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식 교수의 ‘도교와 기독교의 신(神)’ 주장에 대한 비판
신재식 교수의 ‘도교와 기독교의 신(神)’ 주장에 대한 비판
  • 엄무환 국장
  • 승인 2022.01.1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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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혼합주의적 신학적 담론은 반 기독교적 행위이다

글 : 이정환 목사(전 예장통합 총회정치부장)

호남신학대학교 신재식교수의 종교혼합주의적 신학적 담론은 반 기독교적 행위이다. 종교혼합주의는 이단사상이 아니라 이교 사상이다.

필자는 가스펠투데이에 신재식교수의 진화론에 대해서 반기독교적 사상이자 이단사상이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기사 하단 관련기사 참조).

이정환 목사(전 예장통합 정치부장)
이정환 목사(전 예장통합 총회정치부장)

이번에 쓰는 신교수의 논문은 이단사상이 아니라 이교사상이다. 이교적인 교수를 계속 교수로서의 직위를 유지하게끔 하는 호신대 이사장과 총장은 책임을 져야 한다.

필자는 지금부터 신재식교수가 왜 종교혼합주의와 이교적인 교수인지를 설명하겠다.

신재식교수는 서울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을 거쳐서 드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호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재식교수는 그의 논문을 보면 조직신학자가 아닌 종교학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신재식 교수 프로필
신재식 교수 프로필

캐나다 밴쿠버에서 모인 제6차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1983)는 "회원 교회들로 하여금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에 상호 헌신할 공동체적 삶의 방향을 찾도록"하는 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1987년 제네바에서 모인 WCC 중앙위원회에서는 1990년에 JPIC 세계대회를 한국 서울에서 열기로 결정하였으며. 1990년 3월 서울에서 모인 JPIC 본회의가 마련한 안을 근거로 WCC 중앙위원회에는 "JPIC는 2천 년 대에 대한 에큐메니칼 비전의 핵심이다"라고 천명하는 「최종선언문」을 채택하였다.

JPIC
JPIC

WCC 가 채택한 JPIC : 정의(Justice), 평화(Peace), 창조질서보존(Integrity of Creation) 의 정신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정신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삶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인식하고 성서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약속하신 "샬롬(Shalom),"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실현하기 위한 지표를 정의와 평화와 창조의 보전이라는 세 가지 개념 또는 범주로써 요약한 것이다.

JPIC는 인류가 지금 전 세계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현실 인식으로 부터 출발한다. 인류는 스스로 자신을 멸망시킬 능력을 획득한 역사의 새 시대에 이미 들어와 있다. 세계적 경제위기정치적 갈등, 자원의 고갈, 환경파괴 등으로 인한 지구적 불안으로 인하여 인류가 대 파국을 면하려면 철저하게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생명에 대한 전 세계의 위협들은 첫째, 정의의 위배로, 둘째, 평화에 대한 위협으로, 셋째, 인류와 창조세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땅과 바다와 공기의 오염 등 환경파괴로 간주되어 상호 관련된 이 세 분야에서의 투쟁은 생명 보전을 위한 하나의 통일적인 투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달했다.

리우환경회의

여기에 자극되어 1992년 리우 환경 회의가 열렸고 생태계 보존의 문제는 세계적인 이슈로 등장하였다. 특히 세계 환경 논의에 있어 종교적 시각의 부재. 자연 본성에 대한 이해의 결핍이 근본 문제는 “신학이 과학의 본성과 그 새로운 역할에 대한 이해를 배우지 못한다면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것” 이라는 칼 프리드리히 폰 하이젝커의 지적을 경청한 세계교회는 신학과 과학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대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상황신학

21세기를 지나면서 급속한 지식과 과학문명의 발전과 함께 상대적으로 종교에 의지하는 현대인들의 의식변화와 함께 약화되어 가는 종교(기독교) 현실 가운데서 위기에 처한 기독교의 지속적인 존립을 위해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상황신학이다.

