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과 그리스도인의 시간체험
대림절과 그리스도인의 시간체험
  • 심광섭 목사
  • 승인 2018.12.07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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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은 교회의 일 년 삶의 시간표다. 교회력은 대림절(강림절, 대강절, Advent)에서부터 시작한다. 대림절은 성탄을 앞둔 4주의 기간이다. 따라서 일 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대림절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세상의 달력이 일 년을 분주하게 끝내는 마지막 달인 12월에 교회력은 일 년을 대림절로부터 조심조심 새롭게 시작한다. 세상 사람들이 송년과 망년이라 여겨 소비하며 헛된 분망함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달에, 교회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삶을 살 것이라는 벅찬 기대와 새로운 낮꿈으로 설렌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세우는 계획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오실 구원의 주님을 기다림이라는 선사된 고운 시간을 산다. 그 시간은 마음을 고요하고 사물을 그윽하게 조율한다. 평화의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 곧 메시아적 시간이 교회의 삶을 인도한다.

교회력은 대림절(강림절, 대강절, Advent)에서부터 시작한다. 대림절은 성탄을 앞둔 4주의 기간이다.
교회력은 대림절(강림절, 대강절, Advent)에서부터 시작한다. 대림절은 성탄을 앞둔 4주의 기간이다.

 

주님,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나는 종일 주님만을 기다립니다.

내 눈은 언제나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나는 주님만 기다립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시 25:1,5,15,21; 130:6)

 

만남과 대화의 종교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시간은 곧 인간 존재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시간의 깊이 속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잡다하고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그들의 만남이 의미와 방향을 지닌 새로운 종합과 통일을 낳는다. 세계가 탄생하는 것은 시간에 의해서이며, 시간이 세계를 낳는다. 시간의 과정에서 의미와 방향이 발생한다”(『나와 너』).

흔히 우리가 내일 혹은 미래(futurum)라고 말할 때 그 시간은 아직 오지 않고 경험되지 않은 시간이다. 이 시간의 의미는 인간 주체가 형성해 갈 수 있는 것,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으로서의 미래다. 근대 이후의 인간은, 미래를 과거로부터 일어나는 인과적 힘의 결과로서, 곧 만들어 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미래는 이미 과거로부터 발전하고 현재하고 있는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나라도 그렇게 이해했다. 하나님나라는 인간의 도덕적 성숙과 사회적 정의의 실현이라는 세계내적 발전에서 성취된다. 미래는 인간이 파악하고 장악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미래보다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추진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대림절 속에 녹아있는 교회의 시간이해는 매우 독특하다. 기독교적 미래의 시간 이해는 도래(adventus, 到來)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이 그 고갱이다. 그것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대상을 대하듯이 불러내어(표상) 세우고, 주문하여 장악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붙잡으려고 쫒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오는 시간으로서 인간주체의 오만한 장악력을 무장해제하는 도래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인간은 자기가 성취할 미래에 대한 기대 속에서 자기 확장의 욕망에 부푼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미래는 현재의 투사이거나 미래에로의 도피로 비판받거나 의심된다. 그리스도인은 “환한 얼굴”(시 4:6), “빛나는 얼굴”(시 44:3, 80:3, 89:15), “밝은 얼굴”(시 119:135)로 오실 주님을 기다림으로써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넘치고 늘 푸르고”(시 92:14) 싱싱하게 사귀는 예감에 사로잡혀 나를 기쁘게 하며, 나를 채워주는 삶을 산다.

이러한 삶의 특정한 시간체험은 자기중심의 능동과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 중심의 수동과 겪음에 있다. 도래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메시아의 오심,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parousia),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계 1:8)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구유의 탄생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기까지 수동적 능동의 삶의 전형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탄생을 경배하는 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행위와 결단에 대한 수동적 맡김의 차원에서 죽으셨다.

대림(아드벤투스)은 단순히 과거에 축적된 원인들의 결과적 산물이거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가능태가 현실태가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선포 전체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나라’는 과거와 현재의 연장이거나 개선이나 개혁 혹은 진화일 수 없다. 또한 두 개의 세계가 있어 이 세상이 완전히 끝나고 난 다음에 하나님나라가 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도래(아드벤투스)로서의 새로운 시간체험에서 시작된다.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의 대척점에서 창조를 완전히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로서, 곧 도래(아드벤투스)로 일어나는 특정한 시간체험이며 역사가 황홀해지는 사건이다. 진정한 혁명은 ‘세계의 변화’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시간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의 소금이며, 이 세상 빵의 누룩이기 때문이다.

대림절(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림)-성탄절(그리스도의 태어남)-주현절(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타나심)-사순절(그리스도의 공생애 및 수난과 십자가)-부활절(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성령강림절(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냄)-왕국절 혹은 창조절(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어 세상을 정의, 평화 그리고 창조의 보전으로 다스리심)로 이어지는 교회력은 모두 예수님 생애의 중요한 사건과 관련되어 새롭게 시간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림에서부터 시작되는 교회력은 종말론적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가장 초기의 종말론적 본문인 데살로니가 전서 4:13~5:11을 해석하면서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경험을 “현사실적 삶의 경험”(faktische Lebenserfahrung)이라 했다. ‘현사실적’이란 근원적이며 깨어 생생하다는 뜻이다. 깨어있음은 현재의 시간을 사후의 세계로 밀어내어 연장하지 않고 시간에 대한 민감함을 통해 현재 영원무궁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임박하게 여기로 오시며, 이 오심에 대한 기대가 그들의 삶과 시간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오심 앞에서 인간중심의 “모든 개념분석들/모든 논리실증주의들/모든 경험론들/모든 좌우 도그마들/모든 관념들”(고은)은 아슴아슴 사라진다. 그들의 삶은 설렘과 기대 속에서 생생하게 깨어 있는다. 그들에게 게으름과 현상유지의 안정은 하나도 없다. 경험 상실, 경험 파괴, 경험 망각의 시대, 경험이 정보화되어 경험을 관찰할 뿐인 시대, 실험 속에서 조작되고 꾸며진 경험을 간접적으로 구경하며 웃음 흘리는 시대, 경험이 상품화되는 시대, 사회적 체면과 마취로 인한 경험의 마비 속에서 곧 생생한 경험이 생긴다. 이제 나는 실제로 살기 시작한다.

일상적인 시간을 사는 “사람은 한낱 숨결과 같고, 그의 일생은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다”(시 144:4). 시간은 지리하고 권태롭다. 그러나 깨어 있는 시간은 시계의 시간(chronos)에 따라 사는 시간이 아니라 ‘선사된 시간’(kairos)을 사는 시간이며, 선사된 시간에 흠뻑 젖은 충만한 시간이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벧후 3:8)같은 시간이며,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는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 보다 나은”(시 84:10) 시간이며,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은”(시 90:4) 시간이다. 이때 시간은 의미가 충만해지면서 초월을 향하여 투명해진다. 대림절의 시간은 처음 창조의 시간, 태초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일한 시간이며 존재가 참(眞) 선(善)한 아름다움(美)으로 변하는 새 창조의 예술적 시간이다.

 

심광섭 목사 전 감신대 교수(조직신학/예술신학)예목원 연구원
심광섭 목사 전 감신대 교수(조직신학/예술신학)예목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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