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에세이] 성경을 벤치마킹하라 (2) 초심을 놓치지 말자
[목회 에세이] 성경을 벤치마킹하라 (2) 초심을 놓치지 말자
  • 김상용 목사
  • 승인 2023.12.06 1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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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가 하나인 사람은 시간을 정확히 알지만, 시계가 두 개인 사람은 결코 확실한 시간을 알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분산시키는 세상에 살고 있다. 목표를 설정해도 빗나가기 일쑤다. 도무지 무언가에 집중하며 살기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지도자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초심(original intention)에서 크게 벗어날 때이다. 부부가 불행한 것도 처음의 애정에서 크게 벗어났기 때문이다. A. W. 토저(Aiden Wilson Tozer)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이렇게 하나님께 집중하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 성공하는 길이고 행복한 길로 가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아담은 B.C. 4114년에 지음 받았고, 그로부터 1656년 후인 B.C. 2458년에 노아의 홍수가 발생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후 2천 년이 채 안 되어 창조하신 세상을 심판하신 것이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하셨던 세상을 심판하셨는가? 인간의 죄악 때문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빠르게 들불처럼 번지는 죄의 파급력에 매우 놀라신 것 같다.

(창세기 1:4, 10, 12, 18, 21, 25, 31)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당시는 율법이 선포되기 전이고, 선지자나 사도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인간의 죄악을 예방할 효과적인 채널(channel)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죄악된 세상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인류를 출범시킬(begin) 계획을 하셨다. 그리고 이 일에 의인(義人)이었던 노아를 선택하셨다. 노아(Noah)에게는 아담처럼 다시 인류의 첫 사람이 되어 선한 민족을 세울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창세기 6:5~8)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다시 셋팅(setting)하시고 다시 새롭게 하시기 위한 방법으로 홍수를 계획하셨다. 아마 불 심판이나 물 심판이 방법이었을텐 데 물 심판을 선택하셨다. 내 생각엔 그 당시 지구를 덮는 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창조 시대엔 하늘 위에 궁창이 있었는데 이 궁창에 큰 물 층이 있어 지구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궁창 위의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전 지구적인(global) 홍수가 가능했다고 본다.

이 궁창 위의 물은 오늘날 하늘의 구름이나 안개라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빛을 투과시키는 수증기층이나 물 층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창조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논쟁이 끝나지 않은 문제이니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궁창 아래의 물은 바다, 호수, 강, 지하수를 의미한다.

(창세기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홍수는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2월 17일에 시작되었다. 사십 일을 밤낮 없이 육중한(colossal) 물줄기가 사람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하늘에서는 물줄기가 쉼 없이 쏟아지고 또한 땅이 터져 올라 모든 물이 솟구치니 땅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본래 비가 많이 오더라도 배수가 잘되면 재앙의 수준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그런데 배수는 커녕 땅속에서부터 물이 솟구쳐 올라오니 지구가 거대한 수영장처럼 되고 만 것이다. 그 수영장의 깊이는 최소 5,100m였다. 어떤 생물도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리고 바다가 잔잔한 상태가 아니라 땅이 터지면서 해일(Tsunami, 쓰나미) 같은 현상들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극복 불가능한 재앙이었다.

(창세기 7:11~12)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방주(Ark) 안에는 노아의 가족 여덟 명과 온갖 생물 암수 한 쌍이 승선했다. 방주는 물 위를 떠돌다가 최종적으로 아라랏산(Mount Ararat)에 안착(安着)했다. 아라랏산 높이는 5100m 쯤인데 40일간 비가 쏟아졌으니 매일 127.5m가 내린 것이고 매시간 5.3m, 곧 시간당 5300mm의 비가 쏟아졌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시간당 100mm의 비가 쏟아져도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나고 강이 범람하는데 시간당 5,300mm의 강수였다면 마치 댐의 수문을 열었을 때 쏟아지는 육중한 물줄기가 하늘에서 40일간 내렸다고 상상할 수 있겠다.

