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7년 겨울은 중세 유럽사에서 최고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여주는 카노사 사건이 발생한 시기다. 흔히 카노사의 굴욕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 성으로 가서 관용을 구한 사건을 말한다. 카노사의 굴욕은 그리스도교에 세속 권력이 굴복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세계사에 기록되었다.
김덕현이 2007년에 쓴 ‘11세기 서임권 논쟁과 교회-국가간의 갈등’이란 논문에 따르면,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분쟁은 밀라노 주교의 선출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그 당시 밀라노 지역은 교황과 황제 모두에게 중요한 지역이었다. 황제 입장에서는 롬바르디아 평야에서 가장 큰 도시인 밀라노의 통치권을 황제의 권력 아래에 두어야 했다. 반면에 교황 입장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밀라노가 로마 다음으로 중요한 교구였고, 밀라노의 주교는 밀라노시의 통치권을 쥐고 있었기에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렇게 황제와 교황이 밀라노의 교주를 각각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임명하다보니 황제와 교황의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1076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독일 황제의 통치 직무를 정지시키고, 황제의 파문을 선언했다. 교황의 선언은 독일에 즉각적이고 충격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전반적인 독일의 분위기는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불리하게 돌아섰고,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교황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교황으로부터 사면 받기 위해 참회자의 신분으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의 중부도시 카노사에 도착했다. 하인리히 4세는 1월 25일부터 28일까지 3일 동안 교황이 머무르는 성의 안마당에서 참회자의 자세로 탄원하며, 눈 속에서 맨발로, 거친 양털 옷을 입은 채 추위에 떨면서 성문을 두드리며 교회의 응답을 기다리며 서있었다. 3일 후에 교황은 성문을 열어 그를 받아들이고 용서했다. 이 사건으로 황제는 자신의 자리를 간신히 지킬 수 있었지만, 황제로서의 권위를 상실했다. 이후 역사 속에서 ‘카노사의 길’이란 말은 독일 군주의 비참한 굴욕을 가리키는 속담과 같은 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