상황신학의 요점은 기독교 초기부터 이어진 이원론적인 희랍적 서구적 사유의 틀을 벗어나 현재 세계가 처하고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새로운 신학의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신학적 입장에서 동양적 사유인 ‘도교’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신학자들이 있다. 신재식도 그중 한 사람이다.

우리가 수용한 서구 기독교의 부정적인 면을 타개하고 특별히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을 위기로 인식하고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패러다임을 찾으려는 시도는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으로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교회 위기상황에서 신재식은 자신의 박사 논문에서 “신학은 자신이 처한 상황의 지평에서 새로이 제기되는 문제나 딜레마와 씨름하는 가운데 전승된 기독교 전통올 갱신함으로써 ...... 신학이 살아 있는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형식과 표현 그리고 종종 재구성하는 작업을 필연적으로 요청한다.”고 말하고

신재식 교수
신재식 교수

우리 시대의 문화적 위기라는 깊이로부터 생태계의 문제, 온갖 종류의 차별, 그리고 제국주의 등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 전통적인 신 관념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에 대한 담론을 새롭게 해석하고 ..... 근대 세계관을 넘어서서 새로운 접근 방식에서 신 개념에 관한 논의들 을 모색하고 있으며, 자신도 신학의 전통적인 흐름이 신의 불변성, 초월, 통치 등을 중시함으로써, 생태계의 위기에 적절한 해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는 현대신학의 문제 제기를 염두에 두면서 인간 중심적, 이원론적, 정태적 신 담론의 한계들을 보완하면서 기독교 전통을 더욱 풍요롭게 이끌며 보다 통전적이며 온전한 생태학적 신 담론을 전개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동아시아의 세계관 중 특히 도교의 신관을 주된 모티브로 삼아 박사학위 논문을 ‘변화, 리듬,무위’라는 주제로 발표하였다.

신재식의 기독교 신관 이해

신재식의 논문을 읽다보면 무신론 진화론자인 리챠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에서 가장 혹된 표현을 동원하여 구약의 하나님을 비난(비판)하고 있는 도킨스의 거친 말이 생각난다.

“구약성서의 신은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주인공이다.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자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어린 자식들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로 나온다. 기독교에 물들지 않은 천진무구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더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기독교를 잘 알고 있었던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도 “ 기독교의 신은 잔인하고 복수심 많고 변덕스럽고 불공평한, 끔찍한 성격을 지닌 존재다”라고 하였을 정도이다.“ (‘만들어진 신’의 서두)

무엇 때문에 도킨스는 구약의 하나님을 이렇게 비난조로 거론하고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의 주장에서 원인을 찾는다면 도킨스는 ‘구약의 하나님의 존재는 독재적인 지배자요, 변덕스럽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무자비하게 보복하는 몰인정한 난폭한 존재요, 불공정하고 차별적이며 전쟁을 좋아하는 끔직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신의 피조물을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음을 볼 때 도킨스 자신이 이해하고 기대하는 자연계를 포함한 모든 세계의 평화와 관용과 조화로운 신에 대한 기대에서 성서의 하나님의 존재와 괴리감을 느끼는 심리적인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자신이 기대하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신은 존재의 의미가 없으므로 아예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조직신학 논총 제5집

신재식의 신의식, 성서에서 찾을 수 없다

자신의 주장을 ”새로운 신학적 담론을 모색한 것이다“라는 신재식의 주장도 어쩌면 자신이 바라는 신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더 이상 성서의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없다는 생각에서 자신이 바라고 기대하는 신의 모습을 자기 논문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신재식은 “기독교 전통에서 신은 주, 주인, 아버지, 왕, 지배자, 창조자, 목자, 사랑, 진리, 영, 그리고 빛과 같은 다양한 이름이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이름이나 상징은 유대교의 구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유대인들이 신의 상징화 과정에서 이해 한 신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경험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며 "신에 대한 원초적 서술을 통해서 신에 대한 개념이 최초에는 그리스어, 로고스가 함축하고 있는 존재나 실체의 형식적 구조라기보다는 실존을 바꾸거나 변형시키는 힘이나 에너지와 밀접할 관련을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역동적인 힘이 충만한 상태(에너지)를 가리킨다?

