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답’을 찾아서] “영혼의 질문에 하나님의 답을 전하는 설교자”
[2024년, ‘답’을 찾아서] “영혼의 질문에 하나님의 답을 전하는 설교자”
  • 이상준 목사
  • 승인 2024.02.23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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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이상준 목사(1516교회)

이상준 목사는 연대 영어영문학과 및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온누리교회에서 25년간 차세대, 청년, 성인사역, 두란노에서 천만큐티사역을 했다. [보라통독], [신의 언어] 등을 저술했고 [다윗의 장막] 등을 번역했다. 2023년 1월, 교회개척운동의 비전을 갖고 분당에 1516교회를 개척했다._편집부


필자는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아이였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 때 성경을 일독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영혼의 어두움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로 “이 생명의 말씀”(행5:20)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딤후3:17) 하는 성경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어릴 적부터 인생과 세상,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많은 질문을 품고 있었는데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성경 선생님이 되어주셔서 말씀을 깨우쳐주시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후로 사람에게 질문하면 사람의 대답을 듣게 되듯이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성경을 읽고 질문하고 하나님의 답을 듣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설교는 무엇일까? 장신대에서 설교학 수업시간에 고 정장복 교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설교는 “하나님의 성언 운반”이라고 믿는다. 또한 본훼퍼가 고백한 대로 설교는 회중 가운데 걸어다니시는 그리스도시다. 또한 기록된 말씀은 “성령의 감동하심”(벧후1:21)으로 기록되었고 선포되는 말씀 또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설교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을 증거하고 영혼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전하는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설교자로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찾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다양한 설교자들을 접하면서, 지적인 설교, 선포적인 설교, 예언자적 설교, 이야기식 설교, 영성적 설교, 묵상식 설교, 강해식 설교 등 설교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경험했다.

사실 필자는 진지하고 차분한 사람이라 설교가 자칫 지루하고 따분해질 수 있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유머감각이 풍부한 설교자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어느 날 하나님이 깨우쳐 주셨다. “내가 너를 만들었다. 내가 너를 쓰리라.” 하나님이 나의 기질을 만드셨고 쓰기 원하신다는 사실은 큰 감동이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이후로 좋은 설교자들의 장점은 수용하되, 설교자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설교자가 되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평안했다.

온누리교회에서 부교역자들에게 설교훈련을 할 때 제일 강조한 것이 이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의 신앙과 인격, 사고와 경험이라는 악기를 통해서 연주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흉내내기보다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고 하용조 목사님이 보여주신 묵상식 설교를 지향한다. 물론 신학교에서는 원어 연구 및 본문 주해를 기초로 하는 설교문 작성을 배웠지만, 성경공부식 설교 준비는 거의 모든 설교문들을 천편일률적으로 만들 위험성이 높다. 반면에 묵상식 설교는 설교자라는 울림통을 하나님이 그대로 사용하시기에 훨씬 좋다는 장점이 있다.

필자는 설교 준비를 할 때 이렇게 한다.

먼저 성경 저자들에게 주셨던 감동과 깨달음(딤후3:16)을 내게도 주시기를 구한다. 그리고는 본문을 3-4번 읽으면서 묵상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과 깨달음을 따라 묵상 노트를 쓴다. 이것을 받아쓰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설교문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내가 묵상한 내용이 정말 성경적으로 맞는지, 원어적으로 바른 개념인지, 신학적으로 건강한지 원어성경, 성경주석, 배경주석 등을 보며 확인하고 묵상노트를 수정 보완한다.

