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신대 신재식 교수 진화론 주장은 이단 사상, 장신대 윤철호 교수도 진화론 주장
호신대 신재식 교수 진화론 주장은 이단 사상, 장신대 윤철호 교수도 진화론 주장
  • 엄무환 국장
  • 승인 2021.12.1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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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정환 목사(전 예장통합 총회정치부장) 

“예수와 다윈의 동행”은 불가능하다.

명실상부 한국기독교 유신진화론자들의 대표신학자로 유명한 신재식 호신대 교수가 쓴 ‘예수와 다윈의 동행’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신재식 교수 저, 예수와 다윈의 동행
신재식 교수 저, 예수와 다윈의 동행

이 책이 출간된 지 오래되었지만 신 교수의 주장에 대한 논란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6개월 전, 장신대 윤철호 교수가 한국조직신학논총(2018)‘에 기고한 ’창조와 진화‘를 읽은 후, 필자는 생각보다 한국교회와 사회에 소위 유신진화론 사상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윤철호와 신재식, 유신진화론자들

그런 와중에 윤철호 교수보다 더 적극적으로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 신재식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이들 유신진화론자들의 주장이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특별히 우리 예장 통합 신학도들을 영적으로 오염시키는 문제를 조금이나마 막아보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한 마디로 신재식 교수의 ‘예수와 다윈의 동행’은 진화론에 ‘신’의 존재를 부가한 유신진화론의 주장으로 신학도 과학도 아닌 진화론의 가설과 추론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 신앙을 해체하는 반기독교 서적이라고 평할 수밖에 없다.

신재식교수의 저서는 반기독교적 서적

신재식은 진화론을 거부하는 한국교회를 완고한 ‘반지성주의, 반과학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신재식 교수야말로 어설픈 지식인이며 과학이 무엇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신학자”라고 하였지만 신학자가 아닌 진화론의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신재식 교수(이하 ‘신재식’)의 노력에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면, 다윈의 진화론을 과학으로 전제하고 인류 역사에, 특별히 ‘진화론이 과학의 발전에 미친 영향과 앞으로도 미치게 될 영향을 고려할 때 기독교계도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으면 더이상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진화론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진화론을 과학으로 인정하고 진화에 기초한 기독교 신앙 성립을 위해서 ’진화론적 유신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신재식은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며 기독교와 진화론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한 결과 과학의 시대에 종교는 과학, 진화론의 성과를 읽고 받아들여 종교, 특히 기독교 신학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기독교가 현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런 진단을 전제로 그는 일반적으로 서로 조합될 수 없는 기독교와 진화론 당사자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의도로 ’예수와 다윈의 동행‘이라는 주제를 표제로 삼았다.

우선 그는 진화론이 과학임을 전제로 예수로 상징되는 종교(기독교)와 과학의 동행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신학은 언제나 새로운 시대 상황과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워져야 했다”고 전제하고 “과거의 지식에 근거한 신학이나 설교를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오해와 불신과 적대감”만을 낳으며 “한국교회 전체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춘” 아주 중요한 이유가 바로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대해 무관심한 “한국교회 안에 만연하고 있는 비 지성주의와 반과학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신재식은 “진화론은 현대과학의 토대이다” 그러므로 “현대과학에서 진화를 뺀다면 더 이상 과학 작업을 진전시킬 수 없을 정도”라고 주장한다(p.35) 그리고 진화론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역사에 등장한 많은 진화론자들과 특히 기독교 신학자들의 주장을 열거하며 진화론을 변증하고 있다.

’예수와 다윈의 동행‘을 가능하게 하려면 진화론이 과학임을 입증해야 한다.

신재식의 주장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한국교회와 기독교의 미래를 위한 고민으로 이해하고 싶지만,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예수와 다윈의 동행을 말하기 전에 먼저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과연 저자의 주장과 같이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이라는 것을 분명히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은 사물의 현상에 관한 보편적 원리 및 법칙을 알아내고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체계나 학문을 지칭하는 말이다.

진화론을 과학이라고 주장하려면 진화론이 자연현상에 대한 보편적 원리와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은 일정한 규칙이 아닌 우연이라는 가설에 의존하여 불규칙적인 변화에 의해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생명의 존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주장을 가리킨다.

