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펠투데이 창간 6주년 특별 대담] 혼란스러운 교계 현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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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스펠투데이 보도팀
  • 승인 2024.03.2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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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_박은호 목사(신앙고백모임 회장, 정릉교회담임)
진행_박진석 목사(본보 편집인)
신앙고백모임 정기총회.

Q. 먼저 2024년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에게 전하는 부활절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뿐만 아니라,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모든 인류에게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모든 생명 가진 분들에게 가득하게 넘치시기를 빕니다. 특별히, 분단 79주년의 장벽 속에서도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북녘에 남겨진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큰 소망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Q. ‘신앙고백모임’이 지향하는 ‘한국교회의 갱신과 회복’은 무엇입니까?

신앙고백모임은, 예장통합 제104회 총회 이후 10월, 서울에서 목회하는 아홉 분의 목회자들이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당시, 보름 전에 모였던 예장통합 제104회 총회가, 살아 있는 교단 헌법 28조 6항을 잠재우고 ‘명성교회의 세습’을 용인하는 수습안을 통과시키면서 불법 결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 문제가 계기가 되어 ‘신앙고백모임’이 시작되었죠. 세습 문제가 모임의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위 ‘반명성’ 즉, 특정 교회를 반대하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닙니다.

명성교회가 어떻게 ‘교회의 머리’가 아닌데, 어떻게 명성교회를 기준으로 ‘친명성’ 혹은 ‘반명성’이라는 프레임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어불성설입니다. 신앙고백모임은 단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지 않고 있다!”고 외친 것일 뿐입니다. 우리 교단 총회가 이 문제를 두고 자정능력을 회복하기를 기대했지만, 끝내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신앙고백모임은 지난 2021년, 한국교회의 치욕스러운 부끄러움을 먼 훗날 우리 후대들이 잊지 않고 회개하여 개혁교회 정체성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을 담아, 『돈 권력 세습』(명성교회 사유화에 맞선 항거와 참회의 기록)이라는 백서를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신앙고백모임은, 모임의 본래 취지를 살려서 한국교회의 개혁과 회복을 위한 ‘그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세계 교회와 더불어 거룩한 공교회가 걸어가야 할 목회신학적인 고뇌와 응답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Q. 목회 현장에서 부딪히는 근본주의는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합니다.

한국교회가 마주하고 있는 큰 장벽이 한 가지 있습니다. 흔히,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한국교회가 마주한 가장 큰 적은, 외부의 상황이 아니라 내부 문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 내에 만연하고 있는 ‘근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주의를 과거 성서 시대로 돌아가 표현해본다면, 예수님 당시에 만연했던 유대종파 중 ‘사두개파, 바리새파’와 대동소이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두개파는 당시 종교 권력을 가진 핵심 세력이었는데, 대단히 세속화된 정치적인 종교집단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토라 말씀의 본의(本意)를 무시하고 수많은 울타리 장벽을 만들어, 본래의 말씀에 대한 접근을 차단해버린 경건의 겉모양만 갖춘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 안에 만연하고 있는 근본주의적인 신앙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Q. 한국교회는 교파와 교단마다 신학이 있는데 왜 근본주의화 되었을까요?

타 교단은 차치하고라도, 소위 장로교회라는 이름을 내건 교단 교파는 백 여 개를 훌쩍 넘기고 있습니다. 초창기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하나로 출발했지만, 흔히 신학적인 견해 차이로 기장과 합동이 나누어졌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선교 역사와 분열사의 속살을 파헤쳐보면, 신학적인 문제보다는 돈과 종교, 권력의 정치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불거진 치부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포장은 신학적인 문제로 가리고 있지만, 그 내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과 당시 유대종교 당국자들을 보시며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더러운 돈을 탐하고 종교 권력을 강화시키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고 하신 그 말씀에 「딱 맞는 교회」의 실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신의 치부를 덮는 데 가장 유용한 방법이, 신학적인 교리를 빙자한 ‘신앙의 자기합리화’였죠.

이것을 이용한 신학과 신앙의 행태가 ‘근본주의’로 나타났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폐해는 매우 극단적입니다. 서로 상대 교단을 비난합니다. 심지어, 이단시하고 정죄합니다. 다른 교단의 신학과 신앙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까지 단죄하기도 합니다. 자기들만의 벽을 더욱 높게 더욱 두껍게 쌓기만 합니다. 담을 허무시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는 정반대로 역행하는 행태이지요.

Q.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를 혼돈, 혼재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은 주의(-ism)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학하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 역사 속의 신학적 변이(變異)로 등장한 근본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를 혼돈, 혼재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같지 않습니다.

‘복음주의’는 닫혀 있지 않습니다. 굉장히 유연합니다. 열려 있습니다. 예배당 안과 예배당 밖이 서로 구별은 되지만 상호 관계성 속에서 연속성을 추구합니다. 그러다 보니, 복음주의는 항상 예배당 밖의 세상에 대하여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신학과 신앙을 견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주의’는 복음이라는 확고부동한 상수(常數)를 가지고, 사람이 만들어 놓은 비본질적이고 비 복음적인 기준선(基準線) 안에 절대로 갇히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그 길’이다. ‘그 진리’이다. 그리고 ‘그 생명’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내 아버지께로 올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공적 운동을 하시는 동안 항상 세상 한복판에 돌진하여 파고 들어가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을 비추셨습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땅만 아니라 이방인의 땅 이방인에게로 스스로 경계선을 넘어가셨습니다.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이 상종도 하지 않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과 한 밥상에서 먹고 마시셨습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복음이 아닌 사람이 만들어 놓은 교리나 전통, 신학이라는 틀거리(싸리 울타리) 안에 겹겹이 싸여 갇혀 있습니다. 세상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항상 세상을 대할 때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신학적인 교리나 전통, 신앙적인 인습(因習) 같은 전제(前提)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담을 쳐 놓고 대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모순되게도 스스로 자꾸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비 복음적인 틀 안에 갇혀버리는 것이지요. 상대적인 그 기준, 프레임의 선(線)이 너무 굵고 두터워서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모든 것이 파격적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거하실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명기 21장 23절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토라의 경계선을 허물고 십자가의 형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까? 어떻게,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었을까요?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 속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 있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Q. 한국교회의 근본주의는 특히 이데올로기화되고 사회 정치화되어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가 이들의 온상으로 지목되어 비판받고 있습니다.

