 바디매오 치유 장면 스테인드 글라스. Pixabay

 

신학적 관점

예수는 거지 바디매오를 직면하고, 절규에 찬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간단한 말로 그를 고친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이 본문은 군중들이 조용히 하길 원했던 그 거지를 치유함으로써 예수의 능력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본문을 단순히 또 하나의 치유 이야기로 여기면 안 된다. 바디매오 이야기는 "눈멂"이라는 주제 아래 전개되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8장 22-26절에서 예수는 벳새다에서 눈먼 사람을 고치셨다. 9장과 10장에서는 예수는 다른 종류의 눈멂을 대면하는데, 그것은 철저하고 전복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인 눈멂이다. 예수는 인자가 고난, 버림, 죽음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베드로는 이런 예수를 꾸짖었다(8:31-33). 예수가 배반당하여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제자들은 헷갈려서 예수에게 더 묻기를 두려워했다(9:30-32). 예수의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지 논쟁을 했고(9:33-34),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좌우편의 자리를 달라고 부탁을 했으며(10:35-40), 다른 제자들은 그에 대해 분개했다(10:41). 바디매오 이야기는 이와 같은 일련의 이야기들을 절정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예수는 바디매오의 육체적 눈멂 뿐 아니라, 더 심각한 일 곧 예수를 가까이 따르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가져온 전복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그 영적인 눈멂을 목도하고 있다.

바디매오의 치유 이야기는 우선적으로는 그의 개인적인 요구를 들어주는 의미가 있지만, 신학적으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면서 그의 제자들의 영적인 눈멂을 치유하기 원했던 예수의 노력을 환유적으로(metonym)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만난 눈먼 사람들과 말씀과 행동으로 시력을 회복시키는 예수의 능력이 빚어내는 상호작용은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기독론적 주장에 힘을 더해준다. 기독론적인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에 담긴 두 가지의 역설적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바디매오는 예수를 “다윗의 아들”(10:47)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를 다윗의 아들이라 칭함으로써 그는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회복할 새로운 다윗왕조의 왕이라는 일반적 기대와 같이 하고 있다. 바디매오는 예수를 다윗의 아들과 동일시하여 그가 정말로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그는 눈이 멀었지만 예수를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없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바디매오의 “다윗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또한 그가 결국 보지 못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역설적이게도 바디매오가 사용했던 호칭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거부할 호칭이었다. 성전에서의 설교에서 예수는 분명히 메시아를 다윗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12:35). 따라서 바디매오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보았지만, 어떤 메시아인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방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의 진정한 사명을 볼 수 없었다. 제자들처럼 바디매오는 단지 부분적으로 보았다.

주석적 관점

마태는 처음부터 (그리고 자주)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말하고, 누가도 1:27,32,69,2:4 등에서 반복하고 있지만, 마가는 지금까지는 이에 대한 힌트도 없었다. 그런데 바디매오 이야기에서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명확히 한다. 사실 예수는 여러 번 사람들이 위대함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주의시켰지만, 여기에서는 바디매오의 고백에 대해 주저없이 받아들이신다. 마가의 이야기 맥락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마가는 “다윗의 자손”이란 것을 예수의 왕조 전승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군중들이 다윗의 왕국의 수도에서 그를 수행했으며, 예수 자신도 12:35-37에서 다윗의 아들로서 기름부음 자, 즉 그리스도로 여겼다고 말한다.

예수가 “다윗의 자손”과 기름부은 자를 연결시켜 받아들인 것을 “정치적”메시야와 “영적”메시야가 결합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결국 하스모니아 왕조는 대제사장과 왕의 직은 한 해 전에 융합시켰다. 마가복음 12장 35-37절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카테고리에 국한되지 않는 해방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바디매오의 믿음이 그를 치유하고 구원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의 역할을 순회하는 치유자에서 왕의 아들로 전환시키고 있다. 바디매오와 예수의 서로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러한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내부자라고 분명하게 확신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했던 그 질문을 지금 예수는 전형적인 외부인에게 하고 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신자라고 추정되는 사람이 한 대답은 처음부터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애원하면서 하는 간청은 그와는 대비되는 청원으로, 그 자체가 신앙고백 같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51절) 첫 번째 청원은 잘 확립된 종교의 월계관을 믿는 것이다. 두 번째 청원은 어둠과 의심에서 나온다. 첫 번째 요청은 고난을 비껴가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실, 배척,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자는 의로움에 대한 배타적인 요구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고, 후자는 홀로 의로우신 아들 앞에서 고난 때문에 허리 숙여 절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내부인과 외부인 모두에 대한 우리의 목회의 본질을 보여준다.

