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마에야’의 그림이 가슴 속 깊이 다가온다.
삶의 흔적은
그 시간대를 함께 보낸 이의 향취가 묻어난다.
선원이라는 주제 속에 던져진 마에야의 그림은 94번방 이 자리에 머물러 있다.
낚시를 하며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는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낚시꾼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여인일까? 그 바구니의 물고기들일까?
그리고
그 생선을 건넨 듯한 선원의 허풍스러운 소리 지름에 배를 탄 선원의 얼굴을 뭉개는 기법으로 선원의 말이 모순됨을 보여주듯, 모습의 난해함을 보여주고 있다.
삶은 누구나에게 중요하며
그 시간의 흐름은
누구나에게 소중하다.
하지만,
마에야의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간은 극히 이기주의며
자신의 사고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모습을 여인과 선원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대칭적으로
어이없는 듯 바라보는 낚시꾼과
선원의 그 허영심을 채우기를 거부하는 듯한 이야기를 이끌어 가듯 뭉개져 있는 배를 탄 사람의 일상
아마도
두 대비되는 관계는 아는 관계 속
이기적 선입견과 편견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주변의 배경에
삶의 공간이 아닌
황량하게 무너져 내린
수로교처럼 보이는
앙상한 탑만 남은 듯 보인다.
이 그림을 한참 바라보며
문득
뒤러의 성전에 머물러 토론하는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소장의 작품이 떠올랐고,
프라도미술관 마이노(Maino)의 작품 ‘pentecostes’가 떠오르는 이유가 동일한 감각적 이야기를 느끼게 히는 것 아닐까? 나름 상상을 해 본다.
사람의 진실함은 어디까지이며, 무엇으로 사람은 변해가는가를 보여준 마에야의 작품이다.
글을 쓰고 보니 한 자락의 시가 떠오른다.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으면
겉만 남아버렸을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이어가는
자연의 모습은
경외감과 겸손함을 배우게 된다.
행복이라는 것
여유라는 것
이것은
가진 것 때문이 아니라
주변을 공감하는
삶의 의미를 느낄 때 찾아옴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