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교치일(敎恥日)’을 탄식하며
[특별기고] ‘교치일(敎恥日)’을 탄식하며
  • 배현주 교수
  • 승인 2020.08.29 1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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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서 한국 개신교회 지도자들과 대담 중인 문재인 대통령. 출처 청와대

8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개신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청와대에서 간담회를 가졌다. 이 모임에서 문대통령은 신종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정부의 방역 노력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본인이 카톨릭 신자이기도 한 문대통령은 우리나라 발전 과정에서 기독교가 공헌한 영역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구한말 우리나라의 후진적 상황에서 근대교육과 근대의료를 통해 개화에 공헌한 점, 일제 식민지 시대에 실력 양성 운동과 독립운동 등에서 큰 공헌을 한 점, 해방 후에 근대화와 민주화 운동에 아주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점, 또한 우리나라에 복지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던 가난한 시절 민간 복지 분야에서 아주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점, 요즘에도 수해 복구와 성금 모금을 통해서 아픈 국민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고 있는 점, 대다수 교회가 정부의 방역 지침에 협력하면서 비대면 온라인 예배를 통해 코로나 극복에 협력하고 있는 점 등을 자세히 열거하며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문대통령이 문제 삼는 것은 특정 교회(들)의 방역 방해였다. “8월부터 시작된 코로나 재확산의 절반이 교회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이 교회의 이름으로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온 국민이 피해를 입고 있지만 제가 생각할 때 가장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바로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극히 일부의 몰상식이 한국 교회 전체의 신망을 해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이 표현은 지금 교회에 대한 사회 전반의 정서를 객관적으로 반영한다. 작년은 1919년 삼일운동 백주년을 기리는 해였다. 민족의 고난에 희생적으로 뛰어 들어 십자가를 짊어졌던 기독교의 정신을 기리는 해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 해인 2020년 팬데믹 상황에서 교회는 자신의 예배의 권리와 종교적 자유를 위해서 국민들의 건강을 희생시키고 코로나 우울증 시대에 심리적 불안을 가중시키는 세력이 되었다. “그(일부 교회들) 때문에 세계 방역의 모범으로 불리고 있던 우리 한국의 방역이 한순간에 위기를 맞고 있고, 나라 전체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제 한숨 돌리나 했던 국민들의 삶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이 발언에 대해서, 교회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광복절에 개최된 민노총 집회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했는데, 왜 교회만 희생양으로 삼느냐고 해야 할까? 진보·보수의 구태의연한 정치적 진영 논리를 작금의 파국적 상황 앞에서도 교회가 계속 반복해야 할까?