모세를 통해 자기를 들어낸 ”구약의 하나님은...... 신의 원초적 본질이 존재와 생성이라는 기존의 서술 범주를 포함하며 신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있는 자”로 자신을 계시한 구약의 신은 본질은 일차적으로 존재와 생성의 범주를 포괄하는 변화, 그 자체의 힘을 의미 한다. 곧 구약의 하나님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동적인 힘이 충만한 상태를 지칭한다.

신재식이 모세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역동적인 힘이나 에너지”를 의인화 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펼치려고 하는 도교의 신과 일치시키려고 하는 의도적인 주장이라는 의심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기독교 신관을 도교의 무위사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한 전단계적 주장임을 알 수가 있다. 신재식이 기독교 신관을 ‘도교의 신관’으로 재해석하고 기독교 신앙에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해하려고 하면 먼저 도교의 신관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도교는 애니미즘((animism)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종교

도교는 일반적으로 흔히 노자(태상노군)가 창시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시작은 간단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도교는 기본적으로 원래 구성되어 있던 샤머니즘의 토양 위에 도가 사상의 몇몇 내용이 덧붙여져 도교가 발생하고 이후 불교와 유교의 요소들이 습합되면서 지금의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대인들은 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다.

그래서 상상력을 이용해 나름대로 자연 현상을 설명해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과 같은 원시 종교들이 생겨났다. 이 중 도교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원시 종교 형태는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으로 도교는 특히 애니미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애니미즘은 인류의 가장 원초적 형태의 신앙으로 무생물이나 모든 물건에도 신과 영혼, 정령 등이 깃들어 있다는 신앙의 하나이다.

이때 정령은 초자연적이면서도 인격적인 복수의 존재로, 생물과 무생물에 깃들 수 있으며 자신의 담당하는 자연 섭리의 한 영역을 나누어 맡아 관장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정령들의 세계는 위계적 질서가 존재하며, 하위 정령은 상위 정령에게 봉사 내지 복종한다. 종교와 신앙을 학술적으로 다룬 이들도 대부분이 애니미즘이 모든 신앙 형태의 원초적 형태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도교는 다원,혼합주의 종교라고 할 수가 있다.

도교의 최고신은 세상의 운기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다.

도교의 경전인 노자의 도덕경에 따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시작되기 전, 즉 우주가 아직 모습을 갖고 있지 않았을 때 '기(氣) : 생명의 원동력인 신비로운 힘)'에 의해 태어난 것이 도교에서 말하는 원시천존 곧 도교의 최고신이다.

대만에 있는 도교사원
대만에 있는 도교사원

이 최고신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다. “원시천존이 탄생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사물들은 이름과 실체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수백, 혹은 수천에 이르는 도교의 신(정령)들 역시 직간접적으로 원시천존을 통해 도교의 깊은 뜻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도교의 창조론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에 의한 인간창조나 애급의 이시스의 생명창조, 그리고 성경의 창조론과 매우 닮았다. 그 이유는 차제에 살펴보기로 하자. 도교의 최고신 원시천존의 신적 역사에 대한 신재식의 글은 ‘무위’라는 단어로 함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신재식이 주장하는 신의 무위사상

신재식은 ‘무위’란 “신의 활동”으로 ‘기독교에서의 신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피조세계 속에 현존하며 창조 속에서 활동하는 존재로 세계를 향한 자신의 의도를 가지고 세계 속에서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하는 인격체이며, 행동하는 주체로써 행위자로서 세계와 관련된 신의 행위는 지적이며 (세계를)통제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기독교가 말하는 신은 없다.

신은 세계의 방향성과 목적 그리고 그 한계를 부여하는 질서의 수여자로서 우주를 창조했다. 그런데 근대 과학의 발전에 따른 도전과 현대 과학의 성취를 토대로 한 현대 세계관의 빛 아래서 신을 의지를 가진 인격적 주체라는 측면에서 시도하는 설명은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었고 신이 더 이상 세계 외부에 있는 물리적으로 분리된 존재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현대신학은 신의 활동에 대한 설명을 새로운 방식으로 시도한다.

