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겔 설교] 복음의 시작
[데겔 설교] 복음의 시작
  • 홍상태 목사
  • 승인 2023.12.08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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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0일 대림절 두 번째 주일
본문: 마가복음 1장 1-8

*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 2023에서 발췌

신학적 관점

마가는 독자가 자신들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 예수에 관한 선포를 한다. 그러나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 그는 이스라엘의 성서를 돌아본다. 실제로, 우리는 그 신앙의 유대교적 뿌리를 이해하지 않고 기독교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오늘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과,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하신 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마가는 복음의 시작이 이사야가 말한 그대로라고 주장한다. 이사야가 세례 요한에 관해 정확하게 예측을 했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마가는 이사야 40장 3절과 "광야"에서의 요한의 설교(4절) 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한다. 이사야는 세례 요한을 이해하는 틀이 된다. 이사야 40장 3절은 바빌로니아 포로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간섭을 묘사한다. 마가가 볼 때 세례 요한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가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사 40:1)"를 알리는 목소리와 같다.

비록 1세기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아니지만 외국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었다. 마치 고국에서 바빌로니아 포로 경험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어서 이사야 40장은 해방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매우 적절한 유비로 여겨진다. (중략) 마가는 우리에게 예수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보라고 가르친다. 예수를 바로 보기 위해 마가는 먼 과거 이스라엘 예언자들에게 돌아간다. 마가는 그들이 하나님의 개입을 고대한 것을 본다.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상황과 소망에 대해 생각하면서 마가는 자연스럽게 세례 요한과 그들 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마가는 요한이 예수를 보는 방식을 통해, 자신이 보는 방식을 변경한다(7-8절). 그리하여, 회개하는 마음과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예언자들의 시각을 통해, 마가가 예수를 바라본다. 마가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이스라엘과 로마 그리고, 그들 자신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도록 초대한다. 우리는 미래의 방향을 찾기 위해 예언자 요한의 말을 경청하는 무리와 같다.

우리는 만사를 바로 잡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기대한다. 요한의 손가락은 예수를 가리킨다. 예수는 오래전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곧 다시 오신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예수가 우리에게 실제로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 어떤 사람인지 밝히실 때 우리는 모두 놀랄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세례 요한을 따라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더 능력 있는 분의 오심을 기대하는 것이다. 오, 오소서, 주 예수님.

주석적 관점

(중략) 하나님의 기쁜 소식은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 예수를 통해서이다. 우리는 시작하는 구절의 영향을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절의 간결성을 단순함으로 혼돈해서도 안된다. 이 1세기 예수의 제자들인 청중은 로마와 유대전쟁(주후66-70년)과 이후의 기간들을 어렵게 살아가는데 기쁜 소식을 활용했다.

어떤 사람들은 책 제목으로, 다른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제목으로 생각했을 1절은, “기쁜 소식”(주전9년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탄생을 알리는 비명에 사용된 같은 말)을 외쳤을 때는 복음서의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란 구절은 어떤 고대 사본에도 나타나지만 다른 데는 없다. (중략) 유대 경전의 언어와 이미지를 반향하는 2-3절은 예언자를 상기시킨다. 많은 사본들이 “이사야의 글”로 말하지만, 다른 사본에서는 “예언자의 글”로 말하고 있다. 이는 마가복음의 저자가 한 것이 첫 번째 인물인 세례 요한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이사야의 예언(40:3), 말라기(3:1), 그리고 출애굽기(23:20)를 조합했다는 것을 의식한 것이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이번 주 다른 성서정과 본문과 잘 연결된다. 사40:1-11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고 선언하는 복음서의 시작 구절은 포함하고 있다. 이사야가 구원을 염원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의 오심을 선언하듯이, 마가 또한 1세기의 재림 지연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베드로후서(3:8-15a)의 말씀도 주님의 오심이 지연되고 있는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 성서정과본문에서 보듯이, 우리 또한 21세기의 청중들에게 기쁜 소식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예언적 목소리가 찾아야 할 적절한 시기이다. 마가가 이사야의 말씀을 자신의 상황에 연결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에 전해져야 한다. 마가의 세례 요한은 예수의 오심을 예고했다. 누가 오늘의 전령자가 될 것인가? 분명히 이것은 마태와 누가의 탄생이야기가 아니다. 구유의 장면을 마가에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마가복음의 시작에서 “탄생이야기”와 같은 것이 있다. 대림절 둘째 주에 새로운 시작, 기쁜 소식을 가지고 우리 시대를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대림절 기간에 그는 오신다. 기대하는 강한자로서나 우리 시대가 원하는 대로는 아닐지라도 하지만 그는 오신다.

목회적 관점

(중략)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가 이전 세대를 기리는 겸손함을 기억하는 때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부르심에 있어서 길을 예비한 선구자들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에서, 목회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목회를 위해 길을 예비했다는 것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상황을 반전시키는 구원자에 관한 문화에 몰두한 교회들은 목회자에게 그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사야의 예언 후에,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세례자 요한이 거창하게 등장한다. 이제 요한은 그 자신이 그 이야기의 끝, 즉 알파와 오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마 주위에서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은, 당신이야말로 그 사람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미래를 내다보면서, 정말로 그 일을 성취할 사람을 상상했다. 요한이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요한의 추종자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라. 누군가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들이 따를만한 사람을 따르고 있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기 원한다.