대통령의 발언 중에 더 생각해보아야 할 요소가 있다. “이 방역은 신앙의 영역이 아니고, 과학과 의학의 영역이라는 것을 모든 종교가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방역이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과업인 한, 기독교가 ‘생명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종교인 한, 방역은 신앙의 관심사이다. 생명에 대한 이해, 그리고 생명의 제 차원에 접근하는 방식과 관점에 있어서 종교는 과학 및 의학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다양한 양상을 띠면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저항 혹은 협치로 나타날 수 있다. 때와 시기에 대한 분별력은 이 점에서 ‘범주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이번에 개신교 지도자들이 제안한 ‘정부-교회 협의체'는 협치의 높은 단계를 위한 건설적인 제안으로서, ‘종교 가독력’을 갖추지 못한 정부 소속 공무원들과 함께 국민을 위한 보다 효과적인 협력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문대통령도 이 제안을 환영하며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미 작은 행정 단위에서는 ‘교동 협의회’ 혹은 ‘교구 협의회’라는 이름으로 교회 목회자들과 지역 행정가들 사이의 대화와 협치 구조가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마을목회’ 그리고 ‘선교적 교회’는 이러한 협치를 전제하며 지역에 뿌리내리고자 한다. 교회가 ‘세속사회 속의 초월적 무게중심’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앞으로 보다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협치를 통해서,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교인들과 시민들에게 신뢰와 소통의 모체요 효과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기반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총연합의 공동대표회장이자 예장 통합 교단의 총회장인 김태영 목사의 입장을 언론에서 접하게 된다. 사회와 정부가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지역교회 공동체들의 아픔과 소통하며,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회자적 열정에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 점차 세속화되는 불신앙의 세상 속에서 예배를 고수하는 일은 신앙생활의 전통적인 기본이자 용기 있는 실천이다. 특히 ‘성도의 교제’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이상, 비대면 상황은 낯설고 불만족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지금은 온 국민의 ‘생명 살리기’가 관건인 시점이다. 예장 통합은 ‘생명의 하나님’ 앞에서 ‘생명 살리기 운동 10년’과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 운동 10년’을 핵심 사업으로 해 온 교단답게,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 방식을(롬 12:1) 찾아가면서 한국 개신교의 한 모범을 보여야 할 때이다. 정신과 실천이 빠져 있는 예배를 하나님이 역겨워하신다는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은 잘 알려져 있다(사 1:11-12; 암 5:21-23).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는 말씀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는 말씀 등은 예언서의 대표적인 음성에 속한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구원의 초보교리를 가르치는 과제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제사장적 전통에만 고착하게 되었다. 순교자 스데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는 예언자적 전통을 인용한다(행 7:48). 교회 곧 에클레시아는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을 뜻하지 건물 공간 자체를 뜻하지 않는다. 성서에 대한 편식, 특히 예언자적 전통에 대한 망각 때문에, 개신교의 만인사제설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음식을 소화할 수 있는 평신도 리더들을 배출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기독교(Christianity)가 교회교(Churchianity)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자유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단계를 넘어서서 ‘고귀한 가치를 선택하고 실현하는 자유’일 때 온전한 자유가 된다. 온 국민이 불안해하는 시점에 현장예배 고수를 통하여 종교의 자유를 구가하고자 하는 열정은 다음 세대의 절망과 사회의 불안을 무시하며 발휘되는 ‘몰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기독교 전통에서 목숨까지 바치는 신앙의 절개와 용기는 복음전도, 삼일운동, 독립운동, 신사참배 반대운동, 민주화운동 등에서 발현되었다. 지금도 소명과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희생적’ 삶 속에서 매일의 순교가 일어난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온 국민의 생명 살리기를 ‘선택하는 자유’로 발현되어야 할 때이다.

목사는 예배의 전문가만이 아니라, 사회의 정신적 영성적 리더십이기도 하다. 비신자들조차도 교회에 대한 도덕적 수준의 기대가 높기 때문에 교회가 잘하는 일은 일반 언론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잘못하는 일은 언론이 더 예민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한 종교사회학자의 설명이다. 그래서 지도자들의 공적 발언은 더욱 더 신중해야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시행에도 불구하고 대면 예배를 강행한 어느 지역교회를 섬기는 전도사는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고 진솔한 느낌을 토로하였다. “그나마 저희 교회는 다가오는 주일에는(8월 30일)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기로 했지만, 교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 수도권과 전국 신학생들의 사기 저하와 절망의 깊이, 그리고 자부심의 상실은 심각한 상태이다.

“극히 일부의 몰상식이 한국 교회 전체의 신망을 해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이 지적에는 우리가 숙고해보아야 할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교회론적 문제가 담겨있다. 한국 개신교회는 우리 모두가 ‘개신교,’ 더 나아가 ‘기독교’ 혹은 ‘그리스도교’라는 우산에 함께 속해 있다고 하는 공교회적 의식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아무도 도와주는 손길 없는 광야에서 홀로 개척하며 교회를 성장시켜 온 과거의 역사 때문에 숨이 벅차서 그랬을 수도 있다. ‘개교회주의’와 ‘교회성장제일주의’라는 현실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서적 신학적 가치관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오백 년 전 유럽의 카톨릭이 타락했을 때 종교개혁을 일으킨 종교개혁자들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던 것이지 교회의 일치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자들의 교회가 결국 카톨릭에서 분리되었지만, 루터의 종교개혁 오백주년을 기리는 2017년, 독일의 개신교는 카톨릭과 함께 교회 분열에 대한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분열된 세상 속에서 함께 화해와 일치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 교회론적 과제를 수용한 것이다. 카톨릭은 이제 루터를 저주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그를 복음의 종으로 인정한다.

