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서 태동한 조선인 신앙공동체 (2)
만주에서 태동한 조선인 신앙공동체 (2)
  • 임희국 교수
  • 승인 2024.01.04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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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위기와 몰락,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1910-1920년대
글_임희국 박사(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

(지난 호에 이어)

1905년에 을사조약 체결과 더불어 대한제국의 국가 권력 대부분이 일본의 통감부로 이양되었고 황제의 권력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반전을 시도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고종은 이준·이상설 등을 그곳에 밀사로 파견해서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의 파기를 도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도리어, 이 사건을 빌미로 삼은 일본은 대한제국 친일파 관료들을 앞세워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일본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내밀었고, 대한제국의 이완용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명의로 이 조약이 체결되었다 (1907.7.24.).

이제부터 대한제국에서 황제권은 완전히 허물어졌고 일본의 통감부가 최고 통치기관이 되었다. 대한제국이 1910년 8월 일본으로 강제 합병되었고, 이후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장로교회는 일제의 국가 권력에 예속되지 아니하는 자치적 종교단체로서 헌법에 의거 총회를 창립했다.

소위 ‘105인 사건’ – 데라우치총독 모살 미수사건(1911)

1911년에 소위 ‘105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실상은 “데라우치총독 모살 미수사건”이라 불리었다. 이 사건은 일제가 국내 반일 민족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합법성을 가장한 재판제도를 채용하여 조작한 대규모 한민족 탄압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조작한 총독부의 주장에 따르면, 1910년 음력 8월에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 축하를 위해 서북지방 시찰에 나선다는 풍설이 나돌았다. 소문을 들은 서울 신민회의 간부들이 여러 차례 총독암살계획을 모의하였다고 한다. 거사의 실행방법은 서북지역에 사는 주민들 가운데서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강한 사람들을 모아 총독이 방문하는 경의선 주변의 8개 도시의 역전에서 환영객으로 가장하여 총독을 암살케 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 거사의 배후에는 외국(미국) 선교사들이 사주하고 지휘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모아보면, 서북지역의 반일(反日) 인물들 가운데서 특별히 개신교회 지도자들이 선교사들의 사주를 받아 총독 암살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는 요약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조작하기 위하여 1911년 음력 9월 3일부터 피의자 체포에 돌입했다. 그날 오전에 선천 신성중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아침 기도회를 마치고 각자 교실로 들어가려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일제 경찰이 들이닥쳐서 교사 7명과 학생 20명을 서울로 압송해갔다. 그러고 나서 피의자 검거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피의자들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일제가 짜놓은 각본에 따라 심문관이 일방적으로 사건 내용을 열거하고 피의자가 “예”라고 대답할 때까지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하였다. 고문을 견뎌내다가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한 사람들이 사망하였다(김근형, 정희순 등). 결국, 피의자들은 허위로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서 법정에 기소된 사람의 수는 123명이었다. 이들 가운데서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105인 사건’이라 부른다.

목사 양전백은 제1심에서 6년 형을 선고받았고, 제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1913년 3월에 석방되었다. 선천으로 돌아온 그를 맞이하는 환영인파가 기차역 광장을 가득 메웠다. 3년 만에 다시 강단에서 설교하려던 그는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나는 이제 교직(敎職)을 사(辭)하여야 하겠습니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나는 재감중통초(在監中痛楚)에 이기지 못하여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고 이 입으로 거짓말을 하였으니 주의 교단에 설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고백을 듣는 성도들 모두 다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들은 마치 ‘목자 잃은 양처럼’ 남쪽(서울) 하늘만 바라보며 목사님이 석방되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3.1만세운동, 서세옥(Suh Se-ok), 1986년, 한지에 수묵 채색.
3.1만세운동, 서세옥(Suh Se-ok), 1986년, 한지에 수묵 채색.

3.1운동 (1919)

3.1운동이 1919년 3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국내외에서 평화적으로 일어났다. 이 기간에 국내에서만 시위가 1,542회 일어났다. 그 당시 한국의 인구는 약 1,600만 명이었고,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2백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했다. 또 그 당시 개신교 교인은 약 29만 명이었으며 전체 인구의 1.8%였다. 그런데, 만세 시위자의 30%가 개신교 교인이었다. 시위 도중에 체포당하고 투옥당한 사람의 20%가 교인이었다.

전국의 마을과 장터에 3.1운동 시위 격문이 나붙었고 독립선언서가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교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을 단위의 장로교회가 전국으로 통하는 조직망(시찰회⤑노회⤑총회)을 갖추고 있었기에 그 역할이 가능했다고 본다. 1919년 10월 4일에 개회된 장로교회의 교단총회 회의록(제8회)에는 전국 교회들과 교인들의 3.1운동 시위 참여가 각 노회별로 보고되었다. 또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서 16명이 개신교(장로교, 감리교) 지도자인 점은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다.

평양에서 3월 1일 장대현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일천여 명이 모인 시위로 지역 3.1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장로교회 총회장이며 서문외교회 담임 김선두 목사가 사회를 맡았고 또 정일선 장로가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산정현교회의 강규찬 목사가 설교했고, 시위군중이 만세삼창을 외치면서 가두 행진을 시작했다. 이 시위대는 남산현교회에서 출발한 감리교회 시위대와 설암리 천도교구당에서 출발한 천도교 시위대와 합류했다.

