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의 작은 대학도시인 세인트앤드루스(St. Andrew)는 다른 유럽의 도시에 비해 한국교회에 잘 알려진 도시는 아니다. 그런데 이 세인트앤드루스는 장로교의 역사를 거슬러봤을 때 상당히 중요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의 가장 오래된 대학교가 있는 이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장로교의 아버지인 존 낙스(John Knox)가 신학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세인트앤드루스는 존 낙스 이전에도 패트릭 해밀턴과 조지 위샤트라는 개혁가들이 활동함으로써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장신대 박경수 교수가 쓴 ‘개혁교회, 그 현장을 가다’에 따르면 패트릭 해밀턴은 루터의 영향을 받고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설교를 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1528년 2월 29일에 불과 24세의 나이로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지금도 세인트앤드루스에 가면 그가 화형을 당한 장소에 그의 이름을 따서 ‘PH’라는 표지판이 바닥에 새겨져있다. 그 표지판에 붙어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에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학생 패트릭 해밀턴이 1528년 2월 29일 24세의 나이로 화형을 당하였다. 그는 유럽 대륙에서 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고 세인트앤드루스로 돌아와 루터주의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해밀턴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이단으로 정죄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세인트앤드루스에는 패트릭 해밀턴의 표지판 뿐 아니라, 조지 위샤트의 표지판도 존재한다. 조지 위샤트 역시 젊은 나이에 이단으로 몰려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화형을 당했는데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1546년, 33세에 화형을 당했다. 존 녹스는 패트릭 해밀턴에 대해서는 그저 풍문으로만 들었지만, 조지 위샤트는 직접 만났고 그의 호위무사를 자처했다고 전해진다.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아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10대들이 어떻게 겁도 없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떠올렸을까를 생각해본다. 이와 비슷하게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불과 20대와 30대 청년들이 겁도 없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해 반기를 들고 성경적 진리를 설파했다. 24살의 나이에 순교한 패트릭 해밀턴이 믿었던 복음과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이 다르지 않을 텐데 복음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차갑게 식어버린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