그렇게 보완한 묵상노트를 갖고 설교문을 작성한다. 공부를 먼저 하고 메시지를 나중에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묵상을 통해 메시지를 먼저 받고 공부로 보완하면, 설교자만의 메시지가 완성된다. 성경공부식 설교는 어쩔 수 없이 회중 입장에서는 어디선가 들어봤던 것 같은 설교가 된다. 그러나 묵상식 설교는 각 사람을 독특하게 창조하시고 빚어오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설교자만의 색깔이 분명한 설교가 된다. 성경이라는 똑같은 악보를 놓고 바이올린과 첼로,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다른 색깔의 소리를 내지만 진리라는 음악을 드러내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나를 들어서 진리를 선포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나 자신부터 파악하라. 내가 논리적인 사람인지 감성적인 사람인지, 내가 차분한 사람인지 열정적인 사람인지, 내가 분석적인 사람인지 통찰적인 사람인지, 내가 말씀 중심의 사람인지 성령 중심의 사람인지, 하나님은 나의 강점을 통해 말씀하신다. 사복음서도 저자마다 색깔이 분명하다. 설교자로서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

설교자로서 자신을 준비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팁이 있다.

첫째, 나 자신이 성경적 인간이 되라! 늘 목회사역에 분주하다가 설교 때만 성경을 대하면 그 설교는 매우 인위적인 설교가 된다. 필자는 매일 큐티(말씀묵상)를 하고 큐티 말씀으로 새벽설교를 한다. 또한 매학기 성경통독을 강의한다. 그러니 목회자로서 묵상과 통독을 안 할 수가 없다. 말씀이 충만히 채워져서 넘쳐흐르는 설교와 쥐어짜는 설교는 다를 수밖에 없다.

둘째, 비판적 독서(critical reading)를 하라. 신앙서적이든 일반서적이든 읽을 때, 좋은 문장을 밑줄 치고 설교에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나는 책을 읽으면 반드시 여백에 나의 생각을 나의 언어로 쓴다. 이것이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된다. 설교자는 자신의 언어가 살아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언어를 통해 말씀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셋째, 성경의 인물을 심도 있게 연구하라. 설교자들이 삼대지 설교만 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공식화하는 데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진리는 공식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성경 인물의 심리, 사고, 기질, 배경 등을 연구하면 좀 더 입체적이고 존재론적인 설교가 가능해진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라. 설교가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도 복음이 빠지면 핵심을 잃게 된다. 성경의 핵심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요5:39). 저는 3년간 수요일 저녁에 “예수님과의 만찬” “예수님과의 대화”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과 대면하라” “예수님의 권위” “예수님의 선택”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시리즈 설교를 했다.

다섯째, 설교준비에 최선을 다하라. 운전자도 3-4년차가 제일 위험하다는 말을 한다. 내가 운전 좀 한다고 자만할 때에 사고가 난다는 말이다. 설교자로서 5년 10년 흐르면 이런 증상이 올라온다. 단 5분 메시지도, 10분 새벽설교도, 습관적으로 하거나 대충 하지 말라. 대충 준비한 설교는 모래알처럼 흩어지지만, 정성껏 묵상하고 기록하고 다듬은 설교는 반드시 쌓인다.

설교자들이 쉽게 빠지는 덫이 있다.

어떤 설교자들은 설교를 숙제처럼 한다. 또 어떤 설교자들은 멋진 설교를 하려고 한다. 설교는 의무감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과시욕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설교는 사명이되 내 영혼의 샘솟는 기쁨으로 감당해야 갈 수 있는 길이다. 또한 설교는 자신을 드러냄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냄이다. 필자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질문한다. “나의 설교는 창작인가 대언인가?” 매번 창작을 하려니 숙제처럼 느껴지고, 어디서 들은 멋진 말로 도배하려고 한다. 설교가 창작이라면 1년이면 바닥이 보이고 3년이면 끝이 난다.

그러나 말씀이 스스로 말씀하시도록 하면, 말씀의 세계에는 끝이 없다. 대양보다 넓은 말씀의 세계가 흘러가도록 나를 맡겨드리면 된다(겔47:3-5).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문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내가 작성한 설교문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확신 말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 누구든 변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있는가? 최고의 음식은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이 아니라 최상의 재료 자체를 드러나게 하는 음식이다.