(창세기 7:13~16)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노아의 홍수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다. 이것은 분명하다. 어떤 동물이나 바다생물이 잘못하여 홍수 재앙이 임한 게 아니다. 사람의 죄악으로 모든 생물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겁고 중한 것이다. 죄는 나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 심판으로 멸망한 것은 다름 아닌 동성애(同性愛) 죄 때문이었다. 동성애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죄악이었다. 이렇게 동성애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전례가 있음에도 퀴어 축제(Queer Festival)를 자랑스럽게 도심 한복판에서 개최하는 요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결국 사람의 죄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는 온통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사람은 물론 가축과 채소와 풀 한 포기까지 불로 태움을 입었다. 노아의 시대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다면 아브라함의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불로 심판하셨다.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위기 20:13)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베드로후서 2:6~7)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노아의 홍수는 육백 세 되던 해 2월 17일에 시작해 이듬해 육백 일세 2월 27일에 종료되었다. 375일간의 기록이었다. 하지만 노아의 홍수는 준비기간이 무려 120년이었다. 준비기간이 120년이었으니 노아가 480세부터 방주를 제작한 것이 된다. 당시에 노아에겐 아들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은 오백 세 이후에 태어났다. 이 아들들이 성장해서 노아의 방주 제작에 협력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을 것이다. 결국 처음 사십 여년 이상은 노아 혼자 방주 제작에 헌신했을 것이다.

(창세기 5: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다시 말해 노아는 혼자 엄청난 양의 잣나무(고페르나무,gopher)를 벌목해 한 곳에 모아 건조시키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 작은 돛단배도 아니고 축구장 크기의 배를 만드는 것이니 수만 그루의 나무를 벌목해 옮겨야 했을 것이다. 요즘 말로 이보다 더한 막노동이 어디 있을까? 노아의 노동은 120년이나 계속되었다. 비도 오지 않는 상황에서 대형 방주를 제작하는 노아에게 세상 사람들은 비난을 퍼부었을 것이다. 적당히 미쳐야지 완전히 맛이 갔다고 했을 것이다.

노아의 묵묵함은 신앙에 기초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120년 동안 벌목해서 성전 백 개를 직접 건축하라고 한다면 아마 다 뒤로 넘어지지 않을까? 노아의 육신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고 결국 책임을 완수했다.

홍수가 끝난 후 노아는 농사를 지었고 포도나무를 재배했다. 그리고 포도주를 마시고 만취하여 벌거벗고 잠을 잤다. 사실 자기 침실에서는 옷을 한 겹 걸치든 두 겹 걸치든 혹은 벌거벗든 자유이다. 문제될 게 없다고 본다. 그러나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 방에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형제들에게 고자질을 하고 만다(tell on).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주지 않았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 뒷걸음질로 들어가 옷으로 덮어준다.

(창세기 9:20~22)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누구든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를 대하는 태도는 중요하다고 본다. 둘째 아들 함은 마치 새로운 이슈(issue)를 발견한 것처럼 드러내기에 바빴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덮어주기에 분주했다. 술에서 깬 노아는 둘째 아들 함의 모습에 분노하여 함의 아들이자 손자인 가나안을 저주해 버리고 만다. 뭔가 뒤죽박죽된(topsy-turvy) 느낌이다. 내 생각엔 함도, 노아도 중심을 잃은 것 같다.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신앙도 삶도 단정했으면 한다.

노아, 위대한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단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협력하여 노아의 홍수를 시작하셨다. 세상을 새롭게 하셨다. 노아는 최소 120년 이상 하나님께 온전히 삶을 드린 사람이었다. 오늘 노아의 삶에서 도전을 받는 것은 120년 목수로서의 삶이 아니라 좌우로 치우침 없이, 흔들림 없이 나아간 그의 초심(original intention)이다. 중도에 때려 치우고픈 유혹이 왜 없었을까? 하지만 극복했다.

본래 노아의 초심(初心)은 '하나님을 돕는 자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목숨 외에 건질 것 하나 없는 일에 120년을 헌신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 나의 초심은 하나님께 있는가? 세상 부귀영화에 있는가? 노아를 거울삼아 나를 돌아본다.

김상용 목사<br>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br>하늘소망교회 담임목사<br>예수터치 대표<br>
김상용 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하늘소망교회 담임목사
예수터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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