학생들의 독립만세시위는 3월 1일 숭덕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숭실전문대학의 4학년 이보식, 3학년 김태설, 2학년 이균호·길진경·이인순 등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경찰이 4월 4일 선교사 모우리(E. M. Mowry, 39세)와 마포삼열(S. A. Moffett)의 집에 각각 들이닥쳤다. 모우리 집에서 학생 김태설 등을 체포했고, 마포삼열의 집과 숭의여학교에서 시위관련 유인물과 그것을 인쇄한 등사기 3대를 증거물로 압수했다. 모우리와 마포삼열이 체포된 학생들과 함께 4월 5일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모우리는 범법자(시위학생)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혐의로 평양구치소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마포삼열은 방면되었다. 모우리는 1심 재판에서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물산장려운동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3.1운동이 좌절된 직후에 경제자립으로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는 실력양성에 대한 각성이 일어났다. 1920년 7월 30일 평양 예수교서원에서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인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 조만식을 비롯하여 약 70여 명 지역 교계의 지도자들이 모였다. 발기인회는 모임의 목표를 민족경제의 자립에 두었다.

그러나 일제 당국과 일제 상인들의 압력으로 더 이상 별 진전 없이 답보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1922년 6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조선물산장려회가 발족되어 공식 출발했다. 이 자리에서 조만식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물산장려운동이 민족 독립을 위한 경제자립 운동이라고 선언했다. 이 경제자립 운동은 식민 통치 상황에서 식민정부의 지원이 불가능하므로 민족 스스로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자주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중소상공업인 대부분은 평양 지역 개신교 지도자들이었고 또 안창호 계열의 동우구락부에 속해 있었다. 1923년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가 조직되었고 또 자매단체로 ‘토산애용부인회’(土産愛用婦人會)가 조직되었다.

이와 함께 물산장려운동은 사회단체들과 언론의 호응을 받아서 전국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국산품 애용, 소비 절약, 금주· 금연 등의 다양한 운동이 펼쳐졌다.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한 개신교 지도자들은 조만식, 유성준(1925년 이사장), 안재홍, 오화영(1928년 이사장), 이동욱, 원익상, 현동완, 심상문, 유옥경, 유영모 등이었다.

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의 왕성한 활동과 조만식의 지도력으로 발전했다. YMCA는 이 운동의 표어를 현상 공모하여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우리 것으로만 살자, 조선 물산을 먹고 입고 쓰자, 조선 물산을 팔고 사자, 남이 만든 상품을 사지 말자, 사면(구매하면) 우리는 점점 못살게 된다’ 등을 뽑아서 물산 운동을 홍보했다.

또 YMCA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강연회를 개최하여 홍보행사를 벌였다. YMCA 중심으로 일어난 근검절약운동은 절약저축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여 상공업 발전에 투자했다. 조만식은 1921년 12월 ‘평양실업저금조합’을 설립해서 매월 5원씩 출자 저금하여 사업에 필요한 회사와 기관을 설립하였다. 이듬해(1922) 여름에 잉크를 제조하는 ‘대동강’이란 제조업이 설립되었다. 그는 1926년 10월 김능수, 김병연, 한근조 등과 함께 ‘평양절약저금식산조합’을 설립했다. 이렇게 평양의 물산장려운동은 일반 시민의 근검절약 운동을 통해 축적된 자본으로 산업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 운동을 가로막는 커다란 방해 세력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 운동이 첫 단계부터 별 성과도 없이 추진되다가 1924년 이후 침체에 빠졌다. 침체 요인은 일제의 방해공작, 사회주의자들의 비판, 악덕 상인과 부도덕한 상공인들의 농간 등이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침체 요인은 산업 구조에 있었다.

1920년대 초반 국내산 원료에 자본과 노동을 들인 조선 물산은 직물업과 고무신이 주종을 이루었다. 직물업에 종사하는 조선인 상공업자가 88만 명을 넘어섰다. 그런데 이 분야에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강하게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조선 물산의 기반이 약해졌다. 이미 1923년에 일제의 자본력이 조선의 자본력을 3배나 추월하였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는 조선 물산의 침체를 촉진했다. 게다가, 국내 사회주의 계열이 물산장려운동은 일부 민족자본가의 이익만 추구한다는 비판을 가했다.

물산장려운동은 1930년대 초반에 잠시 회복되었다가 또 다시 침체되었고 1937년까지 이 운동이 지속됐다. 또 한편 1928년부터 10년 동안 전개된 장로교회의 농촌운동은, 질병(한센씨병, 결핵)퇴치운동, 절제운동(금주, 금연), 공창폐지운동 등과 나란히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민족의 독립과 자결을 위한 경제적 문화적 운동이었다. 여러 개신교 단체들(기독교여성청년연합회(YWCA),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등)도 실력양성 차원에서 문맹퇴치, 야학과 강습소, 공창폐지운동, 위생운동, 육아법, 절제운동(금주·금연)을 벌였다.

<strong>임희국 교수</strong><br>장로회신학대학교<br>​​​​​​​교회사
임희국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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