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3년 1월 29일 취리히 시청에서는 스위스 종교개혁과 관련된 ‘제1차 취리히 논쟁’이 열렸다. 이 논쟁은 1522년에 발생한 ‘소시지 사건’으로 인해 취리히에서 개혁운동의 소용돌이가 몰아친 게 발단이 되었다. ‘소시지 사건’과 ‘제1차 취리히 논쟁’은 모두 취리히의 종교개혁가 훌드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와 밀접하게 관련된 사건이었고, 츠빙그리는 이 사건을 거치며 취리히에서 신앙의 양심에 따라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먼저 1522년에 취리히에서 논란이 된 ‘소시지 사건’은 사순절 기간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중세교회의 신앙규례를 사람들이 어겨서 발생한 사건이다. 1522년 사순절 첫 주일인 3월 9일 저녁에 츠빙글리를 포함한 12명의 사람들이 취리히의 출판업자 프로샤우어의 집에 모였다. 그리고 그 당시 츠빙글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소시지를 먹었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취리히 전체에 알려져 논란거리가 되었고 이 논란을 수습하고자 취리히 시의회가 이 사건에 개입했다.
권선종 목사가 2012년에 쓴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정체성 연구’에 관한 논문에 따르면 취리히 시의회는 1523년 1월 3일에 취리히의 성직자들에게 통지문을 보냈다. 이 통지문은 1월 29일에 시청에서 열리는 교리 관련 토론회에 초대하는 성직자들을 초대하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츠빙글리 역시 이 통지문을 받고 그가 평소에 교회 개혁과 관련되어 정리한 '67개 조항'을 토대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토론회에서 밝혔다. 이후 츠빙글리는 그 해 7월에 ‘67개 조항 해설과 논증’을 세상에 내놓으며 자신의 종교개혁 신학을 한층 심화시켰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츠빙글리의 '67개 조항‘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그는 전반부를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부분(제1-16조항)으로, 후반부는 실제적이고 교회적인 부분(제17-67조항)으로 나누었다. 츠빙글리의 ‘67개 조항’은 중세교회에서 중요시 여긴 교황과 미사와 금식과 연옥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 입장을 담고 있으며, 성서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츠빙글리의 ‘67개 조항’은 종교개혁의 핵심사상인 ‘오직 성경’과 ‘오직 그리스도’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