누가 다른 사람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을 따르기 원하겠는가? 경영의 관점에서 볼 때, 요한은 적어도 그의 추종자들이 자연스럽게 생각을 바꾸게 될 때까지는 미래에 오실 더 나은 구원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혼자 간직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요한은 경영의 관점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래서 리더십의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다만 진실을 말하도록 부름 받았을 뿐이다. 그것이 그가 먹는 야생 꿀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붙여놓으신, 떨쳐낼 수 없는 진리다. 그는 그것을 버릴 수 없다. 그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능력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괴짜처럼 진리를 입고 있다. 저런 괴짜들이 있는 것에 감사하라. 세상이 던져 주는 명성을 차지하기를 거부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선포를 신뢰하는 괴짜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라. 요한이 길을 예비하지 않고 자기가 길이라고 했다면, 대림절은 기다리는 절기가 아니라 최근에 등장한 스승이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믿는 잘못된 신앙의 절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2천년 후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잠깐 있다 사라진 절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사야부터 요한까지, 카리스마 넘치는 경건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사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주위에 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준비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구세주는 오직 한 분뿐이다. 그리고 대림절에 우리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은 겸손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이 우리의 일정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리고 구원자를 기다림으로써, 우리는 그가 아직 여기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가 아직 여기에 없다면, 그것은 구원자가 우리 중 하나일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것은 내가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장한다. 요한은 말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우리의 대림절 기도이다. 우리가 준비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머지 모든 것을 하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기다릴 수 있고, 그가 마침내 여기 오실 것을 믿을 수 있게 하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설교적 관점

마가는 예기치 않았던 소식을 선포하려고 달려오는 숨 가쁜 메신저처럼 복음서를 시작한다. 마태나 누가와는 달리, 마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아기 예수를 기다리라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또한 요한복음 서언처럼 예수를 천상의 존재로 시작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1:1)라는 간결한 선포로 시작한다. 그리고서 또 다른 메신저인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데 그 또한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설교자는 마가가 말하는 “복음의 시작”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한편으로 ‘그 시작’은 물론 이스라엘의 이야기 특히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이야기이다. 마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사야를 인용하고 그리고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요한을 엘리야와 동일시함으로써 구속사 속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작’은 요한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 이 독특한 캐릭터인 요한은 매 순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그가 단지 과도기의 사람임을 알리려고 한다. 그래서 요한에 의하면, ‘그 시작’은 요한 자신에서 시작하지도 않고 그 보다 앞서 있었던 예언자들에게서 근원하지도 않는다. ‘그 시작’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서언은 요한복음의 서언과 매우 흡사하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요 1:1a). 이 본문의 서술방식은 설교자가 마가와 세례요한 모두가 기쁨에 가득 찬 긴박감으로 소식을 전한 것처럼 설교할 것을 제시한다. 이 기쁜 긴박감을 테스트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오직 이 말씀을 듣기 위해서만 모인 사람들을 나는 상상할 수 있을까?”라고 설교자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설교는 이 본문의 분위기와 잘 맞지 않는다. 이 본문은 기대와 준비라는 대림절 주제로 가득 차 있다. 본문에서 요한은 사람들을 시골로부터, 도시로부터,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잠시 숨을 고르며 오실 그 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또한 설교자의 과제이다. 설교를 통해 설교자는 청중들을 잠시 동안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약속된 분이 오시는 것을 준비하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은 준비란 회개와 고백을 내포하고 있다고 선포하였다. 설교자는 이것이 처음에는 약속된 “좋은 소식”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회개와 고백은 우리자신에 관한 진실을 대면하고,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수반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일들을 원하겠는가? 그래서 복음은 적어도 처음에는 종종 “나쁜 소식”처럼 들린다. 회개와 고백 둘 다 과거에 대한 정직한 성찰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지름길이 없다. 장차 일어날 일과 앞으로 오실 분을 말하던 요한은 또한 회개를 요청하면서 과거를 되돌아볼 것을 말한다. 요한 그 자신이 입은 옷이 과거를 상징하고 있다. 요한의 낙타 털옷은 수백 년 전 의상으로 예언자 엘리야가 입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옷이다. 이 옛 의상과 그 옷을 생각나게 하는 예언자 엘리야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어떤 운동도 처음에는 과거를 즉 그 과거가 개인의 역사이건 하나님 백성의 구원사이건 간에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준다.

요한이 주장하듯 과거를 냉철하게 되돌아보는 일은 향수와는 확실히 다르다. 설교자는 회개와 고백을 촉구하는 요한의 요청을 수용하는데 거리낌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적어보고 또 그것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거리낌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설교는 뒤이어 나오는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할 것이다. 요한의 말은 듣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 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비슷하게 다가오는데 그 이유는 우리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분명한 기다림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왜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말씀을 듣기위해 그 먼 길을 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취를 기다리며 인간 내면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피할 수 없는 갈망을 보여주는 설교를 듣기 위해 오늘날도 먼 길을 여행할 것이다.

교회력을 대림절 첫 번째 주일로 시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는 기다림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마가복음에만 독특하게 있는 두 가지 방식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첫째로 성인 요한이 성인 예수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시작하면서 마가는 예수가 이미 성장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구유 곁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싶어 하는 유혹의 때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을 알려준다. 둘째로 본문의 마지막 말은 예수 이후에도 성령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성령은 교회력이 시작될 때부터 기다려야 할 선물인데 그 이유는 성령이 이 모든 이야기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예수 이후에 오실 한 존재 곧 성령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성령은 세상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회상하게 만들면서 시작한 이 본문은 우리가 서 있는 현재에서 마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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