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정통교회를 흔드는 실체, 근본주의를 파헤친다 (1)
[특별기획] 정통교회를 흔드는 실체, 근본주의를 파헤친다 (1)
  • 안교성 교수
  • 승인 2022.07.2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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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전 미국교회 근본주의 태동과 선교 초기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장로교를 중심으로”

I. 서론

한국교회(한국 개신교)는 근현대 서구 개신교 선교운동 가운데 탄생하였기에, 전반적으로 복음주의의 영향 아래 있다. 신학적 경향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보수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흔히 한국교회를 보수적인 신학과 신앙을 지닌 교회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관련 용어들을 조심성 없이 쓰다 보니, 보수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 등의 용어가 상호교환 가능한 것처럼 혼동 가운데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한국교회 안팎 모두에 존재한다.

먼저 교회사가를 비롯한 신학자들 중 일부는 초기 선교사들을 근본주의 선교사라고 비판하면서, 그들의 영향 아래 한국교회도 근본주의 교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한국사가들 중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기독교를 외래종교로 접근하는 이들도 초기 선교사들을 근본주의 선교사라고 비판하면서, 그들의 영향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근본주의 교회가 되었고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런 잘못된 수입신학의 유산을 속히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속의 상식은 의외로 진리보다는 속설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한국교회에 관한 언급들을 보면, 여전히 보수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 등을 마구잡이로 섞어 쓰이는 것을 흔히 본다. 이번 특집이 바른 이해와 발전된 태도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바란다.

서두에서 단적으로 말한다면, 한국의 초기 선교사나 초기 한국교회에 대해서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면이 있고 한국교회의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엄격한 의미의 근본주의는 한국의 선교 초기 이후에 등장한 현상이다. 따라서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려면 시대 배경 지식에 입각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옷 입고 가려운 데 긁기’ 식의 두리뭉실한 논란이 되고 만다. 둘째, 근본주의를 광의로 사용하는 것도 유의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정치사회 분야에서 근본주의를 정치적 과격주의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냉전 이후 종교갈등의 시대가 도래하자, 이슬람교를 비롯한 종교들을 근본주의라고 부르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에는 ‘테러리즘’이란 용어가 대두되고 있다. 따라서 근본주의는 항상 유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물론 근본주의라는 용어와 개념은 중요하다. 이 용어를 제대로 사용하면 학문적으로나 실생활에 유익하다. 그러나 문제는 근본주의라는 용어가 대부분 엄밀한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일종의 혐오 용어(hate speech)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역으로 자기 보호를 위해 스스로 근본주의라고 자처하는 경우까지 있다. 이제 해방 이전 미국교회 근본주의의 태동(혹은 기원)과 선교 초기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자.

II. 해방 이전 미국교회 근본주의의 태동

오랫동안 기독교 중심지 역할을 해온 서구의 기독교는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기독교와 이성 및 근대화와의 관계를 정립할 필요를 느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소극적인 입장은 수세적이고 호교적인 구심성을 보였고, 적극적인 입장은 선교적이고 세상친화적인 원심성을 보였다. 물론 두 가지 경향이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로 넘어가는 시기의 서구사회에는 계몽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신념이 확산되는 동시에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런 양극화는 서구사회 전반에 걸쳐서 벌어졌고, 특히 예술에서 첨예화되었다. 이런 갈등에는 신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역사비평을 비롯한 성서학의 갈등은 신학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신학적 논쟁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장기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지만, 교회 분열이라는 극한상황까지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일어난 논쟁이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극단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근본주의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근본주의는 누구나 잘 아는 운동 같지만, 동시에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 운동이다.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신학과 관련된 개념이고 운동이다. 그러나 동시에 과학, 문화, 나아가 정치와 관련된 개념이고 운동이다. 근본주의는 확신과 확신에 따른 행동이 중요한데, 이런 과정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타성, 상대방의 악마화 및 심지어 폭력성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근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 근본주의는 크게 세 단계로 전개되었다. 첫째, 미국장로교회 내의 신학적 갈등의 단계이다. 둘째, <근본주의자>라는 잡지 등을 통한 근본주의 이념 확산의 단계이다. 셋째, 근본주의자들의 교파 형성의 단계이다.

