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날, 특별 인터뷰] 정장복 명예총장, “설교자들은 끝까지 ‘聖言運搬一念’으로”
[스승의날, 특별 인터뷰] 정장복 명예총장, “설교자들은 끝까지 ‘聖言運搬一念’으로”
  • 정성경 기자
  • 승인 2020.05.15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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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교육에 대한 A/S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정장복 명예총장이 2013년 예배와 설교 멘토링 센터의 문을 열면서 했던 말이다. 25년 동안 장신대 교수로, 8년간 한일장신대 총장으로 봉직하면서 한국교회의 예배와 설교 분야의 초석을 놓은 그다. 여전히 그의 컴퓨터에는 수백편의 새로운 원고와 설교문들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제자사랑은 만난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2002년 정 총장이 회갑을 맞았을 때 조선대 김수중 교수를 비롯한 다일교회 최일도 목사, 강서교회 김안식 목사, 새문안교회 이청근 목사 등이 ‘언제나 푸른 바다처럼’이라는 문집을 엮어 선물하기도 했다. 많은 제자들이 기억하는 그의 말 중에 “내가 은퇴하면 와룡선생이 되어 제군들 목회현장에 예고 없이 찾아갈 거야. 그때 만약 잘못하고 있으면 혼날 줄 알아!”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챙기셨던 예수님처럼, 살아생전에 마지막까지 스승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예배와 설교 멘토링 센터에서 제자들의 설교를 꼼꼼하게 살피는 정 명예총장을 만났다. 평생 신학자로, 교육자로 살아온 그에게 이 시대의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예배와 설교 멘토링 센터에 걸린 ‘성언운반일념(聖言運搬一念)’과 정장복 명예총장. 정성경 기자

 

모일 필요가 없는 신무교회주의 등장

신앙생활의 모체는 모이는 교회

-먼저 상투적이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예배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코로나 이후의 교회가 많이 염려된다. 핵심적인 염려는 대면의 필요성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1960년 중반에 토론토대학의 마셜 맥루한 교수가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Message)’라는 말을 했는데, 그는 면대면(face-to-face) 시대, 얼굴과 문자(face-to-letter), 얼굴과 전자기기(face-to-electronic)를 말했었다. 지금이 그런 시대다. 어디든지 스마트기기를 들고 다니다. 신문을 들고 있던 모습은 사라졌다.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예배에도 그런 시대가 오면서 구체화 되고 있다. 즉 대면 없이 예배가 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해보니까 편하다. 교회 가려고 남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예배가 정착될 가능성이 많아지다보니 말한 것이 신무교회주의다. 같이 모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이기에 힘쓰지 않으면 교회는 그만큼 응집력 결속력이 떨어져 파워풀한 모임이 될 수 없다. 흩어진 교회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나오는데 흩어진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말과 같다. 흩어짐의 다음 단계인 사라진다는 말은 무형이 되버리고, 교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서운 거다. 지극히 보수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모이는데 힘쓰는 한국교회의 특성이 살아나야 된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를 맞아 TV에 중계를 통해 다른 설교를 보게 되면서 우리교회 목사와 비교하게 된다. 소위 내 교회 목사 설교에 대한 가치성, 실력과 모순이 드러나면서 내 목사를 더 사랑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흩어지는, 내 교회라는 한 집단의 중요성이나 가치성이 뚝뚝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무형의 정체성은 유형의 정체성을 따를 수 없다. 사람이 집결되어 있는 파워와 상상으로 집결되어 있는 파워는 차이가 크다. 이러한 현상이 정착되면 성도의 교제, 기독교의 정체성 같은 것이 약해지면서 교회의 허약함이 하나하나 드러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신앙은 자극(stimulation)을 받아야 된다. 핍박, 아픔, 고통이라는 자극을 받아야 된다. 이런 것들을 육신은 싫어하지만 이를 통해 다시 소생된다.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든, 만남을 통해 자극이 되어야 신앙생활의 동기유발이 되는데 그런 것들이 없어 걱정이 된다.

