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 (1)
연동교회 130년의 주춧돌 (1)
  • 임희국 교수
  • 승인 2023.10.12 1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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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목사의 초창기 담임 목회를 중심으로(1900-1905년)

글_임희국(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교회사)
연동교회. 이근복 목사 작품.
연동교회. 이근복 목사 작품.

* 본 글은 임희국 교수가 쓴 글의 일부를 요약, 편집한 것이다. 지면의 한계로 각주는 삭제했다._편집부


연동교회 김주용 위임목사
연동교회 김주용 위임목사

“연동교회 창립 129주년을 맞이해서 '연동교회의 사람들'을 재발굴하는 작업을 하고자 하려 합니다. 그 첫 주춧돌로 연동교회 게일목사님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매년 창립주일이 있는 달에는 역사 속 '연동교회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 종로5가를 연동교회와 그의 사람들의 흔적이 있는 거리를 만드는 일을 또 다른 도시 선교적 측면에서 진행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 함태영 목사, 이상재, 이준, 유영모, 김정식, 김필례, 정재용, 이갑성, 김마리아, 박기성, 이승만 등등의 인물들을 매해 한 명씩 선정하여 과거와 현재의 연동과 기독교, 종로5가와 대한민국을 연결하려고 합니다.”_ 김주용 목사


시작하면서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은 1888년 조선에 선교사로 도착했다. 그는 1900년부터 1927년까지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교역한 후 고국으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 혈통을 지닌 그는 캐나다에서 이민 2세로 태어났고 20대 나이에 조선으로 와서 40여 년 살았다. 60대 중반에 그는 이 나라에서 살아온 삶을 회고했다.

“40년 전 한 아름 안고 내린 젊음을 조선 땅에 다 부리우고(...)조선에 친구가 많고 삼한사온 기후에 길들고 조선의 산천이 나에게 정다운 나는, 나의 고향은 확실히 서먹서먹합니다. 이 정다운 산천을 등지고 친애하는 조선의 형제를 떠나려니 여름에 피어오르는 구름같이 감개가 자못 무량합니다.”

우리 옛말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게일이 이 땅에서 살았던 40여 년은 질풍노도의 변혁기였다. 이 기간에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이 한반도에서 일어났고, 대한제국이 을사조약(1905)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양도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정미7조약으로 군대해산을 당했고, 대한제국은 결국 일본 제국에 강제 병합되어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또한 전기, 전차, 철도부설과 기차역, 신작로 건설과 자동차, 은행, 축음기 등 서양문명이 대거 유입되는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1900년부터 약 5년 동안의 연동교회 발자취와 담임목사 게일의 교역을 살피고자 한다.

교회의 요람기

1894년 연동교회가 예배 처소로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17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국 북장로회 조선(한국)선교부 제10회 연례회의록에는 “정동교회(새문안교회) 교인 중 상당수가 연못골(蓮洞)로 옮겨 갔는데, 그래함 리(Graham Lee, 이길함) 목사가 이미 예배를 시작했다”고 기록되었다. 그해 8월 말부터 11월 초순 사이에 예배 처소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이듬해에 연동교회는 예배 처소에서 정식(미조직) 교회(Church)로 승격되어 발전했다. 이때 서울에는 정동교회(새문안교회 1887년), 곤당골교회(1893년), 연못골교회(연동교회 1895년), 약현교회(1894년) 등 4개 장로교회가 있었다. 연동교회가 발간한 『연동교회 100년사』와 『연동교회 120년사』에는 1894년부터 1900년까지를 “교회 요람기”로 보고 있다. 이 기간에 선교사 무어, 그래함 리, 밀러, 빈턴, 기포드 등이 번갈아 교역했고, 조사 김영옥, 천광실, 김흥경 등이 동역했으며, 또 교인들이 헌신했다. 1899년에 연동교회는 전체 세례교인 59명, 신입 세례교인 9명, 전체 학습교인 20명, 신입 학습교인 14명, 원(願)입교인(입교희망자) 90명, 연보 59.88엔, 주중 모임 장소 3곳, 주중 모인 인원 11명 규모의 교회로 발전했다.

연동교회 담임목사 게일

게일이 조선에 온 지 13년이 되던 1900년 5월에 연동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는 1899년 9월 원산의 선교지부를 캐나다장로회 선교회에 이양하고 그곳을 떠나 서울로 왔다. 1900년 4월 연동교회에서 교역하던 기포드가 세상을 떠난 직후, 5월에 그가 연동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맡았다. 앞에서 서술한 대로, 그는 ‘한국화된 선교사’로서 연동교회의 담임목사로 교역하기 시작했다.

교회 위치, 교인 구성

연못골에 세워진 연동교회의 위치는 ‘연화방(蓮花坊)’이라 불리는 군인 거주 지역이었다. 연화방은 조선의 효종왕 시대에 군인 거주 지역으로 조성된 이후로 19세기 말까지 변동 없이 이어왔다. 또 이곳에는 근처 여러 궁궐과 그 관련 시설에 근무하는 관료(공무원)들이 거주했다. 또 이현(梨峴)시장과 연결된 이곳에는 상인들이 거주했고 또 전통적으로 ‘갖바치’로 불리며 천민으로 분류되던 수공업자(혜공(鞋工, 짚신만드는 장인), 양혜공(洋鞋工))들도 거주했다.

