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뮤지컬 가스펠의 한 장면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발금을 봐주겠다며, 한 제자의 발을 들여다보고는 “기뻐하라고 써있군!”하고 말한다. 기독교인으로서의 나의 신앙은 이 장면과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비장해지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20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내가 지지한 후보가 졌을 때도 난 그다지 비장해하지 않았다. 애정이 적어서가 아니다. 상당히 오래 시간을 나의 후보에 대해 고민하고, 알아보고, 주변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이건 또 무슨 문제지? 새로운 게임이 시작 되려나 보다! 무슨 더 좋은 일이 있으려고 이러나?”하는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복음은 복된 소식이기도 하지만 기쁜 소식으로도 읽을 수 있다. 6-70년대 명동에 있던 <기쁜소리사>는 가전제품. 특히 전축과 휴대용확성기기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상점이었다. 매우 독특했던 이 이름을 사람들은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복음보청기>와 비교해서도 말이다. 복음이 미래에 대한 약속이나 희망이라면 기쁜 소리는 즉각적으로 몸이 화답하게 되는 이름이다. 복음이 종교의 울타리 안에 있는 말처럼 들린다면, 기쁜 소리에서는 그 울타리가 사라진다. 난 복음이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기쁜 소식이기를 바란다. 그래야 임마누엘이 아닌가? 입맛이 돌아오고, 심장이 뛰며 혈액순환이 좋아지고, 상상력이 솟아나며, 뭔가 일을 꾸미고 싶어지는, 내가 어릴 적부터 성경을 통해 들은 소식은 그런 소식이었다.
나는 지금 비장하지 않다. 나는 기쁘다. 무언가 꿈틀꿈틀 꾸미고 있다. 속으로 낄낄거리며. 이럴 땐 빨리 친구를 만나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 깔깔거리고 싶으니까. 떡을 나눌 때 비로소 그분의 임재를 알아차릴 수 있다. 기쁨은 몸을 가진 우리가 하나남께서 허락하신 풍요를 누릴 때 가능한 것이다. 기쁨이란 그분이 오늘도 함께하심에 대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광야가 아닌 가나안에 주는 메시지다. 모세가 광야의 황량함 속에서 굶주림을 견디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면, 예수는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의 땅을 주셨으니 이미 주신 것을 누리라는 누림의 메시지를 전했다. 다만 이 누림의 길은 사랑이며, 예수께서 그랬던 것처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 그러나 전쟁과 굶주림을 경험한 세대는 활짝 웃기 어렵다. 이웃에 대한 스스럼없는 사랑도 힘들다. 그들은 아직도 광야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등교하던 고등학생들이 길가의 한 트럭에서 발생한 화재의 진화를 도와 용감한 시민 표창을 받았다는 뉴스가 있었다. 어떤 생각으로 도움을 주었느냐는 질문에 한 학생이 답했다. “생각을 하고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그냥 도움을 줘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상황에 또 놓여 있어도 도움을 줄 것 같아요.” 스스럼이 없다. 누림이 없는 세대는 생각이 많다. 복음을 비롯해서 많은 것을 정신화하고, 이념으로 갈라져 싸운다. 이제 생산은 넘친다. 더 많이 생산하도록 축복해달라는 기도는 그만해도 된다. 잔치 즉 누림과 나눔이 하나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누림이 없이는 기쁨이 불가능하고 기쁨이 없이는 나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