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하나님의 사랑, 고난, 그리고 아름다움
[전문가 칼럼] 하나님의 사랑, 고난, 그리고 아름다움
  • 박혁순 박사
  • 승인 2023.09.14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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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는 그의 명저 『하나님의 인간성』에서 “하나님의 진리”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사랑’이라는 것으로써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통속적 사랑이 아니고, 또 인간의 감정으로 정의할 수준의 것은 아니다. 이에 신적 사랑을 숭고한 ‘아가페’(ἀγάπη)로 소개한 성서적 표현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한, 인간의 ‘사랑’에 대비하여 어떤 국면에서 그 의미의 폭을 줄이고, 어떤 국면에서 그 의미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우선 바울의 관점(고후13:13)과 요한의 관점(요일4:8)뿐만 아니라, 예수의 비유 가운데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격은, 곧 조건과 차별이 없이 먼저 행하고 끊임없이 인내하고 간직하는 사랑으로 대표된다(눅15장). 신적 사랑은 감정‧정서에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가 증언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보여주었듯이 정언명법(定言命法)을 능가하고(눅10장),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 ‘돌아온 탕자’에게 베푼 사랑처럼 끊임없는 예술적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즉 신적 사랑은 인식과 윤리와 미학을 통합할 뿐만 아니라 그 근거가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요일4:8)’라는 명제가 지닌 종교적 진정성을 신뢰할지라도, 때때로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역설과 번민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롭고 아름다운 사랑이 우리에게 배려와 친절로 경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는 감정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성질이 있을까? 아마 무한히 증대하는 창조성, 아름다움, 하나님의 자기 확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기대와 희구로부터 멀어지곤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운명 사이의 관련은 단순히 윤리적 인과율이나 역사적 현상을 통해서 추정되기 어렵다.

성서적 근거를 충실히 따르자면, 하나님 사랑에는 역사의 경로를 따라 서사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를 통찰하고 신뢰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지니고 인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통해 도모하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미적 경험의 증대이자 모험적 유희다. 과학과 신학 사이의 관련을 연구하는 이안 바버는 자연도 “법칙과 우연과 출현 등 여러 수준에 걸친 하나의 창조적 과정”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신성과 미적 증가 사이의 관련을 통찰한 신학자 찰스 하트숀 또한 “신의 즐거움이 증가하지 않는다면, 신의 미학적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신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데 어떤 한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 바 있다.

하나님의 독존은 그의 자족성과 완전함을 뜻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그의 번성하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운 체험의 축적을 의도한다. 영국의 통계학자로서 신을 변증하는 연구를 병행했던 특이한 이력의 바르톨로뮤(D. J. Bartholomew)는 우연성과 무작위성이 세계에 경이, 즐거움, 다양성 등을 가져온다고 피력했다. 그에 의하면 유희는 확정하지 않은 결과를 얻기 위해 동전을 던지거나 카드를 섞는 것에서 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의 진행에는 하나님이 양보하거나 허용한 우연성과 무작위성으로 기인한 ‘묘’(妙)가 있다. 거기에는 위험과 파탄을 수반한 생경한 경험과 아름다움의 증가와 하나님의 거룩한 유희가 있다.

단, 그리스도교는 최종적으로 창조 세계의 대단원을 통해 하나님의 영화와 지혜가 전 우주에 드러나고, 만유는 하나님의 은총과 지혜와 아름다움으로 인해 영원한 노래를 갖게 될 것이라고 신뢰한다. 여러 교부들이 말했듯, 지상의 모든 악과 고통과 비탄도 우리 세계와 관계한 하나님의 독특한 우주적 드라마를 위해 기여하게 될 것이다.

처참한 전쟁일수록 그에 상응하는 대작들이 후속된다는 것은 가히 불가해한 일이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우리는 전쟁마저 인류의 정신사와 예술사에 이름다움으로 승화될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가령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 등의 작품들은 비참한 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이 이별과 죽음을 감내해야만 하는 사건들이 전개된다. 그런데 그 속에서 애수(哀愁) 띤 아름다움과 비장미(悲壯美)가 배태되고, 부조리와 비참에 저항하는 인물들의 사건에서 숭고미와 미학적 긴장이 파생되고, 서로 적대하는 진영 속에서 피어나는 인류애와 우정을 조명하는 드라마가 창조된다.

물론 세계의 역사는 인간의 인지구조와 성정에 대해 결코 픽션(fiction)이 아니다. 그러나 신적 차원에서 세계의 역사는 완전하게 고착된 실재도 아니고(사40:17), 동시에 한낱 꿈과 허상만도 아니다. 이에 신학은 모호한 존재론적 위상을 지닌 세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에게 축적되는 생소한 경험의 성질을 지속하여 묵상하고 연구할 여지가 있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만물과 화해할 하나님의 종말론적 희망과 기획을 전제할 경우, 우리의 고난의 이유에 관해 어슴푸레 알 수 있을 것이다.

박혁순 교수<br>한일장신대 초빙교수<br>
박혁순 박사
조직신학
예목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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