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신학이라는 말은 생소하지만 매력적이다. 사진에도 신학이 있을까? 그렇다면 사진에 담긴 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만약 사진에 신학과 신앙이 없다면 그저 한 장의 딱딱한 종이 쪼가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혹은 검지로 휙 날려버리는 그저 지나가는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에 신앙과 신학이 있다는 것은 사진 한 장에 한 사람의 숨결이나 한 세대의 생명이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은 어떻게 신학적 의미를 부여받고, 신앙적 생명을 얻고, 창조적인 힘이 될 수 있을까? 사진의 신학은 도대체 무엇인가? 백승균 교수는 『사진 철학을 만나다』 (북길드, 2014)에서 사진과 사람의 관계, 나아가 인간 의식과 사진의 관계에 관해 ‘사실의 사진’, ‘의미의 사진’, ‘의식의 사진’으로 분류해서 설명하고 있다(26-37).
여기 <둘째 딸 희진이의 패션쇼>(2017)라는 연작 사진이 있다. 사랑하는 7세 딸의 패션쇼를 아빠인 내가 찍은 사진이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사진이다. 그리고 이 사실에는 패션쇼를 가능하도록 만든(옷을 입혀준) 언니 희주가 있고, 또 이 모습을 찍은 아빠가 있을 것이다.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언니와 아빠 모두가 이 사진의 완성자가 될 것이다. 이처럼 사진은 사실의 기능을 한다. 사진-신학의 지평도 마찬가지다. 사실의 사진은 사실의 신학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의 신학은 단순히 교리를 주입하는 신앙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교리에 그 교리를 가능하게 한 사람들, 그리고 그 교리를 완성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성령의 역사 아래. 그러나 사람들의 이해 지평(곧, 의미)이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사실의 사진은 의미의 사진으로 넘어가고, 사실의 신학은 의미의 신학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딸 희진이의 패션쇼>라는 사진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해의 지평, 곧 의미는 어떻게 가능할까? 희진이의 패션쇼는 아빠의 사랑이, 언니의 정성이, 그리고 주인공 희진이의 애교가 의미 놓여져 있다. 이것은 배고파도,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웃음을 짓게 만드는 ‘아빠인 나의’ 의미의 차원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나에게 새로운 의식의 지평을 열어준다.
이렇게 사진이 사실을 넘어 의미를 창출하고 새로운 의식을 개막시키듯, 신학 역시 교리라는 사실을 넘어, 해석학적 의미를 창출하고, 마침내 새로운 신학적 의식의 지평을 열 때, 사진과 신학은 만나고 사진-신학의 사명은 완수될 것이다. 결국 의식의 사진은 목회와 신학의 사명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일찍이 “사진은 아우라를 재현할 수 없다.”라고 말한 발터 벤야민(W. Benjamin)은 이렇게도 말했다. “20세기의 문맹은 사진을 모르는 사람일 것”, 그러나 (필자의) 사진-신학은 이렇게 말한다. “21세기 신앙인과 신학은 사진 속에서 신학적 의미를 읽고, 의식의 지평을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