신재식 교수 역시 진화론에 대하여 “진화론은 지구에서 생명체가 태어나고 이 생명체가 시간의 과정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다양한 생물 종으로 전개될 수 있는가를 다루는 것”(P.29)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에른스트 마이어(Eenst Mayr)의 입을 빌려서 이런 진화론의 주요 이론 중에 “진화는 한정된 자원을 놓고 엄청난 수의 개체들이 벌이는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로 인해 생존과 번식의 차이를 보인다”는 ’자연선택‘ 이론을 진화론의 중요한 근거라고 설명하고 있다.(P.30)

그의 주장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자연선택에 의한 생물의 ”돌연변이와 적자생존“을 어렵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적자생존은 철저하게 자연이 만들어 낸 결과, 곧 자연의 선택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진화론의 자연선택과 돌연변이는 하나님의 작품?

진화론의 모체가 되는 두 가지 주된 이론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설‘이다. 자연선택설이란 어떤 형태의 생물이 오랜 세월 동안 환경에 맞추어서 서서히 모습이 변해간다는 것이다. 자연선택은 자연이 선호하는 피조물들이 번영하고 재생산되는 것을 확실하게 만든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은 생존투쟁을 거쳐 유리한 형질을 지닌 개체가 살아남고 나머지는 도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론은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극관계라는 사실이다. 현대 유전학은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들이 종을 파괴하고 해체시키고 있으며, 자연선택은 돌연변이를 다른 종으로의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태시킨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화자론들이 주장하는 자연의 선택 이론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providence)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진화론은 유물론과 무신론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적인 진화의 이론은 본래 두 가지 종류의 과정에 의존한다. 그 이론의 기저에는 ’우연‘이 깔려 있어야 한다. ’우연‘은 우리가 지적 존재나 목적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배제할 때 남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우연‘에만 의존하는 이론을 과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생명이 우연히 자연 발생되지 않는다’는 것은 생화학자 파스퇴르에 의해 이미 실험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며 우연에 의한 생명의 자연발생을 전제로 하는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틀린 추상적인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파스퇴르
파스퇴르

신재식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유명 신학자들 언급

신재식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한편 기독교가 동의하기를 바라는 기대에서 유명 신학자들을 인용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프린스턴 신학교의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와 벤자민 B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 ~ 1921)이다. 핫지는 질서를 다루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providence)를 무시하는 자연주의(naturalism)를 이론의 방법으로 삼는 무신론에 바탕을 준 진화론적 과학의 이론에는 반대하였다.

그러나 성경과 과학은 부조화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기독교가 유신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는 문을 열어 넣은 것이다. 그러나 무신론적 진화론을 비판한 핫지와 달리 워필드는 기독교가 진화론도 수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칼빈주의자였던 워필드는 칼빈(1509-1564)도 자신과 같은 진화론자로 생각을 하였고 이 부분에서 저자도 동일하게 칼빈의 소위 이중예정론이 ’선택과 도태‘라는 진화론의 자연선택 이론과 맥을 같이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재식, 기독교와 다윈의 동행은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기독교와 다윈의 동행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창조과학 운동 같은 반 진화론 운동이 “종교 언어와 과학 언어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고 평가하는 오류”에 빠져 있었다고 지적하고 “진화론을 선택하는 순간 신앙이 배제된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 손에는 「성경」, 다른 손에는 「종의 기원」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현대과학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반진화론 운동 기독교인들이 범한 ‘성서 해석의 문자주의적’ 오류를 다시 범하는 것이라고 또 다른 극단을 경계하고 있다. 신 교수는 신학자로서 양 극단이 가지는 위험성을 분명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손에는 「종의 기원」을’이 가능하다고 보는 면에서 그는 여전히 워필드처럼 성경과 진화론은 모순이 없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면서 그는 “우주와 생명과 인간에 대한 과학의 설명만이 유일하고, 우월하며, 절대적"이라는 주장은 다른 설명을 배격하는 “환원주의이며 독단주의일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과학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임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과학이 사물과 생명에 대한 여러 설명 중에 강력하고 유효한 것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는 공감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고 완전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과학의 특권을 주장하는 무신론적 자연주의 진화론자인 도킨스를 비판한다.

