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특집-그곳에 가면 교회가 있다] 목포, 양동교회, “지역의 어둠과 광복, 역사의 고비를 함께 한 교회”
[여름특집-그곳에 가면 교회가 있다] 목포, 양동교회, “지역의 어둠과 광복, 역사의 고비를 함께 한 교회”
  • 정성경 기자
  • 승인 2019.08.23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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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
광복절을 준비한 교회와 성도들
1897년에 전남, 광주에 최초로 세워진 목포 양동교회. 정성경 기자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 곳곳에

아픔이 기억으로 남은 도시

‘전남‧광주 지역 최초교회, 성도들의 뜨거운 헌신이 있는 교회, 성경번역에 큰 역할을 한 교회, 목포 근대화에 앞장섰던 교회,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교회, 나라의 아픔과 함께했던 교회’가 있다. 1987년 3월 5일 목포에 세워진 양동교회(최병기 목사)다.

전남 최초 교회인 목포 양동교회는 1897년 유진벨 선교사와 신도들이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가 되어 교인들의 노력으로 완성됐다. 이는 선교사들이 계획하고 있는 선교타운 일부에 불과했다. 1898년에는 의료선교사 오웬이 목포에 도착해 1899년 진료소를 열고, 그해 12월 스트래퍼 선교사가 합류하면서 여성 어린이 사역을 담당했다. 당시 목포 개항이 1897년에 이뤄지면서 150호 정도였던 가구가 1910년 1만 2천명을 넘어서며 1925년에는 3만 7천 여 명에 이를 정도로 발전했다. 그리고 1903년에는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등의 교육선교를 시작했다. 또한 목포 최초의 근대병원인 프렌치병원을 통한 의료선교, 그리고 고아들을 위한 공생원 등의 다양한 선교기관을 설립해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양동교회에 세워진 '선교107년 기념비'. 정성경 기자

1910년에 건축한 양동교회당은 유달산에서 직접 날라 온 석재를 주재료로 축조되었으며 특이하게 왼쪽 출입문 위쪽에 大韓隆熙四年(대한융희4년)이라는 글씨와 태극무늬가 새겨져 민족의 교회였음을 강하게 풍긴다. 교회당은 현재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고, 등록문화재 제114호로 등재되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제103회, 2018)는 목포양동교회의 신앙적 증언의 유산을 기리고 보존하기 위해 ‘총회 유적교회’로 지정한 바 있다. 교회 옆에는 ‘선교107년 기념비’와 ‘순교 박연세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양동교회 터는 1919년 4월 8일 목포의 3‧1운동을 계획하고 만세시위를 이끌었던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양동교회 교인들은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태극기와 전단을 제작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목포상업학교와 목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도 참여시키기로 하고 각각 임무를 분담한 뒤, 목포 시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4월 8일, 양동교회 교인들은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앞장섰다. 이날의 만세시위로 수많은 교인들과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시련을 겪었다.

1926년 양동교회에 부임한 박연세 목사는 1942년 일본의 황민화정책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가 체포되어 결국 1944년 대구형무소 독방에서 동사(凍死)했다. 박 목사의 유해는 지난 1988년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최병기 목사는 “양동교회가 목포 개화기 시절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목포 근대화에 많은 역할들을 했다”며 “양동교회가 발전하면서 교회 출신들이 여러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에도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최 목사는 양동교회를 방문한 이들에게 여호수아 4장 말씀을 전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요단강을 건넌 후 요단 강 바닥에 있던 돌을 길갈에 세우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 그리고 후손들이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셨고 함께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하신다. 우리 양동교회도 길갈에 있는 12기둥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희망이 없고 빛이 없던 이 땅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양동교회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빛이 되는 것, 그게 교회의 본래 모습이다. 양동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셨다’는 메시지가 전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정명여중에 세워진 독립기념비. 정성경 기자

양동교회에서 나와 왼편으로 가게 되면 1903년에 선교사들이 세운 정명여중‧고(당시 정명여학교)를 만날 수 있다. 그곳에 독립기념비(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물 제53-1-2호)가 있다. 1983년 정명여중 교내 기숙사를 개축하면서 3‧1독립만세운동 참가에 관한 독립운동문서 발견을 기념해 1985년에 건립한 것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4월 8일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양동교회 신도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증거인 독립선언서와 독립가사, 결의문, 당시 일을 알리는 지하신문이 이 곳 교실 천장에서 발견됐다. 당시 시위로 80여명이 체포되어 심한 구타와 고문에 시달렸고,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는데 그 중 정명여학생이 절반을 차지했다고 한다.

