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전환기에서 중재적 기독교교육의 방향성에 대한 연구 (1)
시대 전환기에서 중재적 기독교교육의 방향성에 대한 연구 (1)
  • 안정도 박사
  • 승인 2024.02.0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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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안정도 박사(장로회신학대학교 객원교수, 기독교교육)
안정도 박사
안정도 박사

*이 글은 지난 1월 15일,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교회협력센터 새문안홀에서 개최된 기독교통합신학회 35차 학술발표회에서 안정도 박사가 발표한 논문 내용 중 일부를 요약, 편집한 것이다. 지면 관계로 각주는 일괄 삭제했다._편집자 주


초대교회에서 교리문답은 기독교 신앙을 온전히 보존하고 전수하려는 목적에서 형성되었다. 교리문답은 초신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신앙 내용을 간략하게 압축한 문장으로 정리하였고, 그리스도인 삶의 형태를 제시하며 기독교 사회윤리의 실천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교리문답은 기독교 신앙 교육서로 볼 수 있다. 교리문답은 신앙교육의 역사 속에서 중재와 균형을 위한 지속적인 자기반성과 중재적인 교육 해석, 응답을 내포한다. 독일 튀빙겐 기독교교육가 크리스티안 팔머(C. Palmer)가 1844년 출판한『기독교 교리문답』은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사이의 긴장 속에서 교육학적 중재를 시도한 표본이라 할 수 있다.

팔머의 ‘교리문답’은 교회 중심의 신앙고백에서 마음의 회심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와 마음의 고백을 강조하며 어린이의 주관적 종교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적 교육관을 사이에서 마음이라는 공통 분모를 발견한다. 그는 ‘서설’에서 교회의 교육적 사명과 기독교 삶의 형태를 강조하면서, 이 둘 사이를 계몽적 교육 언어인 ‘어린이 종교’로 연결한다. 교회의 교육성과 어린이 종교를 기독교교육적으로 연결하는 팔머의 ‘교리문답’은 내용으로나 구조적으로 교육 긴장의 중재와 균형을 도모한다. 이러한 기독교교육의 중재적 의미는 기독교교육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긴장과 갈등에 교육적 균형의 실마리를 제시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서론

이 연구는 교회와 교육의 관계를 기독교교육적으로 중재하는 팔머의 ‘교리문답’이 탈교회화, 탈교리화로 대변되는 현대 세속화 흐름에서 혜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연구는 아직 한국 기독교교육에는 생소하고 낯선 팔머의 1884년 『기독교 교리문답』의 내용과 구조를 소개한다. 교회나 학교에서 이뤄지는 모든 형태의 교육은 어린이들을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매일 기도, 성경, 루터 교리문답을 부지런히 배워야 했다.

1763년 프로이센 교육법에도 드러나듯, 학교 일과표의 상당 부분은 교리문답을 비롯한 신앙고백 교육으로 채워졌고, 국어교육(독일어)도 성경의 본문을 읽고, 암송하고, 해석하는 수업으로 진행되었다. 역사 수업도 초대교회부터 종교개혁까지의 교회의 역사를 다루었다. 경건주의 신봉자이자 교육부 장관이었던 퍼디넌드 스틸(F. Stiehl)의 이름을 딴 1854년 ‘스틸 교육과정’(Stiehlische Regulative 1854)은 당시 교회 중심의 경건 교육을 강조하는 강력한 교육 개정안이다. 여기에서도 경건주의 교육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스틸은 당시 교육이 낭만적 계몽주의 교육관을 “그릇된 교사, 그릇된 교육, 비종교적인 인간 지혜의 잘못”이라고 격렬히 비판하면서 성경 구절, 교리문답, 찬송가를 통한 교육을 강조한다. 이러한 경건주의 교육관은 교육 현장에서 오히려 교회 기득권의 특권 의식, 그리고 관습적 교회 교육으로 고착되는 경향을 보였다. 더욱이 경건주의 교육을 표방하던 ‘스틸 교육과정’은 다윈의 진화론 출현, 어린이 교육의 재발견, 신문 출판과 같은 대중 매체의 발달, 노동자들의 조합과 정치적 연맹의 출현과 함께 점차 영향력이 커지던 19세기 근대화 교육 주창자들에게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계몽주의 교육관의 교리문답 비판

국가 차원의 교육 정책에서 프로이센 교육은 여전히 경건주의 노선을 고수했지만, 시대의 사상과 학문의 영역에서 경건주의와 대비되는 계몽주의의 목소리는 점차 커져갔다. “원죄에 중독된 어린이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꺾도록 만드는” 경건주의의 교육 이해와 달리, 계몽주의 교육은 어린이를 “하얀 도화지”(tabula lasa)로 이해한다. 하얀 도화지 같은 어린이가 자연스럽게 세계의 본질을 스스로 깨달아 가도록 교육자는 기다려 주고 환경을 조성해 줘야 했다.

이렇게 교육을 이해하는 진보적 계몽주의자들은 학교에서의 종교 수업이 단순히 종파적 신앙 전통을 전수하는 교리문답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종교 수업은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학문적 교육에 적합한 형태로서 학생의 감정을 두드리며 도덕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윤리적 역사 수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은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이해, 루소의 어린이 이해, 헤르바르트, 디스터벡의 교육 이해에 뿌리를 두며,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후대 ‘진보’ 교육가들에 의해 강하게 제기되었다.