신재식교수는 도교의 신은 알아도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신학은 상황신학이다”라고 주장하며 기독교 신관을 도교의 신관으로 변형하여 해석하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신재식과 같은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이렇게 묻고 계신다. 너희가 하나님에 대하여 과연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느냐?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마가복음 12;18-27)

무위

'무위’는 도가 사상의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로, 도의 운동의 궁극적인 형식이나 세계나 사물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무위’는 ‘행동하지 않음' '아무것도 하지 않음 등으로 이해되는데, 실제로 “무위”는 하나의 행동 하는 방식이다. 즉 ‘무위’는 항상 ‘위무위’로 비강제적인 행동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다. 단순히 행동하지 않는 소극적인 측면이 아니라 위 무위 즉, 무위로써 하는 행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유위의 개념과 비교해 볼 때 보다 분명 해진다. ‘유위’(有爲)는 의도를 가진 행위인 반면, '무위’는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행위이다. 즉 ‘무위’는 의도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행위자와 행위 사이의 구별이 없는 비이원론적 행위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유의, 동양의 하나님은 무위

신재식교수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무위의 하나님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의도성을 행위의 핵심으로 하는 ‘유위’의 행동은 인간의 자기중심성,공격성,폭력,의지의 관철 등과 관련된 반면,“무위”의 행위는 사물이 처한 상황에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면서 사물의 본성에 맞게 조율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무위’의 행위라는 개념은 자연스러운 또는 자발적인,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마음을 비운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렇게 ‘무위’의 행동 방식은 궁극적으로 사물의 본연 그대로를 따르는 길로서, 무위의 주체는 행위의 대상에 대해 결코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거나,대상을 통제하거나,지배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행위’는 행위자를 요청하지만,‘무위의 행위’는 능동적 또는 수동적으로 되는 ‘자아’ 자체마저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렇게 무위의 행위는 비이원론적 행위로서 그것은 객관화된 의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자발적이며,스스로 움직여야만 하는 ‘자아’ 를 구체화시키는 데서 자유롭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고 통전적 전체가 행동하고 그 행위 에 대해 이원론적 의식이 없기 때문에 비어 있다. 달리 말하면 이런 행위는 행위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분화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재식교수, 구약의 하나님은 현대에서 더이상 용납하기 어려운 존재

신재식의 주장을 거꾸로 설명하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의지적인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고 피조물에 대해서 자기의지를 강요하며 지배자로서 강제력으로 통제하는 두려운 존재”로 과거 지식과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특별한 거부없이 수용되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용납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음으로 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세상에 제시해야 하는데, 이렇게 재해석된 신관이 바로 도교의 신관, 곧 “무위의 하나님”이라는 주장이다.

서구의 유위의 하나님은 도교의 무위의 하나님으로 변해야

도교의 신의 활동으로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위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 인식하며 과장하지 않고 억지로 하지 않고 인공의 힘을 가하지 않은 자연스런 행위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행위를 말한다. 모든 자연의 과정에서 인위적인 것이 끼어들게 되면 그것은 항상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되거나 실패로 끝날 것이기 때문에 무위 없이는 진정한 성공이나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의 활동을 ‘무위’ 의 개념을 가지고 이해할 때, 신은 일차적으로 세계의 지배자며 통제자가 아니라,세계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의지적 목적을 가지고 피조세계의 움직임에 간섭하지 않고 지배하거나 통제하지 않으며 신의 능력을 세계에 부여하고 위임하는 존재이며 세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격려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위의 관념은 세계 속에 서 신의 행위를 기술하는 데 가장 적절한 개념으로 .... 비록 신과 세계는 구분되지만,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궁극적 실재로서 도는 그 자신을 세계의 모든 사물과의 다양한 관계들 속에서 그리고 그 관계들올 통해서 자연스럽게 자신올 체현(관념적인 것을 구체적인 행동이나 형태로 표현하거나 실현하는 것)한다.”는 것이 신재식의 주장이다.