사회는 한 지체가 아프거나 기쁠 때 한 몸 된 교회가 다 함께 아프거나 기쁜 것이라는 성경 구절을 굳이 몰라도, 교회 일부가 크게 잘못한 것에 대해 개신교 지도자들이 책임 의식을 가지고 대국민사과를 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총연합은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방역을 잘하는 교회를 분별해 예배를 허용하는 형태의 ‘교회 인증제’를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 배후에는 큰 충격을 받은 작은 교회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려는 지도자들의 ‘대교회적’ 책임감이 놓여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 대해 일률적 조치를 취하지 말고 옥석을 구분하라는 요구 배후에는 그동안 당연시 하고 살아왔던 ‘개교회주의’가 큰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사회적’ 국면에서 개신교라는 집단 인격이 감염 예방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적 대응의 중요성이 피부에 와 닿지 않은 것 아닌가 되묻게 된다.

필자 역시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 한다. 3월에 WHO와 WCC가 공동 주최한 줌 회의에 초청받았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방역에 임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교회가 세계 각처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가짜뉴스를 피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 주어졌다. 당시 ‘은혜의 강 교회’에서 목회자가 교인의 입에 소금물 스프레이를 뿌려 감염을 확산하게 되었던 사건이 있었는데, 그 장면은 외국 언론에도 알려지게 되었었다. 두 번째 질문 배후에는 이 사건이 놓여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필자는 성공회, 감리교, 기장, 예장 통합 등 WCC의 네 회원교단 소속이 아닌 어느 지역 교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한국 개신교’라는 한 우산에 속해있다는 사실로 인해 국제 네트워크 앞에서 책임적 발언을 하도록 요청받은 셈이다. 당일 억울한 심정도 들고 골치도 아파서, WCC 회원교단 소속 교회 문제도 아닌데 왜 내가 국제적 발언대에 서야 하는가 하는 궁색한 반론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쳤던 기억이 난다.

교회의 일치는 단순히 시대적 필요에 따른 실용적 과제가 아니라 성서적 교회론의 근본이다. 그러나 ‘젊은 교회’인 한국교회에는 개교회의 성장이 더 급하고 중요한 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기 높은 안목을 지닌 교계 리더십들은 WCC, WCRC, CCA 등 국경을 넘어 교회의 일치 비전에 헌신하는 에큐메니칼 기구에 우선 참여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국에 파송된 해외 선교사들은 교단주의를 뛰어 넘어서 1924년 10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조직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NCCK의 출발점이다. 한경직 목사의 ‘에큐메니칼’ 입장이 새겨져 있는 영락교회 기도원의 바위는 예장 통합의 기본 정신의 상징이다.

교회의 일치는 인류의 일치 그리고 피조세계의 일치를 예시하는 고귀한 비전이다. 한국 교회가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평화통일 운동을 추진하는 것이 아쉽다는 세계 교회의 시선을 접하기도 한다. 팬데믹 기간 충격적 사태로 망연자실한 개신교에서 교회의 일치라는 성서적 정신과 비전에 대해 숙고하는 계기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는 ‘양적 성장’ 파라다임에서 ‘질적 성숙’ 파라다임으로의 전환의 마중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의 근본원인이기도 한 기후붕괴라는 인류의 대재난 앞에서, 교회의 일치는 앞으로 정부 및 시민사회와 집단지혜를 모아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과제에도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문대통령도 지적한 한국 개신교의 소중한 전통을 자신의 영성적 정신적 유산으로 알고 오늘날에도 최선을 다해 교회와 사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2020년 8월 15일과 8월 27일은 ‘교치일(敎恥日)’이다. 한국교회가 맛 잃은 소금 같이 사람들 발에 짓밟히게 된 ‘교회 수치의 날’이다. 그러나 잘못과 실패에서 ‘배우면’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는 점을 역사는 보여준다. 세계를 선도했던 정부의 ‘K-방역’의 성공은 메르스 초기 대응의 실패에서 철저히 배우고 교훈을 얻었던 의료계 지도자들의 소명감과 겸손에서 비롯했다. 시편의 탄식시의 전통은 고난의 시기에 우리 내면의 자양분이다. 동시에 신앙인은 혼란과 참회의 시간에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기도하게 된다. 이러한 기도의 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롬 8:28). 어거스틴은 “사랑하라. 그러나 네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조심하라”고 경고하였다. 교회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홀로 그리고 더불어 물어보아야 할 때이다.

배현주 교수 
(전 부산장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WCC 중앙·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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