1. 미국장로교회 내의 신학적 갈등의 단계 (19세기말-1910년)

근본주의 논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미국장로교회 특히 미북장로교회의 경우를 통해, 근본주의의 태동에 대해서 살펴보자. 미북장로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가 분열하기도 하고 연합하기도 했다. 특히 미북장로교회는 20세기 초반부터 근본주의 논쟁에 직접적으로 개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근본주의는 19세기말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이다.

근본주의는 무엇보다도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 분야에 있어서는 두 가지가 중요한데, 성서론과 종말론이다. 즉 성서론 특히 성서문자주의가 한 축을 이루고, 종말론 특히 전천년설(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또 한 축을 이룬다.

첫째, 성서론은 미북장로교회 신학교인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소위 구학파 신학인 구(舊)프린스턴신학을 통해서 발전되었다. 성서문자주의는 축자영감설, 성서무오설 및 성서무오류설 등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성서문자주의가 성서 본문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역사비평(고등비평) 성서신학에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더구나 구프린스턴신학의 경우, 스코틀랜드 상식주의와 결부되면서, 성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성서 안에 있는 내용도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성서문자주의가 성서 내용과 상충되는 진화론에 반대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고, 이런 태도는 후에 창조과학으로 발전한다.

둘째, 종말론도 근본주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성서론에 있어서 프린스턴신학교가 중심지라면, 종말론은 부흥운동, 성경공부운동, 선교운동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전파되었다. 종말론에는 크게 3가지 유형이 있는데, 천년왕국 개념을 중심으로 분류하면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후천년설, 무천년설이 있다. 미국은 초창기에 전천년설이 중요하다가 점차 후천년설이 비등하였고, 다시 19세기말에는 전천년설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 즈음에 전천년설의 극단적 형태라고 할 수 있는 다비(John N. Darby)의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혹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가 영국으로부터 미국에 전해졌다. 세대주의는 세계 역사를 7세대로 나누고, 각 세대마다 하나님의 독특한 경륜이 있으며,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세대주의는 성서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태도를 가졌기에, 성서문자주의 혹은 축자영감설과 잘 맞아 들어갔다. 특히 세대주의는 1909년 스코필드(C. I. Scofield)의 <관주성경>(The Scofield Reference Bible)을 통해서 널리 보급되었다. 따라서 근본주의 연구의 초창기 전문가 중 한 명은 세대주의의 확산을 근본주의의 기원과 연결하는 학설을 내놓기도 했지만, 오늘날은 다양한 요인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 대세이다. 가령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근본주의의 대표 학자인 매첸(G. Machen)은 세대주의자가 아니었다.

여하튼 세대주의는 미국 부흥가 무디(D. L. Moody)를 통해서 확산되었다. 무디가 19세기말부터 부흥운동, 성경공부운동, 선교운동에 두루 개입했기 때문에, 근본주의의 기원 및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디와 관련되거나 무디가 개입한 운동들이나 그런 운동들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두 근본주의에 속하거나 근본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필요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무디의 본거지인 시카고에 있는 성경학교(가령 무디성경학교)와 신학교(가령 맥코믹신학교)나 그 학교 출신들을 모두 근본주의에 속하거나 근본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될 수 있다. 또한 ‘세계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이나 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특히 그 운동과 관련된 선교사들을 모두 근본주의에 속하거나 근본주의자라고 말하는 것도 과장일 수 있다. 무디가 학생자원운동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디가 그 운동의 주동인물은 아니다. 이 운동은 기독학생운동 등 여러 운동들이 합류하여 만들어진 운동으로, 대표적 주동인물인 존 모트(John Mott)를 근본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모트는 선교운동가인 동시에 교회일치운동가(에큐메니컬운동가)로서, 신학적 성향은 근본주의보다는 중도로 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더구나 학생자원운동 초기에 활약했던 스피어(Robert E. Speer)는 나중에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에서 현대주의파로 몰렸다.

이런 배경 가운데 미북장로교회 보수진영이 근본주의 운동에 호응하였다. 19세기말에 초교파적 성경공부운동이 전개되면서 하계 성경모임과 성경예언모임 등이 개최되었는데, 1878년 뉴욕 성경예언대회에서 근본주의의 주장을 담은 14개 조항으로 된 나이아가라 신조가 채택됐고, 1895년에 14개 조항을 5개 조항으로 축약한 ‘근본주의 5개 조항’이 채택되었다. 미북장로교회는 보수 인사들이 교단 주도권을 잡으면서 교단 안팎에서 일어난 진보적인 흐름을 막고자, 이 5개 조항을 일부 수정한 ‘5개 근본 진리’(Five Fundamentals)를 채택하여 목회자 후보생에게 동의의사를 밝히도록 했다. 이 5개 근본 진리는 성경의 성령 영감 및 그로 인한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위한 속죄라는 믿음, 그리스도의 몸의(bodily)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의 역사적 실제 등으로, 근본주의 5개 조항과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1916년과 1923년에 거듭 채택했다.