진화론이나 창조론 모두 과학이 아니다

진화론을 과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창조론도 과학이 아니다.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모두 비과학(non-science)이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교육기관에서 오로지 진화론만이 실험적으로 증명된 이론인 양 가르쳐지고 있다. 반면 창조론은 창세기에 근거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리적인 비과학으로 매도되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과학으로 위장된 비과학이며 창조론은 비과학으로 매도되고 있는 초과학이라 할 수 있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구분하자면 진화론은 생명존재의 목적이 없는 무신론적이며 유물론적 주장이며 창조론은 목적론적이며 인격신에 대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두 이론은 주장하는 내용이 대립적이므로 물과 기름처럼 타협될 수가 없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학문적 해석체계는 이 두 이론뿐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조화될 수 없는 두 이론을 하나로 엮어 놓은 것이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이다. 말하자면 유신론적 유물론(theistic materialism)이 탄생한 셈이다. 이질적인 요소가 봉합되었으니 여러모로 자가당착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유신진화론은 이론상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며 주장하는 내용이 일정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

유신진화론은 다윈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다윈의 진화론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가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다음, 20세기 후반부터는 진화론이 반대로 유신진화론에 영향을 주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이들은 성경의 기적들을 부인하며 하나님이 모든 생물을 진화론적으로 창조했다고 믿는다.

이러한 유신진화론에 대하여,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교역자들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관심마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유신진화 사상으로 서서히 세뇌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신 교수가 진화론을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으니 기독교 신학적 입장에서 신 교수의 진화론적 유신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이든 진화론적 유신론이든 같은 주장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고 해서 주장하는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둘의 주장이 동일하다는 전제하에 문제점을 지적해 보려고 한다.

신재식,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께 전가

먼저 신 교수의 진화론적 유신론은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인 인간 타락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한다.

진화론은 모든 생물의 진화가 ‘자연선택’에 의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자연이 생명의 적자생존을 만들고 자연에 의한 돌연변이에 의해 새로운 종이 출현하여 진화를 거듭했다고 주장한다. 처음 창조주에 의해 존재하게 된 원시생명체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여 지금 존재하는 모든 종의 기원이 되었고 자연선택도 창조주의 계획이라고 진화론자들은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을 근거로 인간의 타락에 대한 부분을 설명하려하면 먼저 인간의 타락도 진화의 한 과정 중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 모르지만 타락도 자연의 선택이라는 진화과정에 발생한 것이라고 볼 때 결국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타락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게 있으며 결국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를 만든 창조주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결론에 달하게 된다. 진화론적 유신론에 의하면 타락의 책임이 창조주에게 있음에도 인간에게 범죄의 책임을 묻고 범죄에 따르는 형벌(사망)을 내린 창조주는 아주 고약한 신이다. 이런 신을 어떻게 믿고 받아들이며 섬길 수가 있겠는가?

성경은 신 교수가 주장하는 진화론적 유신론이 아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만물과 모든 생명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창세기 1장)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타락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고 인간의 의지적 선택의 결과로서 사망이라는 형벌이 주어졌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로마서6:23) 나아가 인간의 자유 의지적 범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늪에 빠지게 되었고 이 죽음의 늪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바로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며 성경의 증언이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인간은 오로지 우월한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기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자유의지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유전자와 진화과정에서 다 세팅되어 있고 인간은 그 결정을 따를 뿐 자유의지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자유의지까지 생명체의 첫 조상에 내재 되어 있다가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확립되었으며 아담(현생인류)의 범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케네스 밀러)

신교수의 주장은 이단적 주장이다.

​신재식 교수의 진화론적 유신론은 성경에 위배 되는 이단적 주장이다. 신 교수의 진화론적 유신론은 기독교 신학과 성경의 증언에 비추어볼 때 완전한 이단적 주장이다. 신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 자연선택이라는 진화과정을 만든 창조주의 책임이기에 범죄에 대한 책임을 인간이 질 아무 이유가 없다.

그리고 죄의 대가인 사망을 당할 이유도 없게 된다. 진화론적 유신론의 입장에서 인간의 사망은 적자생존에 의한 도태라고 설명할 것이다. 인간의 사망 뿐 아니라 생명체의 사멸이 모두 선택과 도태라는 진화론의 주장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학과 신앙의 핵심인 죄 사함, 구원, 그리스도, 십자가, 영생, 천국 있는가? 칼빈주의적 입장에서 아담의 범죄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상관관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아담 범죄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드는 것은 이단적 주장’이다.

