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앞에 단독자’, 키르케고르를 온라인에서 만나다
‘신 앞에 단독자’, 키르케고르를 온라인에서 만나다
  • 정성경 기자
  • 승인 2021.10.22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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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시험을 위하여’를 텍스트로

줌으로 12회차 연구 과정 시작해

“그는 철학자 아닌 시대의 예언자,

책망받는 한국교회 위기감 느껴

교회 바로 서기 위해 방향 제시”

하늘은 깊어지고 생각도 깊어지는 가을. 지난 5일부터 온라인으로 키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 연구과정이 오픈했다. 실존주의 사상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종교사상가로 유명하다. 키르케고르의 작품 중 [자기 시험을 위하여]를 기본 텍스트로 매주 화요일 12회차 강의를 진행하는 이창우 목사에게 ‘왜 키르케고르인가?’ 물었다.

-왜 키르케고르인가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키르케고르가 필요한 이유는 키르케고르만큼 그 당시 덴마크 교회의 문제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도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복음이 전파된 이후 어느 때보다 위기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황이 역전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교회는 세상을 향해 정신 차리라고 책망했으나, 현재는 세상이 교회에게 정신 차리라고 책망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키르케고르는 교회의 변질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예언자’였습니다.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니라 경영학의 석학이었던 피터 드러커가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읽은 후에, “철학자로 알려진 키르케고르는 철학자가 아니라 그 시대의 예언자”라고 말했습니다.

1800년대 덴마크 사회는 전체가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의 승리를 자축하며 더이상 핍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때, 키르케고르는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된 이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오신다면,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요? 초대 교회 당시에는 핍박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인이 많아진 오늘과 같은 시대는 핍박이 없는 걸까요? 키르케고르는 오히려 전체 사회에 기독교가 된 덴마크에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나타난다면 더 끔찍한 핍박을 당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전체 사회가 기독교가 된 덴마크에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복음이 필요한 곳은 기독교 밖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 안에 다시 한번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의 말처럼 오늘날 한국교회에 다시 한번 진실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줌으로 키르케고르 연구과정을 오픈한 이창우 목사. 출처 카리스아카데미

 

-키르케고르를 연구할 때 핵심 키워드가 있다면?

키르케고르를 언급하면 윤리 책에도 등장할 만큼 잘 알려진 용어가 있습니다. “신 앞에 단독자”라는 말입니다.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아무도 모르는 용어가 ‘단독자’라는 말입니다. 또한, 키르케고르가 평생 좋아했던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아마 이 용어들만큼 잘 알려지면서도 가장 해석이 안 되는 용어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합친 말이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라는 말입니다. 윤리 책에서는 기독교적인 용어인 ‘하나님’을 빼고, 이 말을 “신 앞에 단독자”로 바꾼 겁니다.

이 용어를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기독교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핵심적인 개념이 “죄”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란 법적인 죄도, 윤리적인 죄도, 심지어 양심의 죄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만 드러나는 죄”가 있는데, 바로 이 죄가 기독교가 말하는 ‘죄’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몇 가지 문제점이 생깁니다.

첫째,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엄밀한 의미에서 이방인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하나님 앞에서 서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죄’의 개념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둘째,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세상에서 죄를 발견하기란 극히 드물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 역시 더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조차 제대로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마치 하나님이 친구처럼 언제나 동행하며, 모든 갈 길을 안내하는 수호천사같이 둔갑해 놓은 신학은 전부 말씀을 왜곡시켰거나 ‘하나님 앞에서’라는 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발견되는 죄는 어떤 죄일까요? 법적인 죄나, 윤리적인 죄 혹은 양심의 죄가 인간에 가하는 형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죄가 가혹한 ‘내적 형벌’을 가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말하고자 하는 본래적 절망입니다. 그에 의하면, 이 절망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절망의 강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간단하게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물론, 그에게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단독자”라는 말은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간단하게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하면 아브라함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그토록 강조했던 키르케고르가 아브라함을 지나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책 공포와 전율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장면 하나로 두꺼운 책을 쓴 겁니다. 그는 이 책에서 단독자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은 윤리일까요, 폐륜일까요?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윤리입니까,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죽이는 것이 윤리입니까? 오늘날 종교적인 이유로 자식을 제물로 바쳐 죽였다고 뉴스에 나면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단은 ‘윤리 밖에서’ 감행한 행동이었다는 겁니다. 윤리란 ‘의무 규정’입니다. 다시 말해, 윤리는 일종의 그릇이고, 윤리의 내용이 의무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단은 윤리적 범주 아니라 윤리 밖에서의 어떤 의무에 의해 감행한 행동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윤리가 충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혹이란 윤리를 지킬 것이냐, 자신의 욕망을 따를 것이냐의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하지만 영적 시험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키르케고르는 영적 시험이란 윤리를 따를 것이냐,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이냐의 사이에서의 충돌이라 말했습니다. 이때, 그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 결단을 감행할 때, 그는 다른 누구하고도 상의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 영적 시험에 대해 아내와 상의를 했다면? 누군가 회의를 통해 이 행동을 감행할지 논의했다면 그는 과연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윤리 밖의 어떤 의무로 인해 결단하는 것이므로, 윤리적 범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 그는 온전히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간단히 설명하자면,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키르케고르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는 가명의 사상서와 자신의 이름으로 낸 강화가 있습니다. 강화는 전부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론에 해당합니다. 그렇기때문에 목회자나 성도들이 그의 강화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강화는 아직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대로 소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별로 인기도 없고 판매도 저조하지만 사명감을 갖고 번역 출판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책을 내준다는 곳이 없어 직접 1인 출판사를 설립하고 출판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가 “강화”라 말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야기가 설교의 권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사실 읽다보면 어떤 설교보다 더 확실한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의 강화의 핵심은 “제자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본받음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본회퍼의 제자도가 얼마나 키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이미 학계에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동안 제자도에 대한 다양한 이슈가 있었으나, 그동안 제자도를 언급했던 사상가들과 키르케고르를 비교해보면 더욱 키르케고르의 통찰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창우 목사

º 한국침례신학대학원 신학, 종교철학 석사

º 현 카리스 아카데미 대표

º 현 카리스 교회 담임목사

저서: 《창조의 선물》

역서: 《자기 시험을 위하여》, 《스스로 판단하라!》, 《이방인의 염려》, 《고난의 기쁨》, 《기독교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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