설교자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이 더 있다. “나의 설교는 쉬운 설교인가 어려운 설교인가?” 진리는 단순명쾌한 것이다. 설교를 할 때 강의를 하듯이 만연체로 설명하려는 설교자들이 있다. 설교는 강의가 아니다. 물론 어느 지점까지는 설명이 필요하지만, 설교는 결정적인 순간에 진리를 선포하는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선포된 말씀이 심령을 터치하실 것이다.

설교자로서 직면하게 되는 질문이 또 있다. “나는 내가 설교한 대로 사는가?” 거룩을 이야기하고 헌신을 이야기했는데, 설교자가 그대로 살지 않으면 그 메시지는 공허해진다. 힘을 잃는다. 추상적이 된다. 그리고는 다음부터는 아예 설교문을 작성할 때부터 내가 지키지 못할 내용은 얼버무리게 되고 설교의 날은 무뎌진다. 메신저 자신이 가장 강력한 메시지임을 기억하자.

설교자가 성경을 볼 때 문학장르의 차이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역사서나 복음서는 이야기체다. 그러므로 이런 본문은 거룩한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내가 직접 체험하고 재구성해보면 좋다. 율법서나 교리서신은 논리적인 문장이다. 교리 풀이만 한다면 자칫 따분해질 수 있는 내용이지만, 바울처럼 성령의 불붙은 논리를 추구한다면 영혼에 불꽃을 일으킬 수 있다. 예언서 시가서는 원래 운문이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정제된 시적 언어와 감성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시를 감상할 때처럼 핵심 단어와 이미지를 묵상하고, 반복 대조 점층되는 표현들에 주목하면 본문을 생동감있게 살려내기에 좋다. 그러면서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지 않으려면 그 본문의 역사적 시대적 배경을 첨언하여 균형을 잡아주어야 한다. 설교본문의 문학장르를 고려한다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헌신이다. 반면에 회중의 연령과 상황을 고려한다는 것은 컨텍스트에 대한 헌신이다.

청소년 설교자들은 문화적 눈높이를 맞추되 복음적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비속어를 남발하거나 웃긴 설교를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청소년에 대한 진정성이 눈높이로 전달될 수 있는 설교의 길을 찾아야 한다. 청년 설교자들은 성경적 진리를 전하되 현장성이 있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청년 시절에는 인생과 세상과 하나님에 대해서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당위적인 메시지만 외치면서 그들의 의문과 한숨과 고통에 답변해 주지 않으면, 그 설교는 일방적이고 비인격적인 설교가 된다.

청년들의 삶에 다가가 경청하며 설교를 전한다면 그들도 주님께 다가오리라. 성인 설교의 상황은 다변화하는 중이다. 1인 가구, 이혼 가정, 별거 가정, 역기능적인 가정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평상시 어려운 성도들을 상담하고 심방하고 위해서 기도하는 목회자가 되라. 설교는 성도들의 삶에서 나와야 한다. 그들의 영혼의 울부짖음과 냉담과 갈망을 아는 설교자라면 때로는 화살처럼 꽂히고 때로는 어미처럼 품어주는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는 더 이상 구도자(seeker)의 시대가 아니라 회의자(questioner)의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다원주의적 관점으로 진리 자체를 의심하고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절대 진리인 성경을 일방향으로 가르치기보다 성도들의 질문에서부터 출발하여 성경적 진리의 답변을 들려주는 설교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설교자에게 기독교변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기독교변증서들을 꾸준히 접하기를 권한다. 또한 성경통독을 하면서 매주 질문을 받아보기를 권한다. 저는 성경통독 수업을 하면서 매주 질문을 받는다. 처음에는 답변을 쓰는 것이 힘들었지만 이제는 성경의 진리를 변증적으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데에 익숙해졌고, 이것이 설교에 매우 큰 유익이 되었다. 최근에 설교자로서 드는 확신이 있다.