그러나 1924년 미북장로교회는 ‘오번 확언’(Auburn Affirmation)이란 문서를 총회에 제출하면서, 성경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이외의 신앙 기준을 총회가 노회에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면서, 5개 근본 진리에 맞선 6개 조항을 제시했다. 미북장로교회는 이후에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결국 선교부, 신학교, 교단이 연속적으로 분열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2. <근본주의>라는 잡지 등을 통한 근본주의 이념 확산의 단계(1910-1925년)

미국 근본주의자들은 근본주의 운동을 본격화하려고 노력했다. 첫째, 미국의 석유 부호이자 근본주의 특히 세대주의를 옹호한 장로교 평신도 스튜어트(Lyman Stewart)의 후원으로 <근본주의: 진리에 대한 증언>(The Fundamentals: A Testimony to the Truth)이라는 12권의 팜플렛이 1910년부터 1915년까지 발간되었다. 이 팜플렛으로 인하여 근본주의 운동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이 팜플렛의 필자들 가운데는 위에서 언급한 스피어 등도 포함되어 있어서, 근본주의 운동이 복잡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1919년 근본주의자들은 ‘세계기독교근본주의연맹’(World’s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을 결성하여, 근본주의를 대표하는 조직을 마련했다. 설립자는 침례교 목사인 라일리(W. B Riley)로, 그는 후에 스코프스 재판(테네시 주 대 존 토마스 스코프스 재판 혹은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을 끌어나간 주동인물이 되었다. 이 조직은 근본주의가 반대하는 또 다른 주제인 진화론을 반대하는 반진화론 운동을 강조했다.

셋째, 1925년 진화론을 둘러싼 법정투쟁이 전개되었다. 미국 테네시 주 고등학교 교사인 스코프스(John T. Scopes)가 주 재정후원을 받는 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한 주 교육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재판을 스코프스 재판이라고 부르는데, 위에서 언급한 라일리 목사가 중심이 된 근본주의 진영이 이 재판을 근본주의 옹호의 호기로 삼고자 미국 최고의 변호사요 3차례나 대선후보를 지낸 저명인사 브라이언(W. J. Bryan)을 고용했다. 전국적인 관심 속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근본주의 진영의 기대와는 달리 재판에서 법률적으로는 승소했지만 홍보면에서 패소하면서 근본주의의 반진화론이 조롱당했고 그 결과 근본주의의 위상이 결정적으로 실추되는 계기가 되었다.

3. 근본주의자들의 근본주의 교파 형성의 단계(1925년~)

소위 스코프스 재판 이후, 근본주의자들은 수세에 몰리면서 오히려 강경화 성향을 보였다. 이런 과정에서 여러 가지가 추진되었다. 첫째, 선교 분쟁이 일어났다. 가령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이 선교지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선교 분야에도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이 벌어졌고, 이런 갈등이 역으로 본국인 미국에 재수출되었다. 미북장로교회는 선교 문제로 갈등했고, 그 결과 1933년 교단 선교부에 대항하는 대립선교부(독립장로교선교부)까지 결성되었다. 둘째, 신학교 분쟁이 일어났다. 신학교 노선 분쟁이 비화하면서,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갈라져 나왔다. 셋째, 교단 분쟁이 일어났다. 선교 분쟁 및 신학교 분쟁의 핵심인물인 매첸이 소속 노회의 치리를 거부하면서, 1936년 미북장로교회로부터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가 갈라져 나왔다. 이런 미북장로교회의 분열 이외에도, 근본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나타내는 군소교단들이 설립되었다.

이밖에 새로운 운동들도 일어났다. 1908년 설립된 ‘[미국]교회협의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에 반대한 조직이 1940년대에 두 개나 설립되었다. 먼저 1941년 강경파인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매킨타이어(Carl McIntire)의 주도 하에 설립되었다. 또한 1942년 [미국]교회협의회에 반대하는 동시에 근본주의와도 차별화를 추구한 집단이 ‘전국복음주의자연맹’(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을 결성했고, 후에 ‘신복음주의자’(neo-evangelicals)로 자처하였다.

