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서 태동한 조선인 신앙공동체 (1)
만주에서 태동한 조선인 신앙공동체 (1)
  • 임희국 교수
  • 승인 2023.12.21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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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의 초창기 역사
19세기 후반에서 1920년대 후반까지

*이 글은 12월 18일, 한국희년재단 희년학당 가을학기, 임희국 교수가 강의한 내용이다. 지면 관계상 각주는 삭제했다.


1. 만주에서 태동한 조선인 신앙공동체

유럽 중세 시대 제도(institute)로서 교회를 근원으로(ad fontes) 돌이킨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사도시대 신앙공동체를 회복했다. 이들은 교회가 – 사도들의 유산 위에서 - 하나님 백성과 자녀들의 신앙공동체임을 확인했다.

19세기 후반에 만주 심양에서 조선인 신앙공동체가 생성되었다. 선교사 로스(J. Ross)와 맥킨 타이어(John Macintyre)에게서 복음을 접하고 한문 신약성경 『新約全書文理』(1852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의주 출신 조선인 10여 명의 신앙공동체였다. 하나님이 친히 선교사가 되셔서 복음 전파의 일꾼으로 부르신 선교사들과 그 복음을 믿은 조선인들로 구성된 신앙공동체였다.

이들은 조선 의주와 중국 만주를 오가며 장사한 중산층이었고 한문에 박식하고 중국어(만주어)에 능통했다. 이들은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여러 해 동안 성경 번역에 참여했다. 로스와 이응찬이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서상륜이 누가복음 번역에 참여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그들의 이름은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서상륜, 서경조, 이성하, 이익세, 최성균 등이다. 번역작업에 결실이 맺혀서 1882년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출간되었다. 1887년에는 신약 『예수셩교젼셔』가 완간되었다.

로스 목사 가족
로스 목사 가족

2. 황해도 장연군 솔내(松川)에서 성립된 자생적 신앙공동체

서상륜이 만주에서 번역된 신약성경을 소지하고 압록강을 건너 귀향했다. 이때는 기독교 포교를 엄격히 통제하고 금지하던 상황이었는데, 그가 소지해 있던 기독교 서적이 국경 검문소에서 적발되고 그는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지인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의주에 도착했다. 그는 은신해 있다가 동생 서경조와 함께 외가 마을 황해도 장연군 솔내(松川)로 피신했다. 이 마을에서 그는 복음을 전했고, 그리고 1883년 소래신앙공동체가 성립되었다. 이는 서상륜이 속했던 만주 신앙공동체의 신앙 불씨가 황해도 솔내에 옮겨붙어서 이곳에 신앙공동체가 성립되었다고 본다. 외국(미국) 기독교 선교사가 국내로 들어오기 약 2년 전이었다.

3. 북간도 조선인(한국인) 개신교의 시작, 애국계몽운동, 민족독립운동

1899년에 함경북도 종성의 주민들이 김약연을 중심으로 간도 화룡현 장재촌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중국인의 임야를 사들여 개간해서 한인 부락을 이루었다. 김약연이 개척한 명동촌은 차츰 북간도 민족운동의 중심 지역으로 바뀌어 갔다. 한학자인 그는 규암재(圭巖齊)라 부르는 사숙을 열어 청소년들을 가르치며 맹자의 정치철학인 ‘信(신)․食(식)․兵(병)’을 교육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이 학교의 이름을 명동서숙(明東書塾)으로 바꾸었고, 서양에서 들어오는 문명과 기독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함경북도 회령의 주민들 또한 북간도로 이주해왔다.

종성과 회령에서 북간도로 이주한 사람들 다수는 함경북도 오룡천일대의 유명한 다섯 학자 (일명 오룡천 5현: 최학암, 한봉암, 한치암, 남위언, 채향곡)의 후손이거나 문하생이었다. 이들이 북간도로 대이동을 감행한 목적은 세 가지였다고 한다.

1) 조상들의 옛 땅을 되찾는다.

2) 북간도의 넓은 땅으로 들어가서 농사지으며 이상촌을 건설한다.

3) 나날이 추락하는 이 나라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인재를 양성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북간도에서 매입한 토지 가운데 가장 좋은 땅 1만 평을 학전(學田)으로 떼어 놓았다. 고향에서 선비 학자요 교육자였던 이주민 집안 어른들은 북간도에 정착하자 서당을 차려 자녀들의 교육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김약연은 용암촌에 규암재라는 서당을, 김하규는 대룡동에 소암재라는 서당을, 남위언은 중영촌에서 남오룡재라는 서당을 열었다.

1906년에 북간도에서 신식 교육운동이 일어났다. 이상설(李相卨)이 서울에서 북간도 용정촌으로 이주하여 대불동(大佛洞)에 교회를 설립했고 또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워 교육구국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박무림(朴茂林), 여조현(呂祖鉉), 김우용(金禹鏞), 황영달(黃達永) 등이 동참했다. 당시의 간도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남부 지역으로서 행정구역상 연길도(延吉道)에 속했다. 오늘날 간도하고 부르는 곳은 두만강 건너편 동(東)간도를 가리키면서 통칭 북간도라 부른다. 간도는 연길(延吉)․ 화룡(和龍)․ 왕청(汪淸), 훈춘(春) 등 4개 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간도는 현재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속한다.

19세기 후반에 조선인들이 간도에 이주하게 된 큰 동기는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함이었다. 대체로 농업이민이었다.

