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어둡고 희망이 없어 보일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은
더욱 빛난다.
왜 주님은 다윗에게 쫓기는 삶을 허락하셨는가?
헤렛 수풀에서 십 광야로,
마온 광야에서 엔게디 광야로,
바란 광야에서 또 다시 십 광야로....
이렇게 ‘네게브’라 불리는 사막에서,
우물 하나 없고 풀 한 포기 없는
그런 이스라엘의 남부 광야를 쫓기는 들개처럼
헤매고 다닌 지 10년이 지났고
완전히 지쳐버렸다.
쫓기는 삶을 허락하시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신감 때문이리라.
선택받은 백성이 아름답게 변화된다는 자신감이다.
그래서 고통을 의도적으로 허락하신다.
마귀가 원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망가지도록 사울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내면이 피폐되고,
그 속에 분노와 혐오와 상처만 가득 차 뒤범벅이 되어
삶을 파괴시키고 부서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20세의 다윗은
10년의 엄동설한을 보내고 나서
망가지고 뒤틀려진 모습이 아니었다.
나쁜 습관에 중독되어 절망에 몸부림치는
깨어진 형상이 아니었다.
삶의 원숙함.
도량과 아량을 품고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기쁨이 넘치는
총명한 왕으로 등장했다.
탁월한 병사의 진가는
‘그가 얼마나 잘 싸우느냐’ 보다
‘그가 얼마나 인내했느냐’에 달려있다.
다윗은 고통의 도가니 속에서도 기도하며 찬양했다.
그리고 참고 기다렸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 아름답고 웅장한 비전(Vision)은
고급 호텔 방에서 비단옷을 입고
좋은 세미나 속에서 찾아낸 것이 아니다.
도저히 그런 비전이 나올 수 없는 토굴 속에서 주어진다.
에스겔은 지옥 같았던 바벨론 포로 생활의 와중에서
하늘이 열리는 영광의 환상을 보았고,
사도 요한은 고통의 밧모섬 유배지에서
세상 마지막의 놀라운 계시를 보았다.
하나님의 비전은
인간의 소리, 인간의 희망이 다 꺼져버린
광야와 굴속 바닥에서 주어졌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리더의 비전 선언문은 그렇게 성숙과 함께 탄생되었다.
새벽이 오면 새벽이 나를 깨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은 모진 운명의 피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운명을 만들어 가고,
새 역사를 만들어 갈 사람임을
주 앞에서 선언한 것이다.
새벽을 깨우는 지도자에게 그토록 기다리던 여명이
기어코 오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