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자유를 달라
[전문가 칼럼] 자유를 달라
  • 남금란 목사
  • 승인 2024.02.27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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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보호시설에 오신 할머니로 햇살 님이라 불리는 분이 계신다. 처음 이곳에 오셨을 때 심한 폭력 후유증으로 구타당하는 공포 때문에, 매일 구타당하는 기억의 고통에 시달리며 공황 장애가 있었다. 갑자기 목이 조여와 죽을 듯한 공포로 문밖으로는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작은 소리 하나에도 화들짝 놀라곤 하셨다. 길을 가다가도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미행한다는 생각에 주변을 몇 번이고 확인해야 했다.

칠십여 년 전 햇살 님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가 음력 설날이었는데 딸이 정월 초하루에 태어나 재수가 없다며 아버지가 그 전해 섣달그믐날로 생일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처럼 햇살 님의 인생은 출생에서부터 존재의 무게란 없었다. 그믐날 생일이 자신도 편하다 하실 만큼 단 한 번도 자신의 목소리나 주장을 드러내질 못하고 살아오셨다. 모든 일상에서 자신이 받는 그런 처우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나, 늘 불안과 우울감으로 갖가지 통증에 시달리셨다. 자신이 심부름센터 고용인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청부 살해를 당하는 것으로 남편과의 인연이 끝날 거라는 생각을 돌이킬 방도가 없어 결국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바꿈으로써 그 두려움이 다소 해소되었다.

시설에 오신 할머니들끼리 언니, 동생 부르면서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나들이를 다니시곤 했다. 꽃 피는 계절에는 꽃구경을, 가을에는 단풍과 함께, 해가 비치면 해를 받으며 바람 불면 바람에 실려 우리 가족들은 숲과 강, 산과 바다로 다니며 고구마나 나물을 캐고, 밤을 줍거나 조개나 바지락을 캐곤 했다. 시골에서 자란 햇살 님이 자연 속에서 고향을 찾은 듯 기뻐하셨고 기억에 맑은 물을 붓듯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셨다. 날이 갈수록 이분의 얼굴이 정말 햇살처럼 환해지셨다. 나갔다 돌아오시면 이렇게 일기를 쓰곤 하셨다.

나는 걸어본다. 아무 생각이 없다. 활짝 핀 들꽃이 나를 반긴다. “아∼너 지금 어디 가고 있어?” 하고 들꽃이 말을 건넨다.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응, 너 보러왔어.” 하고 말한다. “너 참 예쁘다. 나도 너 같은 시절이 있었지.” 하고 웃어본다. 나도 이제는 꽃길만 걸으리라.

아침에 일어나면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동네 개천길을 걸으시다가 돌아오면 성경을 조금씩 적어가기도 하셨다. 있는 듯 없는 듯 공기처럼 사람들 틈에 스며들어 시설 가족들을 조용히 돕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어머니처럼 먹이곤 하셨다. 그러다 정해진 퇴소일이 가까워지자 다시 불안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폭력 남편이 찾아올까 봐 혼자서는 무서워 잠을 못 이루는 병이 재발하였다.

마지막 집단 상담에서 역할극을 하다가 이분이 용기백배하여 “나에게 자유를 달라. 나도 사람이다. 여자라고 사람이 아니냐! 내 원대로 살고 싶다.” 하시며 소리치더니 “어휴, 시원하다. 저 이제 나가서 살 수 있어요.” 하셔서 절로 나오는 박수로 가족 모두 큰 응원을 보내드렸다. 이 세상을 오셔서 처음으로 당신이 바라시던 자유의 삶을 끝내는 선언한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직면하고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용기’일 것이다. 나는 그날 햇살 님의 눈과 입과 온몸에서 터져 나오는 그것을 보았다.

햇살 님이 원래 우울증을 뱃속에서부터 달고 나온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딸로 태어나신 분임을 나는 확신했다. 이분도 자신이 잘하는 것이 있고, 또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분이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분이 아니며 존재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딸’이다. ‘자유를 달라’라는 이 절규는 비단 프랑스혁명 시대로 끝난 구호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누구에게는 목숨과도 바꾸고 싶을 만큼 절절한 외침이었다. 결국 이 자유는 남편이 준 것도 세상이 준 것도 아니라, 고통의 삶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자신 안의 빛에 의해 햇살 님 스스로 발견한 것이었다.

햇살 님은 퇴소 후 자녀들이 사는 곳 주변에 작은 방을 얻어 지내셨다. 이곳을 떠난 이후 햇살 님은 이따금 이 동네가 그립다며 오셔서 “잘 살고 있답니다”라는 짧고 조용한 한마디로 미소를 지으셨다. 얼마 안 있어 어느 추운 동짓날, 햇살 님은 주무시면서 조용히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 비록 본인은 어려운 인생길을 걸으셨지만, 그 누구에게도 상처나 아픔을 주지 않고 살다 간 분이다. 이곳에서의 짧은 1년, 떠도시다 잠시 머문 쉼터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행복하셨다. 이름 없이 들꽃처럼 살다 가신 햇살 님을 기억하면 풀꽃 같은 우리네 삶이 햇살을 받은 듯 따사롭다.

가정폭력긴급전화 010-5346-6933

남금란 목사<br>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 원장<br>​​​​​​​예목원 연구위원<br>
남금란 목사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 원장
예목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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