III. 근본주의가 선교 초기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초기 선교사들은 근본주의자인가? 특히 마펫(모페트) 선교사는 근본주의자인가?

초기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자였다는 주장은 초기 선교사에 대한 개인 및 집단 연구를 통해 수정되고 있다. 가령 대표적인 초기 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근본주의자였을까?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신학교 시절부터 복음적인 열정에 불탔고,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확인되지만, 이 두 선교사를 근본주의자로 단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연구는 거의 없다. 오히려 옥성득은 최근 연구에서 초기 선교사들의 이미지를 “한국 종교 문화를 파괴한 근본주의자에서 성취론으로 기독교 토착화의 길을 연 온건한 복음주의자”로 바꾸려고 시도한다.

이밖에 초기 선교사를 근본주의자로 보려고 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인물 중에 게일(J. S. Gale)과 마펫(모페트, S. A. Moffett)이 있다. 물론 게일이 세대주의 문서인 블랙스톤(W. E. Blackstone)의 <예수의 재림>(Jesus is Coming)을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종말론적 입장은 그의 신학 성향 전부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게일은 성경번역을 하면서 성서문자주의가 선호하는 직역보다는 의역을 선호했고, 이것을 관철하기 위하여 독자적으로 성경을 번역, 출간했다. 마펫의 경우, 최초의 장로교신학교인 ‘대한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여 신학교육을 통해 한국교회를 근본주의 교회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근본주의자라고 단정할 수 없는 사례가 너무 많다. 그는 미북장로교회가 분열함에 따라 국내 미북장로교회 선교부도 분열하였을 때, 대다수 미북장로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새로운 근본주의 교단의 선교부가 아닌 미북장로교회 선교부에 계속 남았고,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그에게 선교 프로젝트를 제안했을 때 그것을 거부하였다. 마펫이 ‘옛 복음’을 중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근본주의적이라기보다는 보수적인 신앙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마펫이 근본주의자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은 보다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초기 한국교회는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초기 한국교회는 보수신학, 근본주의가 관심 가진 성서론과 종말론이 중요한 신학적 주제였고, 해방 전까지 심지어 최근까지 한국의 신학 논쟁이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먼저, 초기 한국교회가 성서문자주의적 경향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초기 한국교회가 근본주의 교회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국장로교회의 경우, 20세기 2/4분기로 가면서 점차 교단 내 신학 논쟁이 치열해졌는데, 이때 근본주의적 태도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교회가 보여준 성서문자주의적 경향은 달리 설명될 수 있다. 먼저 선교 초기에 아직 복음만 전래되었을 뿐 신학이 소개되거나 신학적 발전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새신자가 성서를 읽으면서 성서를 씌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했다. 또한 한국인은 경전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었고, 경전 읽기는 암송이 주를 이뤘으며 경전 해석도 ‘술이부작’(述而不作) 식으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기보다 전통적 해석을 계승하는 것이 우선시되었다. 따라서 한국인 새신자는 신앙 단계로나 문화 배경으로나 성서문자주의가 자연스러웠다.

또한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 중에서 특히 길선주를 근본주의자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종말론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길선주의 신학 경향이 보다 폭이 넓다는 것이다. 길선주의 <해타론>과 <만사성취>는 그의 종말론과 관련이 있다고 평가되지만, 그는 이 서적들에서 성서문자주의 이외에 토착문화 및 전통종교와의 적극적인 만남을 통해 토착화신학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최초 7명의 장로교 목사들의 신학도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들이 넓은 의미에서 보수 신앙에 속했지만, 각자의 개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석진의 경우, 매우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신학적 입장을 보인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 1970년대 서구 선교계의 최대 스캔들인 ‘선교사 유예’(missionary moratorium)라는 주제를 50년 정도 앞서서 주장하기도 했다. 따라서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선교사에 무조건적으로 예속된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선교사의 영향을 받되, 그런 영향을 자기 나름대로 재창조하는 능력이 있었다.