슐라이어마허의 새로운 종교 이해는 개인 경건을 수업과 학교 일과표의 형태로 가르치며 “어린이 자신의 의지를 꺾게 만드는” 전통적 경건주의 교육관과 양립할 수 없었다. 슐라이어마허가 이해하는 “교육학은 순수하게 윤리와 관련되어 있는, 윤리로부터 파생되고 응용된 학문” 인 반면, 종교(기독교) 교육은 교육학적 논증이 불가능한 교회의 학문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슐라이어마허의 새로운 종교 개념은 종교(기독교) 교육을 사고와 행동을 지향하는 일반교육과 완전히 분리된 가정과 교회의 교육으로 국한한다.

계몽주의 교육가 장 자크 루소는 그의 교육서 『에밀』에서 어린이 고유의 자연적 성장 능력을 기술하며 ‘자연 속 어린이’를 이상적인 어린 시절의 표상으로 보았다. 루소의 관점에서 자연의 어린이에게는 어떠한 “책도, 강요적 수업도, 암송에 대한 압박”도 필요하지 않다. 당시 교육 배경을 고려할 때, 그가 말하는 ‘책, 강요적 수업, 암송’은 당연히 성경책, 교리문답, 성경 암송을 의미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루소가 지향하는 자유로운 ‘에밀’, 즉 자연의 어린이는 당연히 그 시대 전통적 경건주의 교육 형태에서 자유로운 어린이를 의미할 것이다.

게다가 루소는 어린이가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믿기 때문에, 어린이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은 어린이를 “우상 숭배” 하게 하는 것이라고까지 한다. 이러한 루소의 관점에서 교리문답 중심의 신앙 교육은 분명 그릇된 교육이었다. 교리 교육에 대한 루소의 비판은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성가시고 멍청한 교육을 굳이 묘사해야 한다면 나는 단연코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현학자를 표현할 것이다.” 루소의 관점은 오늘날 기독교교육 관점에서 실로 양가적이다. 교육학적 입장에서 보면 그는 분명 ‘어린이의 발견자’로 칭송받을 만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어린이 종교를 부인’하며 종교 교육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몽의 종교와 어린이 이해는 교회 교육 비판으로 이어진다.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개념을 이어받은 헤르바르트는 교회가 “모든 인간의 의존 감정과 지고한 존재의 본성으로 발전하는 종교를 자발적이지 않은 피상적인 신앙고백”의 형태로 가르친다고 격렬히 비판한다. 그리고 헤르바르트는 ‘도덕’이야말로 “참된 본래의 신앙 항목”이기 때문에 학교 종교 수업은 ‘심성 교육’, ‘도덕 수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계몽주의 교육가 디스터벡 역시 계몽사상에 따라 “옛 학교는 교회학교였지만, 새로운 학교는 국가학교”라고 주장하며, 교육을 교회교육과 일반교육의 급진적인 대립 관계로 구분하여 바라본다.

크리스티안 팔머의 개신교적 교리문답(Evangelische Katechetik)

이렇게 교회 전통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새로운 교육 관점을 지향하는 교육 개혁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긴장의 시대에 크리스티안 팔머(Christian Palmer:1811-1875)의 ‘교리문답’이 등장한다. 그의 ‘교리문답’은 1876년까지 6판이 인쇄될 정도로 성공한 출판물이었다.

한국 기독교교육에서도 크리스티안 팔머는 그리 많이 소개되지 않은 낯설고 생소한 인물이다. 팔머를 언급한 몇 안 되는 한국 기독교학자 중 한 명인 윤응진은 팔머를 “교육학의 학문적 자율성을 아예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상대적·자율성을 인정했던 슐라이어마허 이전으로 교육을 되돌린 인물”로 평가한다. 윤응진의 관점에서 팔머의 저서 “기독교 교리문답”은 “교육학을 다시금 ‘신학의 시녀’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팔머의 신학과 교육사상을 전체적으로 보면, 그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급진적으로 개혁하는 것보다는 교회의 전통을 변호하고 보존하고 개선하는 데 더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는 보수주의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팔머의 관점을 전통의 재건 혹은 중재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관점도 있다. 강문규는 ‘19-20세기의 기독교교육 수업 개념의 변천사 연구’에서 팔머는 종교교육을 신앙고백적 방향으로 전환한 대표적 인물이라고 언급한다. 강문규는 “확실히 교회의 신앙고백적인 입장에서 계몽과 교회 사이의 중개를 시도”했기에 “팔머의 개념은 우리에게 교리문답과 기독교교육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평가한다.

팔머를 평가하는 한국 기독교교육의 서로 다른 온도 차는 팔머의 교육학이 다양한 시선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독일 종교교육에서도 팔머를 단순히 보수주의자의 관점이 아닌 교육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대두되고 있다. 슈바이처는 ‘보수적’ 혹은 ‘교파적’이라는 팔머의 수식어는 교육학적 관점에서 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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