요즘 젊은 목회자들 중에 남들이 안하는 새로운 말을 하는 것으로 인기를 얻곤 하는데, 그중에 어떤 분이 온라인으로 성찬식을 대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봤다. 이번 코로나를 당하면서 우리는 개신교만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종교가 로마카톨릭이다. 그들은 성체성사를 전파로 띄운다든가 이름을 써낸다든가 대체할 길이 없다. 직접 받아서 직접 먹어야 된다. 그것이 예배의 축이었는데 그 축을 이번에 정지시킬 때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나. 우리는 말씀을 축으로 삼았으니까 그런데도 지탱이 됐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동정을 많이 해줘야 된다. 카톨릭이 263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생각했다.

초대교회에 예배의 모습은 성체성사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설교가 없었다. 그 다음에 설교가 들어왔다. 그러다가 500년경부터 설교가 사라지고 성찬성례만 남는다. 1517년 루터가 등장하면서 성체성사와 설교가 회복됐다. 그것을 같이 동조한 곳이 성공회다. 그런데 그 후로 츠빙글리의 개혁교회가 나오면서 성찬성례전을 1년에 4번으로 하고 그 자리에 설교만 넣었다. 완전히 거꾸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15년 후에 칼빈이 나와서 개혁교회가 잘못됐다고 매주 성찬성례전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악마의 농간이라면서 회복하려고 하다가 제네바 종교개혁 때 쫒겨 났다. 1965년 제2바티칸 공회를 나는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성찬과 말씀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래도 설교는 우리로 치면 부목이 하고 성체성사는 원목이 한다. 그러던 것을 코로나가 못하게 막았으니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나.내용을 입력하세요.

-총장님께서 기고글을 통해 신무교회주의와 한국교회의 5가지 특성을 설명하시면서 원동력이라고 하는 ‘모이는 교회’가 약해졌음에 한탄하셨습니다. ‘흩어지는 교회’를 강조하고, ‘삶의 자리에서의 예배’를 강조하는 상황에서, 이 시대의 교회와 예배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신앙생활에 있어 그 모체가 있어야 된다. 예배당에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가시적인 교회의 예배가 있으면서 예배가 생활화로 들어갔을 때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다. 그런데 모체가 살지 못하면 지체는 사라진다. 그런데 지체만 강조한다? 사라지는 것은 약해지는 거고 없어지는 거다. 모체와 지체의 관계로 보면 좋다. 모체가 튼튼할수록 지체도 더욱더 확산되고 강해진다.

지금까지 잘해왔다. 한국교회의 5대 특성 중 가장 으뜸가는 것이 모이는데 힘쓰는 교회다. 모임의 주목적은 예배다. 단회적인 예배로 부족하니까 찬양예배, 기도회, 금요기도회, 새벽예배가 있는 것이다. 서구처럼 단일예배로 만족할 수 없어 더욱더 모이기에 힘썼다. 두 번째 특성이 성경공부인데, 혼자 독학이 아니라 소위 예배당을 중심으로 함께 모여서 이뤄졌다. 예배당은 교회의 센터로 교인들의 거주지다. 세 번째, 전도의 열정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이다. 흩어진 교회에서도 가능하지만, 전도의 열정은 모체에서부터 함께 훈련을 받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방법론을 구상하면서 나가는 것 하고 혼자 하는 것하고 차원이 다르다. 네 번째로 기도하는 교회다. 흩어진 교회에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이 특성, 새벽기도회 등에서 보여준 기도의 열정은 한국교회의 큰 특성이다. 이게 중요한건데 혼자 하는 기도와 함께 모여서 하는 기도는 다르다. 초대교회도, 평양의 부흥운동도 다 모였을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 난거다. 기도를 위해서 함께 모이는 거다. 기도의 열정이 우리는 독특한데 이것이 식어지면 안된다. 마지막으로 십일조다. 한국교회의 파워는 실제적으로 십일조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오랫동안 선교하면서 봐왔던 마펫 박사가 정리한 내용이다. 한국교회가 선교할 수 있는 힘이었다. 신앙은 급조된 신앙이 있고 전통된 신앙이 있는데, 십일조는 뿌리가 있는 신앙의 행위지 급조된 신앙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 때문에 구원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 깊이 있게 들어가다 보면 내려왔던 뿌리를 지키는 아름다운 생활의 미덕이다. 육신의 생활을 확장시키고 싶어서 십일조가 끊어진 것이지, 영혼의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십일조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사람

인성, 지성, 영성의 '3륜 신학' 필요

-총선이 끝났습니다. 교계에서도 정치적 이념으로 갈등을 빚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목회자의 정치 참여를 어떻게 보시는지?

