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정치와 니케아의 교훈
주술정치와 니케아의 교훈
  • 박성철 목사
  • 승인 2022.02.25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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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박성철 목사(2022 기독교대선행동 정책위원장)

얼마 전, 모 기독교 방송을 통해 325년 공의회가 열렸던 비두니아 주(州) 니케아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별궁과 바실리카가 이즈니크(Iznik) 호수 아래 잠긴 채 터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갓 통일된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위해 기독교회의 기독론을 통일해야 했고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아리우스(Arius)파의 유사본질(homoiousios)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동일본질(homoousios)론을 정립하였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하나의 신성을 누리신다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은 삼위일체론의 기반을 닦음으로써 로마 제국 내 소수 종파였던 기독교가 세계 종교(Weltreligionen)로 발전할 수 있는 신학적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1,700년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니케아 공의회의 터가 황폐하게 남아 있는 모습을 보자니 교회란 무엇이며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소아시아와 로마 그리고 유럽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갔던 교회를 추동했던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교회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눅 16:16)을 세상에 선포하고 실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자 “지체의 각 부분”(고전 12:27)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동체로서 교회는 세상의 가치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쟝 칼뱅(Jean Calvin)의 『기독교강요』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교회는 “우리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가시적 교회(ecclesia visibilis)와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눈에만 보이는” 불가시적 교회(ecclesia invisibilis)로 구분된다(Institutio 4.1.7). 그리스도인은 가시적 교회를 존중하면서도 불가시적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시적 교회의 양적 성장이 불가시적 교회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가시적)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담아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 교회에 요구되는 것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노력은 언제나 사회·정치적 변화에 영향을 받았다. 그 변화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갈 때 교회의 성장은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교회가 그 가치를 잃어버린 채 양적 성장이나 사회적 헤게모니 혹은 정치적 권력에 집착할 때 하나님 나라는 그 가운데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몰락의 길을 걸었다. 교부 시대 때부터 교회와 국가(혹은 신학과 정치)의 관계가 중요한 신학적 주제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에도 양자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고민은 정치적 변화 속에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에 대한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21세기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양적 성장이나 종교적 영향력과 같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인 것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하는 얄팍한 권모술수가 아니다.

지금 한국교회에게 요구되는 것은 칼 바르트(Karl Barth)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에서 밝힌 바와 같이 특정한 사상이나 체계 혹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교회가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방향과 노선”(Richtung und Linie)을 제시하는 것이다(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 60). 이는 2022년 제20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한국교회에도 동일하게 주어진 사명이다.

하지만 최근 유력 대선 후보에 의해 야기된 ‘주술정치’ 논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극우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근본주의 교회의 목사들과 교인들은 급변하는 대선 정국에서 전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과거 이들은 한국 사회의 전통이나 문화를 ‘미신’(迷信)이나 ‘속설’(俗說)로 치부하면서 반기독교적인 가치라고 몰아붙였음에도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선 후보의 주술 의존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주술정치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면서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생각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게 정치적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밝힌 바와 같이 국가가 하나님을 대신하려 하거나 정치권력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왜곡될 때 그리스도인은 저항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칼빈주의 강연』, 109; 『정치강령』, 62).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할 수 있는 지혜와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롬 16:19). 그러므로 한국교회 내 적지 않은 이들이 주술정치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정당화하는 현상은 한국교회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왜곡된 교권주의(敎權主義)의 단면을 보여준다.

물론 주술정치에 대한 비판에 앞서 사회·정치학적 측면에서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초자연적 존재나 신비적 힘을 빌어 해결하려는 방법으로서 주술(呪術)과 한국 사회의 민간신앙으로서 무교(巫敎)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종교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무교는 막스 베버(Max Weber)가 규정한 유교,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같은 세계종교 혹은 고등종교와 구분되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Gesammelte Aufsätze zur Religionssoziologie I, 237-238). ‘무’(巫) 혹은 ‘무속’(巫俗)은 무당(巫堂) 혹은 박수(博數)와 같은 ‘샤먼’(shaman)를 통해 나타나는 종교현상을 일컫는 말로서 문화사적 측면에서 주술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에 1975년에 유동식 선생은 이를 ‘무교’라 부르며 한국적 민간신앙의 기본요소로 재평가하였다(『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235~237, 345~346).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주술과 무속은 혼재된 채 사용되고 있다.

물론 무속도 문화사적 해석이 없이 현대 사회에서 적용될 때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과거 무속은 개인적 신앙보다 지연이나 혈연을 중심으로 한 생활공동체의 신앙이었기에 일정한 폐쇄성을 띄었고 그 생활공동체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배타성을 표출했다.