그리고 세계 속에서 ‘무위의 행위’ 로서 신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고 주장한다.

신재식은 ”도교의 신의 무위의 행위는 신이 모든 사물을 창조했으나 소유하지 않으며 통제하지 않고 행동하며 지배하거나 다스리지 않는다. 신의 무위의 행위는 철저하게 개개의 사물의 독특성을 존중하기 때문에,비록 신이 창조주 이며 모든 사물의 유지하는 존재이지만,무위로서 신의 행위는 사물들 로 하여금 각각 자신의 개성이나 독립성을 허용한다 또한 사물의 독특 성을 성취시키도록 인도하는 신의 ‘무위의 행위’ 라는 관점에서 보면 특정한 사물이 자신을 위해 다른 사물들이 고유하게 갖는 가치를 희생 시키려는 의도나 활동을 거부한다.(자연파괴 등 생태계의 문제) 즉 그런 무위의 행위는 이기적 의도성올 배제한 비강제적인 행위로 사물들을 외적인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며 사물들 자체의 방식에 따라 존재하게 한다.“고 역설한다.

신의 행위를 ‘무위의 행위’로 설명하는 것은 외부적 활동이나 초자연적인 활동의 형식보다 내재적 활동의 측면에서 신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신에 대한 이해는 관념과 사유의 방식으로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무위’로서 신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은 신이 강제력을 가지고 개입하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으며 어떤 초자연적인 질서도 전제하지 않는다. 세계나 자연은 자연스러움과 자발성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상 초자연적 존재(신)를 부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얼마 전에 신재식의 진화론적 유신론을 비판하며 기독교 교리적인 측면에서 그의 주장을 ‘이단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번에 그의 학위논문을 접하면서 그의 논문이 신학박사 학위논문이라기 종교학 학위논문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학논문이 아니라면 기독교 입장에서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기독교적 비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학자로서 그가 도교의 신을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왈가왈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신학계의 흐름은 기독교 본래의 전통과 범주에서 벗어나 21세기에 적절한 새로운 신학의 구성을 위해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었다. 여기에 등장한 것이 바로 생명 신학, 혹은 생태 신학이다. 토착화 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으로 세분화 된 신학의 지류로서 이것들 통털어 상황 신학이라 부른다.

지난 천 년 동안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 된 신과 인간에 대한 탐구로 부터 벗어나 우주를 포함한 생태계 전체를 아우르는 신학적 패러더임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에서 성서에 풍부하게 포함되어있는 자연 친화적 주제들에 대한 연구와 올바른 생태적 자연관을 추출하기 위한 성서의 재해석을 요구받고 있었다. 신재식은 바로 이런 현대 상황 신학의 요구에 자신의 주장하는 진화론적 유신론과 함께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도교의 무위사상을 성서의 하나님으로 재해석하는 시도를 박사학위 논문에서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신재식은 구약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필요해 보인다

신재식이 이해하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성서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신재식 자신은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성경을 말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로 하나님의 존재 양식인 ‘초월과 내재’에 대하여 (신의)”초월과 내재의 문제는 신의 실재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이며,초월과 내재는 성서 전통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신학자들은 신의 초월과 내재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고,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이런 노력들은 초월과 내재의 균형보다는 신의 초월이 내재보다 강조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고 비판했다.

신재식 교수에게 있어 신의 핵심은 외부적인 존재에 불과

신재식은 ”신의 초월은 ‘ 세계 위에서 독립해 있는’ 멀리 떨어지고 외부적이며 전능한 힘을 지닌 최고의 존재로 세계에 대해서 신의 타자성, 이 타자성은 인간보다 우월한 신의 절대적인 권위와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궁극적인 실재로서 하나의 외부적인 존재로 이해하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초월의 개념은,범신론적 전통에 반대되는 전통적 유신론적 견해의 핵심이 되었다.