인간이 사는 사회 속에는 특별히 정치적인 이슈가 나왔을 때 찬반이 없다면 민주사회가 아니다. 한명의 시민으로서는 찬반을 마음대로 표현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러나 목사가 강단에 서면, 일개 시민이라는 신분은 맞지만 시민으로 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기 위해서 선 존재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도구로 서있는 순간이다. 그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와 비(是非)는 가릴 수 있지만 자신이 정치적으로 어디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쉽게 말하면 나도 개인적으로는 정치적인 성향을 마음껏 드러낸다. 하지만 공적으로 섰을 때 전혀 내 색깔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야 하나님 말씀만 보인다. 하나님에게는 여야가 없다. 그런데 인간은 갈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목회자는 열심히 들어줘야 된다. 여야의 말을 들어주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만약 한쪽을 당선시켜 달라고 기도한다면 편협 된 한 시민으로서의 말일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오직 말씀으로 정직해라, 진실해라, 부정을 범하지 말라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서로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라고 원칙론을 얘기해야 한다. 오직 성경으로, 성경의 말씀대로 전해야 한다. 동성애 같은 경우엔 진보와 보수의 선을 가지고 평가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것이 죄냐 죄가 아니냐 말해야 한다.

-목회자 자질에 대한 성토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계가 늘 가지고 있었던 고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이고 더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잣대보다 높은 수준의 것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현 목회자들의 교육 시스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어떤 변화가 있어야 된다고 보시는지요?

인성, 지성, 영성 이렇게 ‘3륜 신학’이라고 한다. 맨 앞에 바퀴가 인성이고, 지성과 영성이다. 셋 중에 하나만 바퀴가 작다든가 천천히 구른다던가 하면 앞으로 가지 못한다.

목사가 비정직한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런데 그 양심이 정직성을 잘 유지해나가다가 한번, 두 번, 세 번 무너지면 양심이 무뎌진다. 그것은 인성으로부터의 탈선이다. 솔선수범, 희생봉사, 모든 정직한 충성심이 인성에 속한 거다. 그 인성에 대한 신학교육이 부족하다. 인성이 먼저 잡혀야 한다. 인성은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거다. 정직, 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등 모든 게 다 들어가지 않나. 그다음에 지성이다. 지성과 영성의 바퀴가 크기나 속도에 있어 꼭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지성과 영성에 균형이 안 잡힌다. 한권의 책이라도 열심히 보고 지적인 바퀴를 키워야 되는데, 많이 부족하다. 그 부족이 느껴질 때 바로 보충하면 좋겠는데 보충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표절이 나온다. 얼마나 비극인가. 그러면서 영성만 강조한다. 기도만 강조한다. 만사가 다 기도다. 그러니까 지적인 부족한 것을 채울 생각은 하지 않고 영성으로 커버하려고 한다. 이것이 목사들의 모순이다. 영성의 무기가 기돈데, 기도하지 말란 말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만큼 지적인 바퀴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얘기다.

현재 신학교는 3바퀴의 균형을 잡기엔 짧다. 키우다보니 6학기 금방 지나간다. 가면 갈수록 목사 되는 것이 어려워지도록 하는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

카톨릭 교회의 목사 안수식을 서품식이라고 하는데 몇 년에 한 번씩 잠실체육관에서 할 때 가서 본적이 있다. 하얀 옷 입고 십자가를 몸으로 그리면서 그 장시간을 엎드려서 하더라. 물론 형식이지만 절대로 필요한 형식이다. 예를 들면 개신교 목사들은 성찬식 하는 것을 한 번도 연습 안하고 바로 성찬식을 한다. 예배학 과정도 없다가 80년대 한국에서 예배학 과정을 강조하다고 주목을 받게 됐다. 천주교 신부들은 신부가 되기까지 연습을 천 번을 한다고 한다. 그렇게 기간이 길어야 한다. 하나하나 훈련을 완벽하게 해줘야 되는데 우리는 대강 원칙만 알려주고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한다.