이렇게 군인 거주 지역에 있는 연동교회인데, 그런데 교인들 가운데는 군인(무관)이나 관료가 거의 없었다. 교인 구성원은 시장에서 장사하는 상인이 다수였고 또 수공업에 종사하는 천민 계층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900년경 연동교회의 교인 구성은 사회 계층에서 중인과 그 이하의 주민이 다수였다. 이러한 교인 구성이 1904년 이래로 크게 달라지는데, 뒤에 가서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1904년 이후 연동교회의 변화

1) 교인 구성의 변화

러일전쟁(1904)에서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하자, 국내의 친러(수구)세력이 몰락했다. 이 정세변동으로 말미암아 의금부 감옥 수감자들이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상재는 수감자들을 자주 찾아온 연동교회 담임목사 게일(J. S. Gale)에게 갔다. 이상재의 옥중 동료 김정식·안국선·유성준·이원긍·홍재기 등도 이 교회의 교인으로 등록했다. 민준호·박승봉·이준 등 사대부들도 그들과 함께 연동교회에 출석했다.

앞에서 서술한바, 연동교회 교인의 대다수는 상인들과 장인들이었는데, 1904년 이후로 교인 구성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정부 고위직 관료 출신들이 한꺼번에 교인으로 등록한 이후, 연동교회는 다양한 계층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연동교회의 교인 구성은 전통 반상계급이 타파되는 사회 변혁의 선취였다고 본다. 1904년 연동교회의 주일예배 출석 인원이 163명이었는데, 1906년에는 평균 500명 정도로 늘어났다. 2년 뒤, 1908년에는 주일예배 출석 인원이 1,000명에 이르렀다.

연동교회를 섬긴 목회자들. 연동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연동교회를 섬긴 목회자들. 연동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2)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시행

1904년에 갖바치 천민 출신인 조사 고찬익이 연동교회 장로로 선출되었다. 그는 1899년 게일을 따라 서울로 왔고, 그 이듬해 연동교회의 조사가 되었고, 그리고 이제 장로로 장립했다.

11년 전, 1893년에 미국, 호주, 캐나다 장로교회가 각각 조선으로 파송한 선교사들이 ‘장로회공의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선교사들이 교제하고 선교활동을 논의하는 수평적 기구였고, 그 목적은 이 나라에서 개혁교회의 신앙과 ‘장로교회의 정치’를 사용하는 단일 교단을 세우는 데 있었다. 여기에서 장로교회 정치사용이라는 대목을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자유·평등의 공화주의 원리가 있는 대의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가진 장로교 교단을 상정했다. 이것이 조선(대한제국) 장로교회 체제의 밑그림이었다. 그런데 이 체제는 조선(대한제국)의 역사 속에서 아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것이었다. 1900년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교인들의 손으로 교회 대표를 뽑는 투표를 실시했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실행이었다. 선거로 선출된 교인대표가 김종섭(金宗燮)이었다. 그는 장로에 임직했다. 계속해서, 전국 각 지역의 교회에서 선거로 장로가 선출되었다. 1901년부터 조선인 장로가 교회대표로서 장로회공의회에 총대로 참석하기 시작했다. 공의회의 명칭도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선교사와 조선인 총대의 합성공의회(合成公議會))로 변경되었다. 새로이 구성된 공의회는 전국의 지(支) 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서 의논하는 회의체였다.

1904년에 회집된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는 공의회규칙의 첫 단계를 채택했다. 이 규칙에 따라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장로교회들이 -지(支) 교회의 형편에 따라 시차(時差)를 두고- 교인 대표인 ‘장로’를 선출했고, 장로를 세운 교회에서는 ‘당회’가 구성되었다. 장로는 지(支) 교회를 대표하는 ‘총대’가 되어서 공의회 회원이 되었다. 총대장로는 공의회에서 투표권 등의 권리를 가진 동시에 선교사와도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

그러했던 1904년. 연동교회에서 고찬익이 장로로 선출되어 교인대표가 되었다. 그의 장로 장립은 당시 조선(대한제국)의 반상 계급사회에서 혁명적 사건이었다. 천민 출신이 교인대표인 장로로 선출되어서 계급철폐의 평등사회를 이루는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시행되었다.

3) 교육개혁 - 근대 시민의식 고취

의금부 감옥에서 예수 믿은 사대부들이 연동교회에 등록한 이후로 교회의 교육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들이 교회에서 교육 기관이나 단체를 설립했고, ‘국민교육회’에서 활동했고, 황성(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활동했다.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교육구국(敎育救國)을 위한 사립학교 설립운동이 일어났다.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해서 외세로부터 나라를 구하자는 운동이었다. 연동교회에서는 그해(1904) 8월 24일 독립협회 출신의 교인들 중심으로 ‘국민교육회’가 창립되었다. 국민교육회는 담임목사 게일이 추구하는 교육 계몽운동에 부응했다. 수년 전 1901년에 게일은 ‘중학교’(intermediate school, 경신중학교 전신)를 창설하고 새로운 교과과정을 도입했다.

1901-1902년 중학교에서 가르친 교과목은 조선역사·서양인물사·식물학·일반상식·수공예·지리·산술·한문·화학 등이었다. 수업 받은 학생들은 자연과학 학습을 통해 미신적 생활습성을 버렸다. 또 학교는 이들에게 인간 개인의 자의식이 형성되게 하고 또 과학지식에 기반 한 이성적 사고를 훈련시켰다. 1904년에는 물리, 화학, 수학(산술, 대수), 그리고 천문학도 가르쳤다. 이와 함께 한국 전통 사상의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김정식과 유성준 등이 한문을 가르쳤다. 이에 학생들이 중국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기 나라 조선(한국)에 대한 자의식과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strong>임희국 교수</strong><br>장로회신학대학교<br>​​​​​​​교회사
임희국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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