우리는 무리에 대한 예수의 반응을 어떻게 생각하고, 치유와 구조를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도 예수 옆에 있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목회하고 있는가? 우선, 예수가 무리에 대해 무심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무리에게 외부인을 예수 옆으로 오게 하라고 명령한 것 말고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예수는 무리가 사람들의 곤경에 무지하다고 나무라지 않았고, 그들의 신실함에 의혹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를 불러 오라”고 명령함으로 거기 모여 있는 무리에게 제자가 되라고 명령한다. 그들은 이 매우 구체적인 복종의 행위를 하지 않고는 제자가 될 수 없다. 만약 예수 안에서 시각장애인이 보게 되고, 지체장애인이 걷게 되고, 한센병 환자가 깨끗하게 된다면, 단순히 예수에게 가까이 있기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사랑이 곧 그들이 지켜야 하는 명령인 공동체 안에 그들 자신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목사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에게 교회가 되라고 명령할 때, 신자들은 그들 자신이 이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를 따를 때, 예수가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꾸짖거나, 그들의 신실함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 그 대신 우리는 공동체가 다른 사람들의 탄식에 긍휼한 마음으로 참여하도록 요청한다.

두 번째로, 이 이야기는 우리의 목회가 외부인, 즉 제도적인 결정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한 목소리와, 우리가 가고 있는 길 위에 서 있는 이른 바 하나님께 버림받는 사람의 외침에 귀 기울이도록 우리를 부른다. 우리의 목회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들은 멀리하고, 교인들의 관리 가능한 요청들을 들어주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은 설교자나 교인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앞장 서 가시면서 사람들에게 따르라고 부르고 때로는 치유하고 자비를 베풀었던 그의 사역과 인격을 이해하고 거기에 응답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초대는 예수께서 길 위에서 제자들에게 했던 질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8:27)에 대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 중 하나도 아니다. 그 분은 그리스도이다. 그의 이름이나 직함은 그가 하는 일과 그 사람을 설명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이 시각장애인을 도울 것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데 그 이유는 그 전에 벳새다에서 어느 시각장애인을 고쳐주셨기 때문이다 (막 8:22-26). 하지만 예수께서 치유한 많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오늘 본문의 시각장애인은 아람어 이름인 바디매오(Bartimaeus)로 기억되는데 이 말은 “디매오의 아들” (son of Timaeus) 혹은 “명예의 아들” (son of honor)을 의미한다.

교인들은 이 시각장애인이 예수께 나아감에 있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종종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2:2).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단호하게(10:13) 제지했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바디매오가 지닌 장애나 구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일로 인해 이 행진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 과연 그에게 정당하게 들렸을까? 바디매오는 예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꾸짖음에 설득당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외침이 들려지기까지 계속한다. 그는 자신의 명예, 경제활동 그리고 풍요로운 삶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존경받는 분으로부터의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외침이 예수에게 들릴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예수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불러 예수께 데려온다. 그가 자비를 이끌어 낸 돌파구는 그가 자비를 외쳤을 때 나사렛 예수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이제 달라져 있다라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더 이상 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기뻐서 이렇게 말한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그들은 자비의 증인이요 통로가 된다.

이 시각장애인은 기독교 제자도의 모델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예수께 나온다. 겉옷은 그가 소유한 가장 소중한 것인데 그 이유가 있다. 그 겉옷은 추운 밤에도 그를 따뜻하게 보호해주었다. 또 그가 구걸한 빈약한 것들을 보관할 수 있게 해준다. 겉옷을 벗어던진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이전의 삶을 뒤로 하고 떠나는 사람의 이미지를 본다. 언제나 부와 명예, 풍요와 특권을 지니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이미지는 자기포기와 극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복음이 지닌 변화의 능력을 상기시킨다.

복음서 저자는 기적적인 만남이 바디매오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주도적인 행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를 향해 외친다. 그는 예수께로 나온다. 예수께서는 이 과정을 그에게 한 질문을 함으로써 가능하게 한다: “내가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는 친구들의 믿음을 통하여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고 치유했을 때도 (2:1-12), 또 회당에 손 마른 사람이 들어왔을 때도 (3:1-6)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믿음, 온전함, 그리고 제자도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 대화에서 바디매오는 선생님이라는 용어를 존경을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한다. 아마도 그는 제자가 되는 길이 가르침, 배움, 이해, 보고 듣는 것 모두를 포함하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바디매오는 뛰어난 제자후보생이다. 보기를 원한다는 그의 요청은 그에게 구원의 길이 된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단지 육체적으로만 보게 된 것이 아니다. 그는 구원의 길을 볼 수 있는 자비를 부여받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바디매오의 믿음을 주목해서 본다 (2:5을 참조하라). 그리고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과 온전함,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성찰하도록 초대받는다. 이런 요소들은 우리가 자비의 말씀을 듣고 응답할 때 강하게 결합된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건강하게 하였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치유하였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다.”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 2021’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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