세상은, 세속은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이나 다 발전하고 있다. 어떤 것은 후퇴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변화의 바퀴가 돌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신학교육은 똑같다. 교수로 재직 시, Th.M 과정을 하는 학생들을 1박2일 동안 소록도를 데리고 간적이 있다. 나환자들의 식사를 나르고 부엌 청소하는 것을 시켰다. 갔다 와서 반응이 “이제야 신학생으로서 훈련을 받은 기분”이라고 했다. 그만큼 우리는 강의실에서 말만하고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 3년이 충분할 수가 없다. 세상이 이렇게 변화가 무서운 만큼 이것을 정복할 수 있도록 신학생을 무장시켜야 되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험한 전투장이 전개되면 그것을 압도할 수 있는 무기 계발이 되어야 하지 않나. 가면 갈수록 안 되고 있다.

정장복 명예총장이 설교자들에게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성언운반일념(聖言運搬一念)’. 정성경 기자

 

설교의 4가지 폴더를 골고루 열어야

‘성언운반일념(聖言運搬一念)’을 절대 잊지 않길

-지난 해 ‘설교는 만나이다’라는 책을 출판하셨는데, 현 시대의 목회자들 설교에 강점과 약점이 있다면? 그리고 꼭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다면?

설교에는 4가지의 큰 분류, 폴더가 있다. 첫째는, 선포적인 설교(KerygmaticPreaching)이다. 일명 전도설교라고도 한다. 영혼구원과 직결된 것이다. 둘째는, 교훈적인 설교이다. 교육이 목적이다.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무엇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이다. 셋째는, 목양설교이다. 일명 치유설교라고도 불리는 이 설교는 상처받은 심령들을 위로하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넷째는, 예언적인 설교이다. 예언적 설교는 개인들의 죄와 모순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권력의 탈선과 부조리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과 메시지를 담는다.

그런데 설교자에 따라서 교단에 따라서 설교들이 치우쳐 있다. 이 균형을 잡아줘야 된다. 설교가 폴더가 각각 다르니 한 폴더만 열지 말고 설교를 영양소마냥 골고루 섭취하게 해야 한다. 시대에 따라 강조하는 것이 다른데, 그런 면에서 교단이 참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교단이 형성됨으로 그것을 제시한 것 같다. 나는 다양성 속에서 살찌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예배설교학 신학자로서 현재 신학을 공부하는 후학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예배설교학은 Preaching in the Context of Worship이다. 예배 안에서의 설교다. 예배를 모르면 설교가 안되고, 설교만 알고 예배를 몰라도 안 된다. 우선, 내 분야를 도전하고 싶은 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먼저 목사의 기능에 대해 생각했으면 한다. 기름부음 받았다, 안수 받았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섬기는 존재다. 백성을 섬기는 존재, 제사장, 선지자다. 선지자는 말씀의 종이고, 제사장은 예배의 종이다. 말씀과 예배와 섬김, 여기에 대한 자기 정체성을 갖추고 해야 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나는 과연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 어떤 자세를 갖춰야 되는가. 거기에 한마디 한다면 성언운반일념(聖言運搬一念),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운반하겠다는 자기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의 종으로서의 정체성이 잡혀야 된다.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성, 지성, 영성을 꼭 갖춰야 된다.

예배는 조금 무거운 얘기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예배에 초점이 있어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 교인들이 좋아하느냐, 교인들의 즐거움을 찾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그런데 거기에 초점을 두는 사람이 있다. 그건 아니다.

시대와 상황은 변하지만 설교자라면 ‘성언운반일념(聖言運搬一念)’을 절대 잊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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