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3월 26일에 일본의 개신교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가 에도 고이시가와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칼을 차고 다니면서 전형적인 일본인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그는 미국 선교사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농학교를 다니던 중에 친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우치무라 간조는 미국에 잠시 유학을 하며 그곳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 이후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지식인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일본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우치무라 간조는 성경연구의 장인이었다. 그는 사무라이 정신으로, 성령의 일본도를 휘두르며 완악한 일본인들의 양심에 회심의 상처를 남겼다. 일제 시절의 조선인등 중에도 그가 휘두르는 성령의 일본도에 난자당하여 피를 철철 흘리며, 거듭난 청년들이 여럿 있었다. 그 대표적인 청년이 바로 성서조선의 김교신과 함석헌이었다. 김교신과 함석헌은 일본 유학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로마서 강해를 직접 현장 강의로 들으며 성경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흔히 한국교회에서 우치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자로 불리는데 이는 교회 자체를 거부한다기 보다는 서양의 위계적이고 계급적인 교회를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치무라 간조가 쓴 ‘사랑의 샘가에서’라는 책에는 그의 교회관이 잘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구주가 아니라 세계의 구주다. 그는 오늘날 좁은 교회에서 떠나 넓은 세계에서 편재하여 계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계며, 그 회원은 인류다. 나는 거기서, 그들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나의 형제자매를 찾아내려고 한다.”
우치무라 간조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바로 '저항과 복종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평화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복종하고 일본의 군국주의와 전쟁에는 저항했다. 190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 그의 전쟁 반대론(비전론)은 사람들에게 거의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는 매국노이자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사회에서 자신이 전쟁을 반대하기에 받는 모욕과 비난을 끝까지 감수했다. 그의 삶은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삶이 아니라, 크고 작은 흠집과 헤아릴 수 없는 상처가 가득한 삶이었다. 저항과 복종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간 우치무라 간조는 결국 1930년 3월 28일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