초기 한국교회 새신자나 목회자만이 아니라, 장차 신학교육의 틀을 놓을 초기 신학자들도 모두 근본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흥미롭게도 한국장로교회의 젊은 엘리트들이 미북장로교회 분열의 화약고가 된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하면서, 분열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은 프린스턴신학교 이후 다양한 신학교로 진학하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프린스턴신학교를 비롯한 미국장로교회 신학교들이 신학교보다는 목회자 양성소의 특성을 강조한 세미너리(seminary)였기에 박사학위과정을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유학생들의 신학관, 유학생들이 진학한 신학교의 신학관, 유학생들이 귀국 후 한국교회지도자로서 보여준 신학관은 일정한 상관성을 보였고, 이것이 한국교회의 신학적 판도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인물로 박형룡, 한경직, 김재준을 들 수 있다. 흔히 박형룡은 보수, 한경직은 중도, 김재준은 진보로 분류된다. 그러나 세계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 모두는 넓은 의미에서 보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박형룡은 말할 것도 없지만, 한경직도 보수였고, 신학 논쟁의 한복판에 섰던 김재준마저 자신의 신학과 신앙을 설명하면서 ‘신학은 자유, 신앙은 보수’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보수성은 서구에서 넓은 의미에서 보수에 속한 신정통주의자 칼 바르트가 한국교회에서는 진보의 대명사로 취급되는 사실이 방증이 될 수 있다.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구별 필요성

한국교회는 거듭 이야기했듯이,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하고, 그런 성향을 지닌 개인이나 집단이 다수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연구에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근본주의가 기독교 보수신앙 혹은 복음주의의 일부인데, 실제 위상에 비해서 지나치게 강조되고 중요시되고 있다. 이것은 연구 성과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국교회를 근본주의 관점에서 다룬 연구는 많지만, 복음주의 관점에서 다룬 연구는 많지 않다.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복음주의 연구가 우수한 학자에 의한 우수한 연구 성과의 덕분으로, 그 학문성을 인정받고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세계 복음주의 통사는 물론이고, 권역별 혹은 주요 국가별 복음주의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세계 복음주의에서 가장 활발하고 많은 교인을 지닌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고 미비하다. 이제 관심을 근본주의에서 복음주의로 돌릴 필요가 있고, 축적된 복음주의 연구를 토대로 근본주의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IV. 결론

우리는 위에서 근본주의의 태동과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근본주의는 역사상 존재했던 운동이고,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역사상 특정 시기에 존재하고 나름의 특성을 가진 운동이기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면 득보다 실이 많다. 한국교회와 근본주의라는 주제는 한국교회와 복음주의라는 보다 넓은 맥락 안에서 접근하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일종의 혐오 용어로 사용될 수 있기에,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자칫하면, 근본주의의 관점에서 이뤄지는 연구는 진실 규명보다 집단이기주의에 영합하는 호교론이 되기 십상이다. 1950년대 김재준 신학 논쟁으로 인해 박형룡, 한경직, 김재준 사이에 입장차가 났을 때, 한경직은 양심의 자유의 보장까지 훼손하는 신학 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무릇 모든 신학 논쟁은 구속이 아닌 자유를 가져와야 한다는 교훈을 제시한 셈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안교성 목사(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 역사신학 교수)

필자 인터뷰

Q. 보수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라는 용어의 개념과 그 차이점이 궁금합니다.

한국교회를 가리킬 때, 보수[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 혹은 청교도적, 경건주의적 등의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용어들은 각각 고유한 의미가 있어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보수주의’는 어떤 절대적인 개념이나 범위를 가리키기보다 상대적인 성향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보수주의의 내용이 결정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용어들은 특정 시공간의 맥락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 용어입니다. 먼저 ‘청교도’는 영국교회(성공회)의 완전한 개혁 특히 신학을 필두로 교회정치, 교회전례 등을 포함한 개혁을 추구한 개혁세력입니다. 청교도는 점차 정치 특히 공화정과 연결되면서, 왕정복고 이후 정치적 거세를 당했고, 그 결과 청교도 시대의 후반부에는 비정치화하여 내면적인 정화에 집중했습니다. 청교도는 신학보다는 윤리적인 위선을 꼬집을 때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건주의’는 유럽 대륙 특히 독일의 루터교 내의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루터교 정통주의가 교리를 너무 강조하는 반면 경건을 소홀히 하자, 신학과 신앙생활의 균형을 추구하려고 했던 노력입니다. 경건주의는 교회 내적으로는 성경 공부, 경건 훈련, 소그룹 결성, 교회 외적으로는 선교, 사회봉사를 했습니다.