좋은 설교는 회중의 내적인 언어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설교는 신박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회중이 이미 확신하고 있는 진리를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고, 새신자라할지라도 그들이 갈망하는 진리의 언어를 발견시켜 주는 것이다. 결국 설교는 성경의 언어, 설교자의 언어, 회중의 언어의 하모니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 “설교준비가 갈수록 어려워지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네”이면서도 “아니오”다.

자꾸만 다가오는 매너리즘을 경계하는 것은 어렵지만, 설교준비 자체는 어렵지 않다. 왜냐면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설교라는 믿음 때문이다. 필자는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만 한다고 생각하기에 부담이 별로 없다. 설교를 잘 하려고 그다지 애쓰지도 않는다.

전령이 어명을 전할 때 어려워할까? “어명이오!” 하는 순간 백성들은 그 앞에 엎드려 경청하게 되고, 전령은 자신의 생각을 첨언하지 않고 어명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된다. 전령의 목소리가 멋지거나 감동적이지 않아도 된다. 백성들을 설득하거나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어명 그 자체가 백성들의 심령을 움직이고 삶을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좋은 설교는 설교자 자신이 먼저 감동받고 은혜 받는 설교다. 나는 설교준비를 하면서 내가 눈물이 나고 감동을 받을 때가 많다. 그러면 설교에도 그대로 그 감동이 전달된다. 그런데 내가 설교 준비를 하면서 건조하고 밋밋하면 설교하면서도 아무 감흥이 없다. 그래서 매번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게 된다. 설교에 하나님의 음성과 감동하심을 구한다.

예전에 고 하용조 목사님이 [겨울연가]를 보신 뒤 부목사들을 모아놓고 하신 말씀이 있다. “세상 드라마도 이렇게 감동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데, 온 우주 최고의 사랑 이야기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성도들을 졸게 만드는 설교자들은 회개하라!” 성경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눈물로 감동하는 설교자가 되면, 성도들의 영혼에 감동과 답을 선사하는 설교자가 되리라.

# 예시 : <큐티식 새벽설교> (마가복음 14장 32, 42절)

“32.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42.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오늘 32절 말씀을 보라.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 후에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집중해서 기도하기 원하셨다. 그리고는 이곳 겟세마네(“기름 짜는 틀”)에서 정말 영혼을 쏟는 기도를 하셨다. 그러나 의문이 든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을까(32절)?

첫째, 정서적으로 제자들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으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34절). 예수님은 베다니의 친구들에게 늘 위로를 얻으셨듯이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에게도 위로를 얻고 싶으셨다.

둘째, 제자들이 이 기도에 동참하기 원하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38절). 그들도 그들 앞에 다가오는 시험에 깨어서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전력으로 기도하시고 세 차례나 반복해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그저 졸기만 할 뿐이었다. 심신이 지친 것으로는 스승 예수님만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앞날에 어떤 시험이 오는 줄 몰랐기에 영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의지하기만 할 뿐 예수님의 동역자로서 함께 함이 무엇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42절 말씀을 보라. 그렇게 졸기만 하던 제자들, 그리고 이내 다 배신하고 도망갈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또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방금도 예수님은 죽을 것처럼 기도하시는 동안 졸기만 하던 제자들이었는데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 이제 곧 유다의 배신을 기점으로 모두가 나 살겠다고 도망갈 제자들인데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 아니다. 이것은 제자들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라 예수님의 결심이었다.

“너희가 나를 버려도 나는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않으리라.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리라. 너희가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아무리 실패해도 나는 절대로 너희를 포기하지 않고 버리지 않으리라. 너희는 나를 떠나도 나는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

이후 부활의 주님을 보고도 낙심해서 베드로가 떠났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가셔서 그에게 사랑의 마중물을 부어주시며 일으켜 세워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위기에서 주저앉는 것은 예수님이 못미더워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는 끝까지 함께 간다” 말씀해 주시니 어찌 아니 감사한가!

이상준 목사
1516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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