또한 구체적인 생사화복(生死禍福)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만큼 근대적 의미의 윤리 의식이 결여되었다. 하지만 교통과 운송 장비의 한계로 인해 생활공동체 간의 지역·문화적 단절이 분명했던 고대 사회에서 배타성과 윤리적 한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근대 사회의 등장 이후 민족국가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양자는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였고 이로 인해 무속은 사적 영역으로 제한되었다.

점과 주술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문제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실현하려는 도구로서 점이나 부적과 같은 주술은 정치 영역에서 보다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양산한다. 신비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정치권력을 획득하려는 욕망은 공적 영역에서 타인의 피해를 무시하기에 주술과 정치의 결합은 극단적 이기주의와 폭력성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주술정치의 위험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현대 사회에서도 정치적 영역의 왜곡과 종교적 가치의 변질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가치를 내세우지만 각각의 가르침을 왜곡한 채 정치 영역에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세계종교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윤리체계가 존재하지 않는 주술적 신앙체계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기에 주술정치는 공공성(公共性)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사실 한국 사회는 이미 박근혜 정권을 통해 주술에 물든 비선 정치가 불러온 국정농단(國政壟斷)이라는 비극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촛불혁명의 열기가 채 5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금 주술정치가 대선 정국을 어지럽히고 있는 현실에 직면하였다. 이는 한국 정치의 퇴행을 알리는 적신호이다.

기대했던 정책 선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유권자의 실망이 날로 커지고 있는 역대급 비호감의 대선 정국은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게다가 정책 선거의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언론들마저도 무관심으로 일괄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어둠에 잠겨 있을수록 더욱 그리스도인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사람들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마 5:14-16). 현 대선 정국에서 그리스도인이 주술정치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주술 자체는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중대한 죄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미가서 5장 12-13절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원수들의 멸망과 이스라엘 자체의 정화를 선포하면서 제거해야 하는 잘못된 풍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내가 또 복술을 네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쟁이가 없게 될 것이며 내가 네가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희 가운데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바알의 선지자 850명과 맞서 싸운 엘리야 이야기(왕상 18:19-40)를 비롯하여 구약성서는 많은 곳에서 “복술”이나 “점”과 같은 주술을 분명하게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금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술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이는 정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트럼피즘과 극우 이데올로기

과거 군사독재 시대에 누구보다 강하게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외쳤던 근본주의 교회들이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선거법을 위반하며 주술정치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명은 주술정치를 정당화함으로써 특정 대선 후보의 당선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소프트 파워(soft power)의 중심국으로 부상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트럼피즘(Trumpism)의 단초를 보이는 한국 사회가 대전환의 기점에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사회적 헤게모니를 쥐고 기득권을 누리던 주류 세력이 약화된 사회적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해 비주류 세력에 대한 강력한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트럼피즘은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퇴행을 불러올 수 있는 전형적인 혐오와 차별의 정치 현상이다.

사실 2016년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당선되었을 때 미국 사회의 급격한 퇴행을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피즘의 부정적 영향력은 미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면 수많은 문제를 양산하였고 그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분석과 같이 혐오와 차별의 정치는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는 동일한 기제에 의해 작동한다(Die Befreiung der Unterdrücker, 529-530). 그러므로 그 단초가 나타났을 때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심각한 사회적 부작용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변질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극우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교회 지도자들이 여전히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정치적 변화 앞에서 스스로 결정하기보다 종교적 권위를 가진 이들에게 의존한 채 사유하지 않으려는 추종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의 제정일치(祭政一致) 국가에서나 어울리는 현상으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적합하지 않으며 성숙한 시민의 자세도, 그리스도인의 자세도 아니다. 이번 주술정치 논란은 한국교회에게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와 공적 책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근본주의 사상이 주류적 흐름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도 자본의 투자나 경제적 문제에 대해 그 신뢰하는 교회 지도자의 말을 따르는 이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90년대 이후부터 기독교 경제윤리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교회 지도자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며 전문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없다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독 정치적인 것에 대한 왜곡된 인식론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정치윤리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져야 한다.

몰락의 길 아닌, 올바른 길로 나아가야

물론 필자는 주술정치를 정당화하는 교회 지도자들과 추종자들이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외면한 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정치권력이라는 세속의 방식에 기댈 때 그 의도와 관계없이 몰락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가 기득권과 정치 이데올로기로 인해 주술정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15세기 오스만 투르크(Ottoman Turk) 제국의 급속한 부상과 함께 몰락한 니케아보다 더욱 급속하게 쇠퇴할 것이다.

그러므로 니케아의 교훈은 고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주술정치에 직면한 21세기 한국교회의 문제이다. 부디 제20대 대선 맞아 한국교회가 지금까지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올바른 길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기독교대선행동 정책위원장 박성철 목사
기독교대선행동 정책위원장 박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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