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으로 드리는 예배
오감으로 드리는 예배
  • 이정배 교수
  • 승인 2018.12.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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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각과 청각을 자극해서 만드는 예술이다. 청각예술인 음악과 시각예술인 미술 그리고 공연예술인 연극이 교차하는 지점 어느 즈음을 자리하고 있다. 또한 신체예술인 무용까지 결합한 뮤지컬과 나란하게 서있다. 이런 면에서 영화와 가장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장르는 뮤지컬일 것이다. 초기에 뮤지컬영화가 많았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영화와 뮤지컬의 차이는 복제에 있다. 뮤지컬을 비롯한 연극, 무용과 같은 공연예술은 그 당시 그 장소에서 공연되고 나면 사라진다. 그 때 그 시간에 참여하지 못하면 감상하기 여렵다. 영화는 그러한 제한성을 극복하였다. 필름기록을 통해 언제라도 다시 들추어 감상할 수 있고, 여러 개로 복제가 가능하여 동시에 수만의 사람들이 관람할 수도 있다.

뮤지컬과 영화가 지니고 있는 특성은 예배의 구성요소들과 무척 닮았다. 성서 속 하나님을 찬양하는 묘사 기록에서 이런 특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 예로 다윗이 여러 지역을 순회하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안정적으로 두기 위해 우선 그의 궁으로 모셔오던 때의 장면을 기록한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역대상 13:7-8)

위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노래와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과 힘을 다해 뛰노는 장면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잘 유추해보면 수레를 몰고 진행하는 전체 과정이 일종의 퍼포먼스(performance, 行爲藝術)였다는 걸 발견한다. 이러한 예는 하나님의 예배와 찬양으로 그득한 시편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편 149:3)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악기소리와 찬양이 끊이지 않았다. 향기를 머금은 초는 빛과 향을 쉬지 않고 뿜어냈다. 여기에 예배하는 자들은 온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하나또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묘사에서도 이러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31:13)

예레미야서는 모든 세대가 더불어 춤추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기쁨이 충만하면 우리의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을 것이다. 포로로 지내다가 풀리게 되면 자연스레 기쁨을 소리를 내지르며 덩실덩실 즐거움으로 몸을 움직일 것이다.

구약시대의 예배가 오감을 모두 사용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의 과정은 오감을 두루 자극한다. 동물의 각을 뜨는 시각화 과정 동안 찬양단은 쉼 없이 하나님을 찬양했다. 성전은 이미 아름다운 향으로 그득했다. 제물을 태우는 동안 후각이 내내 자극된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허용된 고기를 나누어 먹으면서 미각을 자극했다.

예수님의 설교도 다르지 않았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 생명의 음식에 대한 설교를 하실 때, 모든 이들에게 오병이어를 들어 기도하는 것과 나누는 과정을 보게 함으로 의미를 깨닫게 하셨다. 또한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설교하시다가 손 마른 사람을 보고 그를 일어서게 하시고 손을 내밀라고 하신다. 이러한 이적을 통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는 귀한 진리를 몸소 가르쳐주셨다.

종교개혁을 통해 말씀에 집중하는 예배로 변모했다. 물론 말씀이란 것이 음성언어에 한정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세 가톨릭이 시각화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는 주로 청각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래서 설교와 음악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극단적인 시각적 요소 배제는 예배를 ‘듣는 예배’로 만들어버렸다. 따라서 ‘보는 예배’의 회복이 필요한 상황이다.

‘존 버거’가 자신의 저서 《본다는 것의 의미》에서 말한 것처럼, 무엇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눈이 가지고 있는 빛의 요소와 사물이 지니고 있는 빛의 요소가 서로 만나는 협응(協應)의 사건이다. 우리는 스스로 교회에서 ‘예배를 본다’는 것을 ‘예배를 구경한다’는 의미로 축소시켰다. 제대로 예배를 본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빛과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의 빛이 조우하는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 예배는 ‘들으면서 보는’ 입체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영화나 뮤지컬의 문법이다.

 

 

이정배 교수
이정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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