인간의 타락과 관련하여 또 다른 죄와 관련된 문제점을 보자.

진화론자들은 현생인류의 시작이 호모 사피엔스로 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적어도 10만년 전에 태어났다고 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존재하던 시대에 네안데르탈인, 호모 엘렉투스 등 적어도 6개 이상의 인간 종족이 존재했다고 진화론자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최종 살아남은 종족이 호모 사피엔스, 곧 현생인류이다.

그리고 성경의 아담을 현생 인류의 시조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 이전 존재는 유인원들로,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인류의 조상을 인간이 아니라고 하면 진화론 자체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증언하는 아담의 범죄 이전의 인간, 인간의 조상이라는 그들은 죄가 없는 존재들이었는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성경이 가리키는 첫 사람은 아담이라고 말한다. 진화론에서의 인간의 조상은 아담인가, 아니면 아담은 현생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인가? 아담이 현생인류의 조상이라면 아담 이 전의 인류의 조상들의 죽음의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사망(죽음)은 분명히 “죄의 삯”라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증언과 진화론자들의 주장 중 무엇이 진실인가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과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아담은 진화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첫 사람이며, 아담의 자유의지적 선택에 의해 타락하게 되었으며 타락한 아담에게는 사망이라는 형벌이 주었다. 그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이 사망에서 벗어나도록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이 그 답이다.

인간의 영혼도 진화의 산물인가?

인간의 타락을 포함한 만물의 타락은 진화의 어느 시기에 이루어진 것인가? 또 진화론적 유신론 입장에서 보면 원시 생물 상태에 이미 죄가 존재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죄뿐 아니라 인간은 어떻게 영적인 존재로 진화될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원시생명체에서 진화를 거듭하여 현존하는 인간의 영혼은 돌연변이의 결과인가?

수많은 생물 중에서 어떻게 인간만 영적 돌연변이가 가능하였을까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진화론적 유신론이든 유신론적 진화론이든지 신이 인간 존재의 진화를 자연선택에 맡겼다면 인간 진화 어느 과정에 신이 개입했을 리 만무하다. 만약 신이 진화의 어느 과정에 개입하였다면 개입한 그 순간부터 진화론은 부정되고 더이상 진화론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지금도 진화는 진행 중이다?

뿐만 아니라 진화론은 생명의 진화가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신재식과 같이 “진화를 받아들이는 것과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미국 하버드 대학과 브라운대학 생물학 교수인 케네스 밀러(Kenneth Miller)는 "생명은 처음에는 몇 가지 혹은 한 가지 지극히 단순한 형태에서 시작해 결국 아름답고 경이롭기 그지 없는 형태로 진화해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고 그의 책 ‘인간의 본능’(The Humanistinct)서 주장하고 있다.

장신대 윤철호 교수 역시 이레네우스와 판넨베르그의 주장을 근거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완전성이 시초(창조 시)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말에 가서야 완성된다”고 주장하였다. 진화론자들에 의하면 그러면 지금의 모든 생명체는 아직 끝이 아닌 진화의 과정에 있다는 뜻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진화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화과정에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종말에 가서야 완벽한 인간이 된다는 뜻으로 아직도 인간이 진화되어 간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황규학 기독공보 기사 갈무리

종교와 인간의 마음도 진화의 산물이다?

진화론적 주장에 의하면 결국 종교도 인간 진화의 과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독교의 신앙이나 신학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앞으로 인간에 의해 종교는 어떤 모양을 갖게 될지 아무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진화는 ‘자연의 선택에 의한 진화’를 주장한 다윈의 진화론과 달리 현재 진행 중인 진화는 진화에 의해 태어난 호모 사피엔스, 곧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가 가져오는 새로운 진화이다. 자연의 선택은 지금까지는 순수하게 자연이 진화의 주인공이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생물 종에 불과한 호모 사피엔스가 막강한 존재가 되어 많은 생명을 유지하는 지구 환경의 능력(자연)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진화는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또다시 인류로 인한 급격한 환경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인 폴 에얼릭 부부(Ehrlich, Paul R. & Ehrlich, Anne H)는 ‘진화의 종말’이라는 글을 통해서 진화론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진화의 법칙을 거스르는 지배종”이라고 표현하였다. 인간의 진화가 진화의 법칙에 어긋나는 결과라는 뜻이다. 폴 에어릭 부부는 왜 인간의 진화가 진화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주장했을까?

