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목회] 평화에 대한 단상
[예술과 목회] 평화에 대한 단상
  • 김선중 목사
  • 승인 2023.10.26 1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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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텍사스 달라스의 SMU에서 공부할 때 기독교윤리 신학자인 알렌(Joseph L. Allen) 교수님에게서 “전쟁과 평화”에 대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성전론”은 독선적이니 고려할 가치가 없고, “평화주의(Pacifism)”는 이상적일 뿐 현실적으로 무기력하고 무책임하니, “정당전쟁론”이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인간의 왜곡된 본성을 무시한 채 인간 이성의 판단 능력에 의존하니 그 또한 한계가 있겠습니다.

북핵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몇 년 전, UMC의 “교회와 사회국”이 워싱턴에서 주최했던 “한반도 평화포럼”에 참석하였는데, 마지막 순서는 각자 살고 있는 주의 상원 오피스와 하원 오피스를 방문하여 전쟁을 막도록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정당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이 핵전쟁의 시대에는 대량 학살을 초래할 뿐, 정당화될 수 없으니 한반도 평화를 위해 입법 노력을 해달라”고 호소했었습니다.

몇 년 전 러시아의 두 도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톨스토이가 말년에 거주했던, 모스크바 인근의 “레오 톨스토이 하우스-기념관”에 들렸다가 그의 예쁜 정원을 직접 거닐어 보았습니다. 분위기가 어찌나 아늑하고 평온하던지 『전쟁과 평화』에서 그가 묘사했던 전쟁의 참혹함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임마누엘 칸트 기념관의 어느 방에는 그의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세 가지 물음이 쓰여진 삽화가 액자에 담겨 걸려있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Was kann ich Wissen?)”,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Was soll ich tun?)”,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Was darf ich hoffen?)” 그의 석고 흉상 곁에서 사진을 찍으며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통해 자연과 인간을 이해하며 함께 아우르려는 그의 웅장한 앎의 체계에 압도당했습니다.

하지만 현실 앞에서 인간의 이상은 단지 이상일뿐인가 싶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직도 진행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비극에 이어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살상의 소식도 들려옵니다. 배경음악으로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 노래가 꿈꾸듯 들려지는 가운데, 주변에서 폭발하는 포탄 사이에서 공포에 질린 채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 아팠던,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한 장면이 우리의 현실이어야만 하는지요. 목말라 죽어가며 울던 이스마엘, 그를 바라보며 거리 두고 마주 앉아 통곡하던 하갈 (창21:14~19). 그들의 울음소리는 들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두 귀를 닫고 더 이상 듣기를 거부하시는 것인지요.

1958년, “독일 출판교역의 평화상”을 받으며 칼 야스퍼스가 행한 연설문을 오랜만에 다시 읽습니다. 제목을 “진리, 자유, 그리고 평화(Wahrheit, Freiheit und Friede)”라고 붙인 그 연설에서 그는 평화 정책의 선행조건들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첫째, 인간의 내면적 평화 없이는 어떤 외부적 평화도 유지될 수 없다. 둘째, 평화는 오직 자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셋째, 자유는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진리는 그 내용이 아니라 (칸티안 용어인) “이성의 사유 방식(Denkungsart der Vernunft)”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기에, 이것의 올바른 작동을 위해 망각, 허구, 무뎌진 두려움, 등을 경계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 사유 방식을 무시한다면 “영혼이 소경이 되고, 정신이 귀먹어리가 되고, 소통이 고장 나” 진리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대신에 “비진리(Unwarhheit)”가 실제적인 악으로 횡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지는 못하지만 진리를 향한 도상에 오를 수 있기에, 우리가 진리를 추구할 수만 있다면, 결국 전쟁이나 갈등을 “사랑의 투쟁”으로 변형시킬 수 있고, “소통”을 통해 소멸시킬 수 있게 되어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가장 먼저는 “우리의 존재의 핵심에 대해 진실해지려는 욕구”를 가질 것을 그는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군요(요9:32). 인간의 “알지 못함(Nichtwissen)”을 겸손히 인정하는 야스퍼스는 진리의 내용을 보여주는 대신에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초점하는 듯이 보이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는 진리와 자유와 평화의 내용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현실이 된 하나님의 실재성 그 자체를 진리라고 한다면, 예수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며 아파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 그 진리의 핵심일 것이고,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의 근본 힘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와졌다는 것,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로 “원수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시어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증오(엑드라)”를 이미 뿌리 뽑으셨으니(엡2:16), 우리가 내면에서의 하나님과의 평화를 넘어 수평적으로 모든 이들과도 평화를 이룰 능력을 이미 부여받았다는 것. 이것이 아마 우리 신앙인들이 이해하고 추구하고 실천해야 할 내용일 터입니다.

만일 이러한 내용에 성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여서는 결국 야스퍼스가 “비진리”라고 언급하는 “은폐”, “맹목적 무시”, “거짓말”, “허위”, “사유하지 않음”, “독단적으로 진리를 맹신하기” 등에 빠질 것이고, 죄와 사망의 힘으로부터 해방되어 얻은 자유 대신에 방종에 빠질 것이고, 거짓된 “로마의 평화”에 속으며 계속 갈등과 전쟁에 사로잡혀 지내다가 결국 주저앉고 말 터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마10:34)”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표피적인 신앙 실천에 대한 경고일 터이구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몇 구절을 서툴게 번역해 봅니다(War and Peace. Penguin Classics. 2016. pp. 375, 1021, 1093).

“우리가 아는 단 한가지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지혜로 얻을 수 있는 정점이다.”

“네가 인간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너의 사랑은 증오로 바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할 수 없다. 아무것도, 심지어 죽음조차도, 그 사랑을 훼손할 수 없다. 그 사랑이야말로 영혼의 본질 바로 그것이다.”

“사랑은 죽음을 가로막는다. 사랑은 생명이다. 한 가지 한 가지 내가 모두 이해하는 까닭은 오직 내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까닭은 오직 내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오직 사랑에 매여있다. 사랑은 하나님이다. 죽는다는 것은 사랑의 한 작은 분자(particle)일 뿐인 내가 총괄적이고 영원한 근원에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현실의 다층적인 차원을 살피는 눈을 가지고 모든 노력을 해야겠습니다만, 톨스토이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앎의 한계를 아는 지혜가, 그리고 다시 증오에로 나아가곤 하는 인간의 사랑의 한계를 아는 겸손함이,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이, 서로가 하나님의 사랑의 분자임을 보는 눈이, 그 모든 노력의 바탕에 깊이 배어있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복되어라, 평화를 만드는 자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울 것이다.” - 마태복음 5장 9절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지적인 앎(Verstandeserkenntnis)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Entschluβ)의 문제에 달려있다.” - 칼 야스퍼스

김선중 목사<br>UMC. 위스콘신 연회 정회원목사<br>
김선중 목사
UMC. 위스콘신 연회 정회원목사
예목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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