‘복음주의’는 주류교회가 경직화되는 과정에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운동에서 시작되었는데, 곧 영국의 웨슬리 부흥운동과 미국의 대각성운동입니다. 복음주의는 전 세계적인 초교파 운동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운동의 특성에 대해서는 베빙턴이 제시한 네 가지 특성이 유명합니다. 즉 성서주의, 십자가 중심주의, 회심주의, 행동주의입니다.

‘근본주의’는 19세기말부터 시작하여 20세기초에 본격화했고 20세기 2/4분기부터 약화되기 시작한 운동입니다. 근본주의는 신학 특히 성서론, 과학, 문화, 정치 등에 있어서 현대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인데, 강경화되면 상대방에 대한 배타성, 악마화, 공격성 등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20세기 후반에는 문화, 정치 영역에서 큰 목소리를 냅니다.

Q. 보수신앙은 대부분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에 뿌리를 두고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전의 대부분 연구가 한국교회의 보수성을 초기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와 연결하는 주장을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성립되려면, 먼저 세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보수성의 구체적인 내용을 규명하고, 근본주의 운동에 대해 구체적인 이해를 하며, 초기 선교사들의 구체적인 신학을 밝혀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보수성은 점차 신학적으로 세련되었지만, 처음에는 기본적으로 경전과 학자를 존경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경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선생 역할을 한 선교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기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자라고 하는 주장은 보다 엄밀한 학문적 규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서론은 근본주의가 나오기 이전에 이미 구(舊)프린스턴신학이 구성한 것을 수용한 것입니다.

Q. 미국 교회도 그러하지만 근본주의가 있는 곳에는 분열이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왜, 근본주의가 들어가면 분열이 일어나는지요? 그 원인과 속성은 무엇인지요?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어떤 이념에 대한 확신과 그런 확신에서 비롯된 행동이 중심이 되는 운동입니다. 이런 확신은 상대방에 대한 배타성, 악마화, 공격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 남의 입장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 결과 서로 입장이 다르면 세포분열 현상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교파이든 극단적인 태도를 취할 경우는 교파 분열이 많이 일어나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가령 장로교회 등 교리를 중시하는 교파는 교리 차이로 인하여 분열되고, 오순절교회 등 은사(혹은 경험)를 중시하는 교파는 은사(혹은 경험) 차이로 인하여 분열됩니다.

Q. 근본주의는 세대주의와 직결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한국 교회의 성장과 부흥은 여기에 바탕을 두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은 무엇인지요?

근본주의가 태동하는 19세기 말에, 영국의 다비가 주장한 세대주의(혹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가 미국에 전파되었고, 근본주의 선구자들이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센딘(E. R. Sandeen) 같은 학자는 근본주의의 기원이 세대주의와 직결한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그 이후 마르스덴(G. M. Marsden) 같은 학자는 문화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세대주의나 전천년설은 종말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세상을 개선하기보다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회 개혁보다는 복음전도를 중시합니다. 따라서 한국교회 초기에 복음전도가 필요하고 국가적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을 때는, 이런 이론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면도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다음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벌어진 선교는 처음부터 복음전도만이 아니라 종합적인 선교(오늘날 용어로 전인선교)적 특성이 강했습니다. 교회 역사가 길어질수록 교회는 사회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최근 한국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도 이런 측면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Q. 끝으로 근본주의의 맹점과 앞으로 한국 교회의 과제는 무엇인지요?

근본주의가 자신이 중시하는 것을 확신하고 확신에 따라 행동할 때, 그런 자유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그런 자유를 자신에게는 적용하면서, 남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더구나 근본주의가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을 적대시하기 시작하자, 사회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습니다. 근본주의는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신학, 과학뿐 아니라 문화, 정치 영역에서도 이런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관용과 대화의 정신을 갖추는 것이 시급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는 소통 부재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근본주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가령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의 헌법 중 교리를 보면, 근본주의의 성서론이 통합측 성서론보다 더 극단적입니다. 또한 통합측의 헌법 중 정치를 보면, 첫 번째가 양심의 자유입니다. 나의 양심의 자유가 중요한 만큼, 상대방의 양심의 자유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태도를 취할 경우는, 자신과 남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울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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