전통적 유신론에서 신의 내재 개념이 거의 약화되거나 없어질 정도로 초월 개념이 강조되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전통에서 신의 ‘내재’ 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고 전통 기독교 신학을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 초월성보다 내재성을 강조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신재식 주관적인 견해일 뿐 성경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균형있게 보여주고 있으며 실재로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서 초월성보다 내재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서의 하나님은 그 존재하심이 인간의 노력이나 협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필자는 신재식이 ”신학자들은 신의 초월과 내재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고,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이런 노력들은 초월과 내재의 균형보다는 신의 초월이 내재보다 강조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주장이 놀랍다.

신의 존재의 균형유지와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시키려는 노력”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 결과 신의 초월성이 강조되고 내재성은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성서의 하나님은 신학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존재인가?

기독교 신학은 신론이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신재식이 주장하는 협의의 창조주 하나님 뿐 아니라 보다 크고 넓은 광의의 하나님임을 먼저 인식했어야 한다.

그 광의의 하나님이 하신 일은 절대적으로 선하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세계를 품에 안으신(창세기 1: 2)자로서 만물의 창조자이다. 신재식이 만물에 내재 보다 초월해 존재하는 신이라고 비판적으로 지적한 초월과 내재의 신이며, 그는 치우침이나 편견이 없는 공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내재성의 극치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를 구원하셨고 만유보다 크시고 만물을 붙드시고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지속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극히 작은 자들의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며 그가 사랑하는 자들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고 미물인 참새 한 마리의 죽음까지 간섭하실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내주하셔서 의와 진리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폭이 넓다

모세에게 계시 된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감추어진 신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분이며 그의 계시를 통해서 우리를 더욱 깊고 넒은 이해에 들어가게 하신다. 신학자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서에 계시 된 하나님에 대한 연구와 이해의 폭을 넓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신의 초월과 내재에 대한 신재식의 이해만 보아도 그의 성경이 해와 목회 현장에서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재식은 도교의 신을 말하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한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마가복음12;18-27) . 나아가 신재식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그 넒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자연이니, 우주니, 생태계니 하는 다른 피조물에 비유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발상이라고 할 것이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이사야 46:6)

신학을 빙자한 종교혼합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신학은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전하는 분이 아니다. 신학이 발전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새로운 하나님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분명 반기독교적인 것이다. 더구나 타 종교의 신관을 차용하려는 시도는 기독교 신앙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반기독교적 행위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위협하는 종교다원주의나 종교혼합주의는 용납할 수 없는 반기독교 주장들이다. 그런 면에서 신재식이 성서의 하나님을 도교의 신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분명히 성서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주장으로 종교혼합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도의 신학을 주장한 모 종교학자 겸 신학자는 ”기존의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관 뿐 아니라 구원관, 원죄론까지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주장은 신학적 담론을 빙자한 이단적 주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굳이 이런 주장을 하려면 신학자나 목사가 아닌 종교학자의 입장에서 주장하기 바란다.

신재식이 종교학자라면 비판하지 않는다

종교학자의 주장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논쟁이나 비판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필자는 기독교 목사로서 신재식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며 이것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기독교 목사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의 입장에서 하는 것임을 밝힌다. 어떤 이유로든지 기독교는 종교혼합주의를 용납할 수 없다.

침묵하는 호신대

한편으로 종교혼합주의나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유신론적 진화론 등 기독교 이단 사상들이 교단 신학교와 목회현장에 퍼져나가고 있음에도 입을 다물고 있는 장신대나 호신대 신학교수들과 목사들에게 충고하고 싶다.

”당신들이 그릇된 주장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수많은 주님의 백성들과 신학생들이 그릇된 신학사조에 오염되어 병이 들거나 죽어가고 있음을 기억하라. 그들의 생명의 피 값을 주님께서 찾으실 날이 곧 이를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재식은 창조하고 활동하며 적극적으로 세상사에 내재하여 역사하는 유위의 하나님이 아니라 움직이면서 활동하시는 도가의 무위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패러다임을 구하고 있다. 그의 유신론적 진화론의 논문은 이단사상을 가진 논문이라면 그의 박사논문은 종교혼합적 사상을 가진 이교적인 논문이다. 필자는 신재식교수의 반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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