근본주의 이데올로기화와 정치화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패악(悖惡)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근본주의의 복음에 대한 폐쇄성이 굳어지면서 이데올로기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슈가 있을 때마다 그 극단적인 표현이 사회적으로 정치화라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광화문 집회로 고착된 ‘태극기부대’로 상징화가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문제입니다. 거룩하고 고상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저렇게 싸구려 이데올로기가 되고, 극단적인 정치화가 되어서 배타적인 집단으로 전락시켜버렸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시대 속에서 항상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흑백논리의 좌와 우 어느 한쪽에 서 있는 정파적인 정치성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헤롯당파와 적대적이었습니다. 종교권력자들인 사두개파와도, 특히 하나님의 토라를 이데올로기화시킨 바리새파 사람들과 항상 긴장과 갈등 관계였고 충돌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그들의 논리와 전통, 정치적인 이슈에 뛰어 드시면서도 그들의 거짓과 불의, 의를 가장한 외식(外飾)에 대하여 인습타파적(因襲打破的)인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자비하심으로 그 문제의 본질을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전환시켜버리셨습니다. 시대 속에 펼쳐진 대로가 아닌 좁은 길, 좁은 문을 개척하시면서 세상 방식과 거꾸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데올로기화 되어버린 한국교회의 근본주의는, 세상 방식을 답습하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실천적인 삶은 배척하고 정치적인 구호와 말로만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판 바리새파의 행태이고 하나님 나라에 반하는 무서운 누룩입니다.

Q. 근본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예루살렘 성전 종교의 종교권력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외식하는 신학과 신앙을 버리고, 실천적인 신앙인으로 다시 거듭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짜, 십자가의 길을 걷는 실천적 십자가 신학과 신앙에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고난으로 끝나버리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 아니라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그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입니다. 동시에 부활은 그냥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신 나사렛 예수님의 그 부활이 진짜 부활입니다. 목회도 십자가와 부활의 상호성 속에서 다시 구축되어야 합니다. 신학도 십자가와 부활의 상호성 속에서 다시 구축되어야 합니다. 선교도 십자가와 부활의 상호성 속에서 생명력 있는 선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도는, 그냥 골고다 언덕 위에 달리신 십자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의 도입니다.

Q. 현대사회에서 선교적 방법으로 다양한 신학적 접근과 이론들이 연구, 발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연구들이 흔히 ‘종교다원주의나 혼합주의’로 매도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이,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상대주의(相對主義), 상대화(相對化)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21세기는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탈진실)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기독교 복음의 정체성을 지켜가야 하고, 또 그 복음을 증언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주장하고 배타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복음의 실체를(실천적 무신론자의 삶이 아닌) 삶의 실체로 바꾸어 내지 않으면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럴 때, 비기독교인들의 세상을 향해 말이나 교리적인 증언의 방식으로는 복음을 담아낼 수가 없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성육신 신학과 신앙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복음이 부활을 지향하는 삶의 실체로 드러나지 않고서는 선교 현장인 세상 한복판에서 백약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나 혼합주의를 말하기 이전에, 기독교인인 우리가 먼저 실천적인 무신론자가 아닌가,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자가 아닌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은호 목사

Q. 근본주의에 관련하여 정기 포럼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오는 4월 29일에 높은뜻광성교회에서 『근본주의의 현상과 교리(가제)』를 주제로 신앙고백모임 제5차 포럼을 하려고 합니다. 서울신학대학교의 박영식 교수님이 「근본주의와 창조과학운동」이라는 강의를 통해서,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스며들고 있는 근본주의적인 문자적인 창조과학 운동의 폐해와 문제점을 고찰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창조신학을 재정립하려고 합니다.

이어서 아신대학교 김학봉 교수님이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신학적인 입장에서 명확하게 성찰하고, 한국교회 갱신과 회복의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이 포럼에서 창조신학의 재정립을 위해 활발하게 연구하시는 장로회신학대학교 김명용 전 총장님이 논찬해주시고,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에 대해서는 새문안교회에서 목회하시는 이상학 목사님이 현장목회자로서 논찬하실 겁니다.

Q. 앞으로 신앙고백모임의 중장기 기획은 무엇입니까?

신앙고백모임은, 한국교회 갱신과 회복이라는 과제 앞에서 현직 목회자들과 자문해주시는 교수님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초창기이기 때문에 주로 5, 60대 목회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음 세대 목회자인 3, 40대 젊은 목회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전환기 시대 속에서 건강한 복음주의 목회와 에큐메니칼 신학과 신앙을 한국교회 안에 정립해가는 토양으로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신앙고백모임은, 실천적인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과 신앙을 통하여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개척해가고자 하는 신학운동과 목회운동입니다.

Q.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산적한 한국교회의 병리 현상을 해결해 가는데, 신앙고백모임이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소박한 자신의 채전(采田) 한쪽 귀퉁이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처럼, 소박하게 가지를 뻗어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그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바로 그 겨자씨 한 알이 자라는 그곳에서부터 또다시 시작하는 나라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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