그 당시의 대한제국(조선)은 몰락하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고 이어서 1905년 조선 황제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국가 외교권을 박탈했고, 일제가 조선 행정을 통제하는 통감부를 세웠으니, 이상설과 동료들이 국외(만주)로 나와서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길러 국권 회복의 터전을 닦으려 했다.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에 스무 살 남짓 청년 1백여 명이 신식(서양) 학문을 배웠다. 학교의 교육내용은 역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헌법 등 근대교육의 신학문이었다. 그러나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교문을 닫았다. 그 이유는 1907년 3월 숙장 이상설이 이준과 함께 헤이그에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고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용정에 일제가 출장소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감시했기 때문이다. 학교가 문을 닫자 학생들 더러는 서울로 유학을 가기도 했고 또 다른 일부는 자기 동네에 돌아가서 학교를 세웠다. 비록 학교는 폐교되었으나 그 정신은 여전히 활활 불붙어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바, 명동서숙이 1908년 4월 27일에 설립되었다. 김약연의 규암재가 발전한 학교였다. 김약연은 규암재에서 한학의 구식교육을 했는데, 서전서숙의 영향으로 1908년 봄 규암재를 폐하고, 신식(서양) 교육을 시키는 명동서숙을 창립했다. 박무림이 이 학교의 명예 숙장(교장)으로서 외부와 연락하고 교사 초빙을 맡았다. 김약연은 숙감을 맡아 학교의 실무를 담당했다. 학교 재정은 문치정이, 교사는 김학연, 남위언이었다. 학생은 42명이었다.

그런데 교사 초빙이 쉽지 아니한 과제였다. 백방으로 교사를 찾았으나 구할 길이 없어서 학교 운영진의 염려가 매우 컸다. 1909년 4월에 명동서숙의 이름이 명동학교로 바뀌었다. 5월에 박무림 숙장의 추천으로 25세 청년 지사 정병태(본명 정재면)이 용정으로 왔다.

그는 서울 상동청년학원에서 기독교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근대 학문을 익혔다. 그는 본디 안창호 등이 1907년에 조직한 신민회에서 북간도 용정으로 파견되어 서전서숙을 다시 일으키려 했는데,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고, 그리고 그는 명동학교를 주시하고 있었다.

김약연은 명동학교를 근대화 지향의 신식(서양) 학교로 개편하고 싶다는 뜻을 정재면에게 밝히면서 부임하도록 간청했다. 이에, 정재면이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치고 예배도 드려야 한다는 조건을 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인데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예배보는 것을 허락하면 교사로 부임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이것이 학교 당국으로서는 난처한 문제였다. 명동촌의 유지들이 모두 다 한학자였는데, 정재면의 조건을 받아들이게 되면 조상제사를 폐지해야 했다. 정재면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자니 조상제사를 거두어야 하겠고, 그 요구를 거절자니 정재면을 선생으로 모시지 못하게 되고 또 학교 유지가 어렵다고 예상했다. 학교 운영진이 회의를 거듭했다. 이틀 동안 논의한 결과, 정재면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기로 용단을 내렸다. “기독교와 함께 들어오는 신문명에다 민족의 앞날을 걸어 보기로 한 것”이었다.

이리해서 명동촌에는 신학문과 기독교 신앙이 함께 들어왔다. 명동학교는 당장 기독교 학교로 개편되었다. 동시에 이 학교는 서전서숙을 계승했다.

1909년 5월 23일부터 명동학교 재학생 모두 다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로써 명동학교는 기독교 학교가 되었고 동시에 명동교회도 설립되었다. 학생들은 신약성서와 찬송가를 한 권씩 구입했다. 교실에서 첫 예배를 올렸다. 설교가 너무나 생소했고 또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찬송도 귀에 설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차츰 예배에 익숙해졌고 성경공부에도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정재면에겐 “학교와 교회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야 민족을 구원하는 사업을 이룰 수 있다.”는 소신이 있었다. 이리해서 북간도에서 “교회와 학교가 이신동체(二身同體)로 활동”했다. 교회가 설립되면 곧이어 학교가 병설되고 학교가 설립되면 교회가 세워졌다. 정재면은 신앙과 애국심(기독교정신과 민족의식)을 함께 가르치는 교육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1910년에 대한제국이 일제와 강제 합병되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대한제국에서 만주로 들어오는 이민의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기지를 설립하고자 간도이민을 선택한 자가 허다했다.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용정과 국자가였다. 이 두 곳은 상업도시였으며 교육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재면은 명동촌을 근거로 하여 1911년부터 3년 동안 간도 각 지역에 70여 개 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영향력으로 간도에는 반드시 ‘교회 곁에 학교’를 세웠다. 북간도 기독교학교들의 교육목표는 근대지향(近代指向)과 민족지향(民族指向)이었다.

북간도 기독교학교들은 한글교육, 조선 역사교육, 체육교육을 특별히 강조했다. 한글교육에는 서울 상동교회가 운영한 학교에서 가르친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의 영향이 컸다. 북간도의 명동학교는 한글학자 박태환과 장지영을 선생으로 모셨다. 역사학자 황의동도 청빙했다. 역사교육의 목표는 역사에 대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역사의식을 심어서 바르고 의로움을 실천하게 하는데 있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와 체육 두 과목을 종종 함께 묶어서 가르쳤다: 역사의식이 몸에 밴 체육활동. 예컨대 명동학교의 연합대운동회는 군사 행진을 방불케 하는 무장시위를 벌였다. 정재면은 독립전쟁을 염두에 두고 목총을 이용한 병식 체조 교육을 교과과정에 포함시켰다. 그는 군사훈련과 체력단련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그가 뿌린 씨앗은 1920년대에 북간도 전 지역에 수백 개의 학교와 교회의 설립으로 열매가 맺혔고, 그리고 다수의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strong>임희국 교수</strong><br>장로회신학대학교<br>​​​​​​​교회사
임희국 교수
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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