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 시대의 영적-도덕적인 전환을 위한 신학교육 (마지막 회)
대전환 시대의 영적-도덕적인 전환을 위한 신학교육 (마지막 회)
  • 이학준 교수
  • 승인 2024.01.04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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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로운 상상력을 위하여

*지면의 한계로 일부 내용을 중략, 각주는 삭제했다._편집부

(지난 호에 이어) 대안의 공동체로서의 신학교

신학교육은 교육 현장을 공동체의 현장으로 바꾸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런 공동체는 살아있는 신앙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교회 탄생(ecclesiogenesis)의 불쏘시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은 이와 같은 DNA를 가지고 새로운 교회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정체된 조직보다는 살아있는 움직이는 무브먼트(movement)로서의 교회와 공동체를 찾고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도 중요하지만, 삶과 연결되지 않는 지식과 정보는 확신으로 쉽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우리들의 신학교육이 어떻게 구체적인 삶과 현실 속에서 연결되고 작동되는지를 보고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상상력의 신학자, 이런 대안의 공동체를 실험하는 신학자들은 안토니오 그람치(Antonio Gramsci)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통적인 지식인’이 아닌 ‘유기적인 지식인’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정보와 지식을 생산 전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삶을 나누고, 함께 신자유주의와 싸우며, 같이 시대의 신앙 내러티브(narrative)를 만들어 가는 신학자들입니다. 즉 신학자들은 신학교육이 이러한 공동체를 탄생시킬 수 있도록 산파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몇 가지 대안 공동체로서의 신학교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의 모바일 신학교 (제자교육)

우리에겐 예수님에 대한 호칭으로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 익숙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제자들에게는 랍비, 선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신학 교육가였던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물론, 사도행전 1장 3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활 후의 잠시의 시간 동안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특정한 커리큘럼이 없이 모든 신학 과목을 몸소 가르쳤으며, 들판과 산, 치유의 현장과 식탁공동체가 그의 교실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과 언약 관계 속에서 살았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그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신학교육은 가르침과 복음선포, (치유)사역을 하나로 통합한 교육이었습니다.

그는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 비전을 전통적인 유대인 삶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대안으로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제국주의 (시저이즘)에 대한 역사적-문명적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눅 4:18). 그의 비전은 출애굽을 우주적으로 확대한 것이었으며, 구약의 모든 언약들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폭력과 지배를 척결한 섬김과 나눔과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하나님의 정치공동체이자, 새 하늘과 새 땅의 종말론적 언약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사회적 상상력(social imaginary)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타인을 형제-자매로 여기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는 이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야웨 신앙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평등하고, 상생적이고, 상호 돌봄의 공동체를 통해 상상력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육화되는가를 몸소 제자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본회퍼의 지하신학교

본회퍼의 지하신학교도 나치 제국의 그늘 하에서, 종전 이후 새로운 유럽을 꿈꾸는 대안적 언약공동체였습니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고백교회가 보낸 학생들과 함께 먹고, 자고, 공부하고, 명상하고, 토론하였으며, 음악과 운동을 즐겼습니다. 깊은 신학적 탐구와 삶의 나눔이 있었습니다. 본회퍼의 신학교는 중세의 수도원을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 이 배움의 공동체들은 한결같이 상호존중과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친밀과 신뢰의 공동체요, 깊은 정체성(또는 정체성 심화)에 바탕 둔 진리 추구의 공동체였습니다. 크지는 않았지만,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즉 성서적 언어로 말하지만 언약적 관계의 배움과 선교적 공동체였습니다. 저는 앞으로는 신학교육은 머리만이 아닌 몸으로 가는 교육, 몸을 통해 가슴이 변화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바울, 본회퍼 등은 깊은 신학과 더불어 삶으로 신앙을 살아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언약의 드라마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 개인과 공동체, 지역과 세계를 유기적으로 연대하는 신학교육을 나름의 방식으로 실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한국 사회 곳곳에 이런 지하신학교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현재 신학교 안에서도 이런 비공식 공동체, 즉 공식 시간 밖에서 이루어지는 언약적 신학교육이 가능합니다. 미국에서는 코호트(Cohort) 프로그램이 이를 실험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코호트를 공식 수업을 뛰어넘는 공동체적 삶으로 확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예수님을 따랐던 세 종류의 제자그룹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둘씩 짝 지워 보냈던 72명의 제자그룹, 3년간 동고동락했던 12명의 제자 그룹, 그리고 3명의 핵심(inner circle) 제자그룹이 있었습니다. 이 세 그룹은 모두 예수님에게 동등하게 사랑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전을 깊이 이해하고 다음 세대와 다음 장으로 이어갔던 사람들은 12명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중에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중심 리더십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제자 공동체는 삶을 나누는 것은 물론, 신학교육과 선교적 공동체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습니다.

한국 신학교 중에는 특히 기숙사 생활을 의무화하는 학교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 이를 소그룹으로 잘 활용해서 살아있는 지하신학교로 전환할 수 있다면, 학생들의 정체성과 영성 형성과 목회 훈련에 큰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즉 몇 개의 소그룹을 모아, 지역사회에 지속적인 선교사역을 하게하고 학점을 주거나, 아니면 여름 현장 (Summer Immersion)학기를 통해 타 지역에 가서 같이 살며, 신학수업과 지역사회 선교를 병행하는 방법입니다.

이 지하신학교들은 작지만, 단단한 언약 공동체들로 새로운 상상력을 심화하고 실천하는 배움[과 선교]의 공동체입니다. 즉, 신학교가 있는 지역과 생태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사회와 세계를 향해 열린 사고를 견지하며, 지속적인 신학 탐구와 지역사회 선교, 그리고 나눔의 공동생활을 통해 성장하는 공동체입니다. 만약 한 교수가 10명의 학생들을 3년 동안 이런 과정으로 지도한다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그리고 상호 그물망처럼 이런 연대를 조직화하고 상호교류한다면 어떤 영향력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한국의 신학교들은 불가피하게 그 규모가 작아질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작은 언약 공동체 실험은 신학교의 미래를 준비하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4차산업을 맞이한 현재 문명이 언제까지 지구 온난화를 비롯한 기후 위기와, 개인주체 및 공동체 파괴, 민주주의와 통치의 위기를 버틸 수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현재 문명이 바벨탑과 같이 무너진다면, 우리는 어디서 새로운 문명의 시작을 찾아야 할까요?

맺는말

공룡새가 지배하는 오늘의 시대에 기독교의 장래는 새로운 교회의 탄생 없다면 매우 어두울 것 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탄생은 신자유주의라는 공룡새에 도전하는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결국 신학교육의 당위성과 필요성은 신학의 새로운 상상력과 신학생들의 시대적 사명과 변화력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명과 변화력이 있다면 새로운 교회는 탄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들을 통해, 삶 전체를 사역에 바치겠다고 결단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 봅니다.

이 상상력이 현실화하고, 시대정신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너지고 있는 문명과 기울어져 가는 교회들을 볼 때,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새로운 교회는 새로운 시대적 상상력을 먹고 자란, 잘 훈련되고 진정한 영성을 가진 젊은이들을 통해 서서히 태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새로운 문명을 영적-도덕적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상력과 대안적 공동체를 축으로 하는 신학교육을 통해 새로 열릴 문명을 준비하며, 뜻있는 젊은이들을 모집하고 키울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이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학준 교수<br>Fuller Theological Seminary<br>
이학준 교수
Fuller Theological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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