에얼릭 부부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이라는 특별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정신에 포함되어있는 본능은 마음대로 지워지거나 변경되지 않는다. 그래서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정신(심리)를 진화과정의 단점으로 지적한다.

그리고 이 단점은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만 되고 유독 이 단점만 자연선택, 적자생존의 법칙을 거스르며 진화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화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심리)가 진화의 법칙을 거스르는 지배종이 되어 자신을 존재하게 만든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진화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신세계, 곧 영적인 문제가 존재함을 진화론자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창조론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지 과학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진화론적 유신론은 창조론자, 특히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하게 된 면이 있다. 성경 창세기 창조 부분을 중심으로 성경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창조신학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 교수 역시 동일한 입장에서 창조론을 거론하며. 특히 창조론과 창조신학의 반 진화론자들의 등장에 “20세기 말의 근본주의 신학자들과 안식교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더 넓은 관점에서, 창조론자들이란 단순히 온 세상과 그 속에 사는 살아 있는 생명체들을 한 가지 목적하에서 만들어 낸 창조주의 증거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곧 신 교수가 창조론자들이라고 비판하는 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창조를 과학이 아닌 신앙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성경은 역사적 관점에서 서술된 역사적 종교요 진리요 계시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수천 년 동안 과학을 말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과학을 모르던 사람들을 위해서도 주신 책이다. 과학적 관점의 언어로 과학적 관심에서 기록된 책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인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해석 원리에 주목해야 한다. “성경은 요한복음 20:31에 근거하여 역사적 특정 계층을 위해 준 것이 아닌 인류 전체를 위해 주신 책”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성경해석원리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진화론은 인간을 맹목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창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우리의 존재를 만드셨다면, 그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에는 그 어떤 지적인 존재의 목적도 들어있지 않다.

유신 진화든지, 무신 진화든지 진화에 의해 오늘날 지적 존재인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목적 없는 물질적인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진화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맹목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신재식은 신학자가 아니라 어설픈 과학도

신재식은 “나는 신학자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는 신학자라기보다 어설픈 과학도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신학자라면 신학적 입장에서 진화론을 논해야 하며 진화론과 신학이 공유하고 있는 내용부터 입증하며 진화론과 기독교의 동행을 설득해야 함에도 그런 노력은 찾아보기가 힘든다.

다시 말하면 신재식의 글에는 진화론을 변명하면서 한편으로 기독교 신학자가 가져야 할 신학의 기본적인 주제들, 예를 들면 인간론이나 구원론이나, 종말론 등 기독교 신학의 주제들과 진화론과의 긴장이나 대립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신학자로서 고민이나 주저함이 전혀 없이 진화론을 변명하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에 신을 첨가

그는 진화론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만 다양한 형태의 진화론이 지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언급이나 비판이 없다. 진화론을 긍정적으로 보는 현대 과학자들 중에서도 진화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부정하는 많은 학자들이 있음에도 오직 다윈의 진화론에 ‘신’이라는 단어 하나를 첨가함으로 마치 기독교 신학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다 해결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진화론에 유신이나 무신이라는 용어를 병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 왜 자신은 진화론적 유신론이란 용어를 무슨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말보다 진화론적 유신론이라는 말이 “신학자로서 진화론을 언급하는 적절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보아도 적절하지 못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가? 필자가 생각하기는 그런 신재식은 신학자라고 할 수가 없다.

결론: 신재식 교수의 주장은 이단적 주장

결론적으로 신재식 교수가 주장하는 ‘예수와 다윈의 동행’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진화론은 논리적,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과학이 아니라는 점과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의 가르침과 나아가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믿는 기독교 신앙을 허무는 이단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혹평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예수와 다윈의 동행’은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와 같이 생명의 기원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지식으로 포장된 세속지식의 요구에 타협한 불신앙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과학이라는 포장 안에 허구(가설과 추론)로 짜여진 생명의 진화가 아닌 기독교 신앙의 정수인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모든 생명의 존재는 진화가 아닌 하나님의 창조결과임을 믿는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창조 외에 다른 창조를 주장하는 것은 이단이다.

신재식 교수의 반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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