양동교회, 정명여중‧고와 멀지 않은 곳이자 유달산 아래, 전국에서 떠오르는 ‘핫플레이스’ 중 하나인 목포근대역사관 1관(국가사적 제289호구 목포일본영사관)이 있다. 이미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한데다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 촬영지로 더 유명해졌다. 1900년 12월 완성되어 목포 영사관으로 사용되던 아픈 역사에 비해 유달산을 배경으로 지어진 외관이 수려하다. 일제 강점기 당시 영사관, 목포이사청, 목포부청사 등으로 활용되다 해방이후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에서 현재 목포근대역사관으로 개관했다.

목포 시작과 현재를 보여주는 이곳에서 목포진으로 성의 모습을 갖춰진지 1502년(연산군 8년)부터 개항장으로써, 1897년 개항 후 기독교 천주교, 일본 불교인 동본원사 전파 등의 외래 문화전파지로써, 일제강점기의 저항의 제일선으로써, 1919년 4월 8일 만세운동의 거점지로써 목포를 만날 수 있다. 지금까지 잘 보존된 아름다운 건물과 달리 건물 뒤에는 전쟁준비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방공호도 2군데나 있다. 방공호란 공중에서 가해지는 폭격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적 목적의 방어시설로, 일제가 태평양전쟁 시 대규모의 방공호를 만들어 취사 시설 및 공기 정화 시설까지 마련하고 장기전에 대비한 시설로 준비된 곳이다.

목포의 근대역사를 만나볼 수 있는 목포근대역사관 1관. 해방되기 전까지 목포일본영사관이었던 곳. 정성경 기자

목포근대역사관 1관에 도착하기 전 태극기를 두르고 있는 ‘목포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 사진도 찍을 수 있다.

그곳에서 300m 떨어진 곳에 ‘목포근대역사관 2관(구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174호-목포시 번화로 18)’이 있다. 이곳에서는 일제강점기 수난의 역사와 1920년대 말 잊혀져가는 목포의 옛 모습을 사진으로 생생하게 되돌아볼 수 있다. 국내최초로 공개하는 잔악한 일제 침략사 사진을 비롯해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치열한 구국 운동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동양척식회사는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독점하기 위해 설립한 것으로 목포지점은 1920년 6월 문을 열었다. 동양척식회사는 한국 농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했는데 목포지점의 경우 17곳의 농장을 관리하며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둔 제1위의 지점으로 일제식민지 지배의 상징적인 장소다. 이 건물의 건축양식은 후기 르네상스 양식에 장방형 평면의 2층 석조 건물로서 일본을 상징하는 모양이 여러 곳에 새겨져 있는데 정면 입구에 태양문양, 좌측 상단 부 벚꽃 문양과 건물 내부 1층 벽면에 장식된 태양 문양 등이 있다. ‘일제의 잔재’, ‘군부시절의 헌병대 건물’등의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어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외면되어 왔었으나 새로운 문화의 세기를 맞아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져 지난 1999년 11월 20일 전라남도 문화재로 등록됐다.

목포 원도심에는 또 특별한 곳이 있다. 1930년대 건립되어 일본사찰법당으로 쓰이다 1957년부터 2007년까지 목포 중앙교회(구 동본원사 목포별원, 등록문화재 제 340호)로 사용되던 곳이다. 석재를 이용해 일본 목조 불당의 건축의장 요소를 표현한 보기 드문 외관을 뽐내고 있다. 본당 전면에는 예배 용도로 사용되는 공간을 현관화해 구성했고, 그 위쪽 지붕은 일본식 박공지붕 형태로 꾸며져 있다.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목포시지부가 6월 항쟁을 준비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오거리문화센터로 건물 내부를 전시·문화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일본 사찰법당었다가 교회로 사용되었던 현 오거리문화센터. 정성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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